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 카일의 일지(5)
카일과 6군주의 싸움.
그 양상은 카일의 압도였다.
아르나이즈들조차 어찌하지 못했던 6군주들의 강함은 의미가 없었다.
결국 군주들과 악마들은 패퇴하여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일조차 쉬이 행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끝내 군주들은 도망쳤고, 카일은 그때서야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카일은 그대로 자리를 떠나갔다.
별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다는 듯.
별 다른 인사를 받고자 함이 아니었다는 듯.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려한다는 듯.
이것이 원래 자신의 운명이라는 듯.
카일은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르나이즈들은 그런 카일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건 압도적인 카일의 강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카일의 고독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뮤리엘, 엘로디, 노에미, 모르크루.
네 명의 아르나이즈들은 떠나가는 카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직.
“잠깐!”
샤를롯만이 카일의 앞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앞을 막은 샤를롯의 모습에 카일이 자리에 멈춰섰다.
가만히 시선을 들어 바라봄에, 샤를롯은 살짝 당황해보였다.
샤를롯 스스로도 당황하고 있었다.
왜 자신이 앞을 가로막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렇기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
샤를롯은 카일의 앞을 가로막으며 서 있었다.
‘그냥 그래야만 했다고 했었던가?’
시안이 확인했던 샤를롯의 기록.
그곳에 적혀있던 이 날 샤를롯의 심정.
샤를롯은 그곳에서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이라고만 고백했을 뿐이었다.
카일은 가만히 샤를롯을 바라봤고.
샤를롯은 그때서야 첫 마디를 내뱉었다.
“당신도 악마와 싸우려는 목적인 건가?”
카일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샤를롯의 기록에서는 카일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안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카일의 일지를 지켜보는 이 순간.
카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원래 세계로의 귀환.
그 유일한 방법이었던 악마들의 도움을 카일 스스로가 거절했다.
그렇기에 혼란스럽다.
현재 카일을 그나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혼란이었다.
그렇기에 이어진 카일의 답.
“그렇다.”
이건 일종의 얼버무림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샤를롯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 우리와 함께하자.”
“······”
샤를롯은 다짜고짜 카일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카일은 이번엔 어처구니 없는 눈빛을 지으며 그 감정을 드러내었다.
이 또한 비망록에서 확인했던 일.
“난 샤를롯.”
샤를롯은 카일에게 손을 내밀었고.
카일이 샤를롯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봄에.
“잘 부탁해.”
샤를롯은 그렇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름이··· 캉일이라고 했었던가?”
“그걸 어떻게?”
카일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샤를롯이 카일의 본명을 알리가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이 대륙의 사람이 카일의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카일은 상당히 놀란 눈으로 샤를롯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안은 그런 카일의 모습에 살짝 웃음을 흘렸다.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
카일이 샤를롯을 구해준 날의 일.
아무래도 카일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기사, 그 이후로도 카일이 구해준 사람들이 몇 명인데 그걸 하나하나 다 기억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째, 샤를롯은 조금 서운한 것일까.
샤를롯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카일이라고 부를게. 괜찮지?”
샤를롯은 피로 젖은 금발을 쓸어내리며 제안했고.
카일은 그저 놀란 눈으로 샤를롯을 바라볼 뿐이었다.
정확히는 카일은 지금 어떤 기억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샤를롯의 기록에서는 알 수 없었던, 카일이 아르나이즈에 합류한 결정적인 이유.
지금 시안의 시야로 흐릿하게 비치는 어떤 풍경.
지금 카일이 떠올리고 있는 하나의 기억.
‘새로이 가시는 세상에서는··· 동고동락하는 벗을 만드시옵고···.’
죽어가며 카일을 살리려고 했던 왕 대주의 유언과도 같은 말.
과거, 이전 세계에서 카일에게는 동료라 부를 만한 이는 없었다.
보듬고 보살펴주며, 대신하여 검을 들어줄 이들만 있을 뿐이었다.
또한 카일을 범접할 자도 없었다.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의 절대자는 언제나 고독했다.
그러나 지금 손을 내밀고 있는 샤를롯.
대신하여 검을 들어달라는 것이 아닌, 같이 검을 들자는 샤를롯.
이들과 동료가 될 수 있을까.
카일은 말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
역시나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
카일이 아르나이즈와 합류한 이후.
악마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카일의 강함을 어찌할 수 없었을 뿐더러.
아르나이즈들도 쉬이볼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정확히는 카일이 합류함에 따라 아르나이즈들의 실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같은 검(劍)을 사용하는 샤를롯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법사인 엘로디, 사제 뮤리엘, 대장장이 모르크루, 주술사 노에미까지.
카일은 모든 분야에 걸쳐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어, 어떻게 이런 생각을···!”
“카일··· 너 샤를롯과 같은 기사 아니었어?”
당연하게도 아르나이즈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카일이 선보인 깨달음의 깊이는 단순히 검(劍)을 다루는 기사라 볼 수 없었으니까.
아르나이즈들은 종종 경악하며 소리쳤고.
그럴 때면 카일은 종종 이렇게 답을 해보였다.
“극(極)에 달하면,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본다.”
언젠가, 시안도 들었던 말이었다.
정확히는 카일이 켄드릭에게 해주었던 말을 켄드릭이 다시 시안에게 해준 말이었다.
그때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 싶었다만.
지금의 시안은 저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아르나이즈들은 점점 카일을 깊게 신뢰했다.
그러나 카일은 어느 정도 아르나이즈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아르나이즈 리더는 리더였던 것일까.
그런 카일의 심정을 샤를롯은 모르지 않았다.
유난히도 밝은 달이 떠오른 어느 날의 밤.
“왜 그렇게 궁해있어? 두고 온 연인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샤를롯은 사색에 잠긴 카일에게 물어왔다.
장난스러운 표정과 어투로 농담을 섞으며 다가왔다.
카일은 그런 샤를롯을 바라봤고.
상당히 진지한 카일의 모습에 샤를롯은 그때서야 장난기를 지울 수 있었다.
“정말로··· 연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카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의 달의 바라봤다.
“샤를롯.”
그리고 이어진 카일의 말.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을까.”
샤를롯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카일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샤를롯의 기록을 봤던 당시, 시안 또한 저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시안은 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카일은 이 대륙의 사람이 아니다.
카일은 언젠가 이 대륙을 떠나야만 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야만 하는 사람.
그러나 카일은 원래 세계로 보내주겠다던 악마의 유혹을 떨쳐내었다.
그렇기에 카일은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르나이즈 동료들과 함께한 나날들.
그로써 천하를 할퀴지 않는 검이 되었던 나날들.
처음으로 겪어보는 생소한 경험에.
원래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기억에.
“······”
카일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
카일과 샤를롯 그리고 아르나이즈들은 계속해서 악마와 싸워나갔다.
그러나 점점 그 한계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힘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인원의 한계.
카일의 강함이 초월적이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카일 한 명이었다.
아르나이즈들이 강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5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륙은 넓었고 6명의 영웅으로는 모든 대륙의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이에 샤를롯은 하나 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대륙에 숨어있는 실력자들을 포섭했고.
악마와 싸우는 수많은 이들을 규합했다.
그리하여 지금.
카앙─!
“이 더러운 악마 새끼!”
카일은 어떤 여인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금발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카일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여인.
여인은 카일을 향해 악마라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카일의 마(魔)를 악마의 기운으로 느낀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여인은 카일을 향해 죽일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여인은 카일을 제압할 수 없었다.
“하흑···!”
되려 제압을 당함에, 카일을 향해 분한 눈빛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무짓도 하지 않고 돌아서는 카일의 모습에.
“에···?”
여인의 표정이 붕, 떠버렸다.
이윽고 들려오는 어떤 익숙한 목소리.
“레아···?”
“오빠···?”
이것이, 샤를롯과 레아의 재회이자.
카일과 레아의 첫 만남이었다.
‘참···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네.’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레아는 지금과 다른 게 없었으니까.
굳이 변한 것을 꼽자면 사념(死念)이 아닌 검을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과 외모가 달라져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머리색과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져있었다.
지금의 백은색 머리칼이 아닌, 태양빛을 닮은 금발의 머리칼.
고혹적인 분위기가 아닌, 화사하면서도 어딘가 차가운 듯한 분위기.
어쩌면 그래서일까.
‘황녀님과 상당히 닮았는데?’
지금의 레아는 엘레나와 닮아도 너무도 닮았다.
닮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빼다박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안이 처음 샤를롯을 콘라드로 착각했던 것처럼.
레아 또한 엘레나로 착각했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후손은 후손인건가.’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쨌거나 샤를롯과 레아는 남매 간의 해후를 나누었다.
그리고 카일은 언제나 그러했듯, 홀로 검을 다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기···.”
레아가 조심스레 말을 걸며 카일에게 다가왔다.
카일은 검을 손질하던 손을 멈추었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자, 레아가 멋쩍은 표정으로 카일 앞에 서 있었다.
“그··· 아깐··· 미안했어요.”
정확히는 굉장히 미안한 얼굴로.
그렇지만 조금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표정으로.
“다짜고짜 그쪽을 공격한 거 말이에요. 막, 악마 새끼라고 욕한 것도 그렇고···.”
“신경쓸 필요 없다.”
카일은 무심한 시선으로 다시 검을 손질했다.
“혹시 다친 데는··· 없으시죠?”
“없다.”
카일은 무뚝뚝하게 답을 해보일 뿐이었다.
시선 또한 손질하는 검에서 떼지 않았다.
“하하··· 그, 그렇겠죠···? 제가 일방적으로 당했으니까요.”
이어진 레아의 말에도 카일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떠나지 않고 붙어있는 레아의 모습에 카일이 잠시 손을 멈추었다.
“내게 할 말이 더 남아있나?”
“네? 아, 아뇨. 그냥··· 그냥 미안해서···.”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는 레아의 모습에 시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일은 그런 레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레아를 바라봤다.
그렇게 레아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봄에, 레아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참으로 생소했다.
과거, 천마라는 교주였던 카일은 절대자였다.
그렇기에 카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정해져있었다.
경외 혹은 두려움.
그 이외의 것으로는 동경과 공포와 같은 것이 있었으나 범주는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 레아에게서 느껴지는 감정.
카일에게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레아 또한 생소한 여인이었다.
해서 카일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렴풋이 하나의 기억만이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온 천하를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정인을 만드시옵고···’
카일은 물끄러미 레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카일의 모습 때문일까.
“왜, 왜, 왜요···?”
레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며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당황하다 못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그런 레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안해할 필요 없다.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카일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누,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그래요?! 착각하지 마세요! 그, 그냥··· 미안해서 그런 거니까···.”
이어 레아가 자리에서 벌떡.
“아, 아무튼! 어, 어디 다친 데 있으면 저한테 말해요. 저기, 뮤리엘이라는 성녀말고 저한테요! 알겠죠? 꼭이요!”
휙! 하니 자리를 떠나가버렸다.
그리고 카일은 떠나가는 레아를 바라보다 무심하게 다시 검을 손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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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을 규합한 아르나이즈들은 거침없이 악마들을 몰아내었다.
그리고 이때 쯤, 아르나이즈들이 저마다 엑시드(Exceed)의 경지에 닿았던 시점이었다.
해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생각한 것일까.
【여기서 모두 끝내주마!】
군주들은 모든 악마들의 전력을 한데 모아 공격했다.
이에 따라 아르나이즈들 또한 모든 세력을 규합하여 대항했다.
그리하여 펼쳐진 사상 초유의 전쟁.
‘최후의 전투구나.’
대륙의 명운을 건 최후의 전투.
그 배경이 되었던 지금의 어둠의 숲.
신화 속의 전쟁은 실로 처절하기 짝이 없었다.
아르나이즈들의 멋들어진 활약.
영웅들의 고결한 기개와 결의.
“끄아아악!”
“살려줘···! 살려줘···!”
그런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건 말 그대로 어린애들을 위한 동화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은 참혹한 전쟁이었을 뿐이었다.
죽고 죽이는,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하흐흑···!】
【루슈리아!!】
“가요! 여긴 내게 맡기고 어서요!”
“뮤리엘··· 부탁할게!”
아르나이즈들에게도, 악마 군주들에게도.
최후의 전투는 처절함의 연속이었다.
그 처절한 전투 속.
카일은 어떤 존재와 대면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시안이 대면한 적이 없는 마지막 악마.
일곱 가지의 대죄 중 첫 번째 죄악.
【네가 그 인간인가.】
교만의 악마.
교만의 악마는 별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겉모습은 그 누가 봐도 인간과 다르지 않았고.
감각으로 느껴지는 본질 또한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저 존재를 꼭 정의해야한다면··· 시안은 인간이라 말할 것 같았다.
교만의 악마는 악마가 아나리, 인간이라 말할 것 같았다.
‘달라.’
그런데 달랐다.
여타 다른 악마 군주들?
수준 자체를 달리했다.
차원 자체를 달리했다.
과거, 샤를롯의 기록에서 샤를롯은 교만의 악마를 이렇게 표현했다.
존재가 닿을 수 없는 격.
그 격을 초월한 존재.
샤를롯을 비롯한 아르나이즈 동료들이 모두 합심해도 대적할 수 없는 존재.
대륙의 모든 이들이 힘을 합하여도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존재.
당시엔 시안은 설마하니 라는 생각이었다.
샤를롯이 과장을 했겠거니 생각했었다.
말이 안되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 직접 마주하니 결코 그렇지 않았다.
샤를롯의 표현은 결단코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축소했으면 축소했을 뿐.
그리고 그건 비단 시안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지금 시안이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카일의 기억 속.
“······”
카일에게는 ‘긴장’이라는 개념이 떠올라있었다.
과거, 카일이 다른 세계에서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떠오르지 않은 감정이었다.
천라지망이니 뭐니 하는 순간에도 카일은 긴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아윽···!’
일순간 시야가 흔들리며 머리가 타오를듯이 아파왔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카일과 교만의 악마의 싸움.
그 싸움을 지켜봄에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려왔다.
움직임을 쫓을 때면 시신경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행해지는 동작을 이해하기 위한 뇌세포가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켜보는 것조차, 단순히 구경하는 것조차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초월과 초월의 싸움.
시안은 카일과 교만의 악마를 볼 수 없었다.
시안이 정신을 차린 것은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일.
“하악···! 하악···!”
전신이 피로 낭자하여 치명상을 입은 카일과.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카일의 검에 베어져 사라지는 교만의 악마.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하여 들려오는 커다란 함성.
기나긴 악마와의 전쟁이 막을 내리는 순간만을 시안은 인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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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뒤바귀며 다시 한 번 새하얀 빛무리가 덮쳐왔다.
‘아윽···!’
그리고 시안은 여전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카일과 교만의 악마.
그 둘의 싸움을 지켜본 여파이자 대가 때문이었다.
솔직히 제대로 지켜본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눈에 담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이 지경이었다.
카일과 대적한 유일무이한 존재.
비록 카일에게 패배했지만, 카일을 죽일 수도 있었던 존재.
더 이상의 설명이 뭐가 필요 있을까.
‘아으윽···!’
여전히 아찔한 정신에 시안은 숨을 헐떡거렸다.
그 순간, 빛무리가 잠잠해지며 시야가 바로잡혀왔다.
시안이 숨을 고르며 정신을 차리려던 그때.
“떠나야··· 한다고?”
앞선 장면으로 샤를롯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그렇다.”
그 뒤를 이어 카일의 목소리 또한 들려왔다.
그리하여 펼쳐진 카일의 기억.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이자 시안을 이곳까지 이끌었던 진실.
카일이 홀연히 떠나야만 했던, 카일이 마주한 진실.
“왜? 대체··· 왜?”
그때의 감춰졌던 진실이, 지금 시안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