292화 - 카일의 일지(2)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곧 수많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확실히 대륙에서 볼 수 있는 복장이 아니었다.
외모 또한 상당히 이색적이고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느껴지는 기운 또한 상당히 생소했다.
생소한 만큼 기운은 또한 상당했다.
대략 수 백명의 이들은 모두 단련을 거듭한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한 명 한 명 모두가 최소 마스터급이었다.
심지어 듀라크와 버금가는 인물들이 꽤나 포진해 있었다.
꾀죄죄한 거지꼴을 하고 있는 거지.
기나긴 수염에 도포를 두른 도인.
자글한 주름과 민머리를 하고 있는 스님.
유려한 몸짓에서 꽃 향기가 날 것만 같은 검객.
각기 다른 특색의 인물들.
저들 모두가 듀라크와 버금가는 기세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
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정석과도 같은 사내.
“이미 죽었을 거라 생각했소만···.”
한 사내가 한 발 앞서며 카일에게 말했다.
카일은 피로 물든 눈으로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내뱉었다.
“무림맹주, 학도운···.”
학도운은 카일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두 주먹을 앞으로 모아 고개를 숙여보였다.
“무인으로서 그대의 무(武)에 경의를 표하오.”
카일은 말없이 학도운을 바라봤고.
이윽고 학도운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허나, 그대는 어디까지나 한낱 마두(魔頭)에 지나지 않으오. 그대의 존재는 무림의 해악이외다.”
이어 학도운은 자세를 잡으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청명하고 맑은 기운이 터져나오며, 주변의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듀라크 이상이다.’
그 힘에 시안은 단번에 학도운의 경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지금의 시안과 맞붙는다 한들, 쉬이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카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전신으로 낭자한 피에 혈색이 창백해져있다뿐.
학도운의 기운에 그 어떠한 압박을 받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구파일방의 종사(宗師)들이 모였음에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라···.”
학도운의 뒤쪽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히는 시안은 그것을 놓쳐버렸다.
그러나 카일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히.
차가우면서도 냉혹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보란듯이 뚫어낸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나.”
이내 목소리의 주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뱀과도 같은 인상의 사내.
사내의 시선이 다름 아닌 쓰러진 노인에게 향했다.
카일을 도와주려다 되려 카일에게 당해 쓰러져있는 노인.
얼핏 보기엔 숨을 헐떡거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목숨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설마, 왕 대주가 협력한 건가?”
“왕 대주는 관련 없다. 쿨럭···! 귀찮게 굴길래 죽인 것일 뿐.”
카일의 답에 사내가 목소리에 비웃음을 섞어보였다.
“교주, 당신을 죽이기 위해 펼친 천라지망은 단순한 천라지망이 아니야. 구파일방의 목대 뻗뻗한 노친네들은 물론. 사파와 흑도의 무리가 모두 동원된 천라지망이지.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
사내가 싸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온 천하가 교주, 당신의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뜻이지. 천하가 죽음을 갈구해도 어찌할 수 없는 당신의 강함. 도무지 통제할 수가 없거든. 교주, 당신은 이 무림에 존재해서는 안돼.”
그 말 끝으로 타닥!
사내가 카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일은 그런 사내를 말없이 바라만 봤다.
아무런 움직임도 내보이지 않음에 저항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은 의미가 없었다.
카일은 어디까지나 카일이었으니까.
카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해서 시안은 자신이라도 움직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의미가 없음에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은 진짜 현실이 아니다.
카일의 기억이자 모바일 영주가 투영한 가상의 현실.
이곳에서 시안이 무언가 할 수가 없었다.
또 무언가를 하고자 한들 의미 또한 없었다.
여긴 이미 지나간 카일의 과거이자 기억.
이곳에서 무언가를 바꾼다한들, 시안의 현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안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일순간 카일의 발 아래로 느껴지는 하나의 움직임.
누군가 시안 대신 나서고 있었다.
푸확!
붉은 선혈이 튀어오르며, 털썩.
카일의 몸위로 누군가 포개어졌다.
몸 너머로 느껴지는 무게감에, 카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천천히 시선을 내림에 희끗하게 쇠어버린 백발이 눈에 들어왔다.
카일을 어떻게든 살리고했던 왕 대주라 불린 노인.
왕 대주가 움직이지 않는 카일을 대신하여 움직였다.
“네, 네가 왜···.”
“살아··· 살아남··· 으십시오··· 교주··· 부디···.”
털썩.
왕 대주는 끝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런 왕 대주를 바라보는 카일의 눈빛은 심히 떨리고 있었다.
모바일 영주에서 보던 카일은 언제나 무덤덤하기만 했다.
차갑고 또 냉혹한 분위기만이 느껴진 카일이었다.
“아··· 아아···.”
그런 카일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시안은 저도 모르게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카일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한 뱀 눈의 사내.
사내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노괴의 혓바닥만큼 절세의 무공은 없다 하더니··· 왕대주가 쓸데없는 짓을 했군.”
콰콰콰콰쾅!!!
카일의 주변으로 공간이 모조리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죽어가던 카일의 몸으로 끔찍한 마(魔)가 피워올랐다.
‘아윽···!’
시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휘청거렸다.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통증을 견뎌내었다.
지금 저기, 카일에게서 느껴지는 힘.
그 힘에서 전해지는 절실한 카일의 심정.
진짜 현실이 아닌 만들어낸 가상임에도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아···.”
그것은 들끓고 있었다.
생각이 들끓었고, 사고의 흐름이 들끓었다.
정신을 담는 그릇이 통째로 끓어올랐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들끓는 것만 같았다.
“모두 조심해!”
“주화입마다!!”
들끓는 카일의 힘에 사람들이 모두 경악하며 태세를 갖추었다.
특히나 무림 맹주라 불렸던 학도운이라는 자.
“제갈독명! 술식을 전개하시오!”
학도운의 말에 한 서생이 앞으로 나서보였다.
나섬과 동시에 주변으로 기이한 진법의 형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법···? 이라고 하기엔 그 방식이 묘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저 현상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을 터.
그러나 시안은 마법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저것은 마법이되 마법이 아닌 요술(Sorcery).
그나마 시안이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펼쳐진 요술의 진법은 카일의 힘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카일의 존재 부정한다··· 라고 함이 옳은 표현이었다.
“마지막 단계만 하면 됩니다! 마두에게 이것을!”
“계속 술식을 전개하시오! 내가 마무리를 하겠소이다!”
이에 학도운이 서생에게 무언가를 받아들었다.
이윽고 기세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서걱─!
절삭음과 함께 스르륵 쿵.
학도운의 머리가 잘리며,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무림맹주라 불리던 이의 허무한 죽음.
그 말도 안되는 현상에 무림의 고수들이 경악 어린 외침을 터트렸다.
“탈마(脫魔)의 경지!”
“생사경마저 뛰어넘었다고···?”
모두가 그 자리에 굳어 경악한다.
“있을 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눈 앞의 현실을 부정하며,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그 사이로 터벅, 카일이 움직였다.
천하에 군림하는 절대 강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은 한 시대를 풍미한 강자다.
하여, 그들은 각 시대마다 한 명씩 존재한다.
그러나 그 모든 시대.
고금(古今)이라는 시간 속, 모든 천하제일인들을 줄세워 가장 앞선 제일(第一)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하늘 위의 하늘, 천외천(天外天).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
그 절대자의 눈빛이 앞선 시야를 훑었다.
두려움에 떠는 모든 이를 하나하나, 바라봄에.
거지꼴을 하고 있는 이에게 닿아 들려온다.
“비탄이 흘러넘쳐 개방을 적시고.”
절대자의 시선이 흘러간다.
“소리 높은 원한은 무당산을 불태우며.”
계속, 계속.
“비명으로 물든 피로 화산의 매화는 혈향(血香)으로 흐드러질지니.”
군림의 시선은 이곳에 모인 모든 이에게 고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세상을 향해 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온 천하는 끝내 마(魔)로 물들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힌다.
천지가 격동하며, 카일의 심정이 오롯이 전해진다.
그건 분노임과 동시에 슬픔이었다.
슬픔임과 동시에 증오였다.
그렇기에 이것은 이름 모를 감정이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응어리진 무언의 감정.
‘아으윽···!’
시안은 차마 그 이상으로 정신을 열 수 없었다.
쓰라리고 아려오는 정신에 생각과 정신을 닫아버렸다.
지금 카일에게서 느껴지는 힘.
시안은 지금 떨고 있었다.
가상의 일임에 분명하나 두려움이 끊이질 않는다.
기세를 끌어올려 대항함에도 의미가 없었다.
파르르, 떨려오는 전신.
시안의 몸에 이어진 드래곤의 힘.
만물 위에 군림하는 최강자, 드래곤.
그 드래곤의 본능마저, 카일의 힘에 전율하며 떨고 있었다.
막을 수··· 없다.
그로써 떠오르는 하나의 결말.
시안의 생각은 이곳의 모든 이들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천하의 모든 무인이 달려든다한들 대적할 수 없다.
지금의 카일은,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
죽는다.
그로써 천하는 피로 적셔질 것이며.
끝내 마(魔)로 물들어 드리울 것이다.
하늘의 이치를 증오하는 마(魔).
하늘의 법도를 뒤집는 존재.
.
그 누구도 저 발걸음을 막을 수 없으리라.
오직.
덥썩.
주름진 손만이 카일의 발목을 잠시마나 붙잡을 뿐이었다.
“교주···.”
그리고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
그것은 카일의 발 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진 노인, 왕 대주에게서 들려오고 있었다.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마시옵소서···.”
핏발이 선 카일의 두 눈에 증오가 담긴다.
이성이 잠식된 광기에 카일의 손이 위로 치켜들어졌다.
콰아아아아─!!
카일의 손에 초월의 마기가 휘몰아치며, 주변의 풍경을 일그러뜨렸다.
이윽고 카일의 손이 아래로 향했을 때.
“교주는··· 그런 분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왕대주의 목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다.
그러나 카일의 움직임은 잠시 멈추었다.
일순간 마기가 사그라든다.
광기에 잠식된 카일의 두 눈동자가 일순간 떨려온다.
그 틈에 왕대주의 손이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움켜쥠에, 카일을 향해 그것을 각인시켰다.
화아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터져나오는 환한 빛무리.
빛무리는 점점 거세어지며 카일의 존재를 집어삼켜버렸다.
광기로 잠식된 카일의 이성이 되돌아온다.
“이 무슨···.”
“제갈 세가의··· 술법이라 하옵니다. 제 이해가 아둔한지라···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사옵니다.”
왕대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교주를 다른 천하의 세계로 보내는 것이라··· 쿨럭! 하옵니다. 저들은 처음부터··· 교주를 죽일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저도 저들의 뜻에 동조했습니다···.”
왕 대주는 쿨럭! 다시 한 번 바닥으로 각혈했다.
“교주, 저들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만일 저들의 말대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으로 가시게 된다면···.”
카일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돌아왔다.
검게 물들었던 눈에 초점이 잡혀왔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마시옵소서···.”
카일은 그때서야 왕 대주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행여나 복수를 하려고 하지 마시옵소서··· 돌아와 다시 혼자가 되려하지··· 마시옵소서···.”
왕 대주는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쿨럭, 거리는 핏물은 왕 대주의 생명을 빠르게 탐하고 있었다.
생명의 불씨는 말을 하면 할수록 빠르게 꺼져갔으나.
“새로이 가시는 세상에서는··· 동고동락하는 벗을 만드시옵고···.”
왕 대주는 말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온 천하를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정인을 만드시옵고··· 그리하여 천하에는 울부짖는 비명만이 있지 않음을··· 부디 느껴주시옵소서.”
카일은 떨리는 눈으로 왕 대주를 바라봤다.
왕대주는 그런 카일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삶이란, 뒤로 걷는 꽃길과도 같아··· 지나고 온 다음에야 아름다웠음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옵니다···.”
“아··· 아아···.”
들이삼키는 숨에, 카일의 심장이 격동했다.
떨려오는 숨결에, 카일의 전신이 떨어왔다.
“그 말이··· 이 나이가 되어서야 조금은 와닿는··· 쿨럭!”
터져나오는 각혈에 왕대주의 몸이 크게 꺾여갔다.
이제는 불씨조차 느껴지지 않는 생명력.
“교주··· 그곳에서는 부디···.”
천하(天下)에 들려오는 잡다한 비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버려지고 외면받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주의 삶을 누리시기를···.”
그리하여 천하를 할퀴는 검이 아니라.
“천하를··· 담아내는 검이 되어주시기를···.”
그 말을 끝으로, 왕 대주의 말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축, 늘어진 왕대주의 시신.
화아아아악!
이윽고 빛무리가 카일을 뒤덮었고.
그에 따라 시안의 시야 또한 새하얗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