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 시작되는 운명(2)
“······!”
“······!”
모인 황궁의 대신들이 충격으로 두 눈을 크게 떠보였다.
발루아가 또한 꽤나 놀란 눈을 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파면 이야기까지 나올지는 몰랐으니까.
파면은 성직자에게 내려질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관련한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권한을 없애버린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성직자로서 재기할 수 없다.
사제로서 그야말로 최고의 형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파면은 쉽게 행해지는 일이 아니었다.
지난 역사를 살펴봐도 몇 번 행해졌던 적이 없었다.
그 마저도 일반 평사제 혹은 견습 사제 정도만이 파면이 이루어졌다.
고위 사제를 파면한 적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성녀를 파면한다?
그 의미는 단순했다.
아리아가 하는 일은 우리 신성 제국과 관련이 없다.
즉, 우리 신성 제국은 이 일에서 완전히 빠지겠다.
“허어···.”
“이건···.”
내려앉은 충격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잠깐의 정적.
“성녀는 어떻게 할 것이지?”
약간의 시간이 지나 발루아가가 입을 열었다.
아리아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발루아가를 바라봤다.
그리고 발루아가의 눈빛을 바라봄에.
아리아는 발루아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위엄 속에 비치는 어떤 관용.
발언을 철회해도 이해하겠다.
발루아가는 아리아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발루아가의 발언에는 아리아의 힘도 깃들어 있었다.
따라서 아리아가 말을 취소하면, 발루아가의 발언도 어느 정도 힘을 잃는다.
이는 황제로서의 체면이 까이는 일.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아리아가 발루아가의 뒤통수를 치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발루아가는 이해한다는 뜻을 내보이고 있었다.
실로 제국의 1인자다운 배포라 할 수 있었다.
신성 제국의 교황과는 너무도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아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약간의 고민 끝에.
“발언을 철회하지 않을 거예요.”
아리아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아리아의 결정에 다시 한 번 충격이 내려앉았다.
예상과는 다른 아리아의 말에 모두가 놀란 눈치였다.
“철회하지 않겠다?”
그리고 발루아가 또한 조금 놀란 눈치였다.
“예.”
“그 말씀은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말씀이겠지요.”
아리아의 답에 라히르가 곧바로 물어왔고.
아리아는 시선을 돌려 라히르를 바라봤다.
그리고 라히르가 말하는 이유와 증거.
아리아는 라히르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초월적인 미(美)와 어울어진 아찔한 미소.
내비치는 아리아의 미모는 실로 여신처럼 빛나보였다.
그런 아리아의 미(美)에 대신들 사이에서 감탄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아는 그런 감탄을 가로지르며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휘날리는 백금발 사이로 꽃향기가 느껴졌다.
미모에 배어나오는 향기에 취할 때쯤.
아리아가 어느덧 라히르 앞에 서보였다.
“합당한 이유를 물으셨나요?”
그리고 청순한 목소리로 물음과 동시에.
아리아가 라히르의 귓가로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신의 뜻이라고 했잖아.”
그렇게 들려오는 아리아의 작디 작은 속삭임.
“이 개호로 늙은이 새끼야.”
그것은 고요한 대청전 전체로 퍼져나갔고.
“······”
“······”
“······”
대청전에는 충격을 넘어 숨길 수 없는 경악이 짙게 내려앉았다.
#
황궁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다.
발칵, 뒤집어지다 못해 난리가 나야했다고 해야할까.
그 이유는 역시나 아리아의 충격적인 발언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황궁이 발칵, 뒤집어졌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황궁이 발칵, 뒤집어진 결정적인 이유.
“거기서 뺨 따귀는 왜 날린거야?”
“그 늙구렁이 새끼가 자꾸 짜증나게 하잖아!”
시안의 말에 아리아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표정 또한 울그락불그락 한 것이 제대로 짜증이 나보였다.
하여간, 저 놈의 성질머리는.
“그럼 뺨 한 번 날렸으면 되었지. 거기서 니킥은 왜 갈긴건데?”
“파면이니 뭐니 자꾸 협박하는데 그럼 가만히 있어?”
“그럼 머리채 잡고 구둣발로 찍은 건?”
“그거야 그 새끼가 자꾸 뭐라뭐라─.”
“그래서 라히르의 코뼈와 턱뼈를 뭉갠거야? 신어(神語)까지 사용해서 안 때린 척. 재빨리 회복시킨거고?”
“그, 그건 어떻게 알았어?”
“로열 나이츠가 달려들었는데도 널 못 말렸다는데 뻔하지 뭐.”
로열 나이츠는 단원 전부가 엑스퍼트에 달하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로열 나이츠들이 저 가녀린 아리아 한 명 어찌하지 못했다?
여기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해서 시안이 나설 때까지, 그 누구도 아리아를 말리지 못했었다.
어쩐지 레아가 요즘 아리아를 잘 갈구지 못한다 싶었다.
뭐, 아무튼.
“폐하가 바로 앞에 있었던 건 알고 있지? 너 자칫 잘못하면 반역죄로 끌려갈 뻔 했어.”
정말이지 발루아가가 관용을 베풀어줬기에 망정이지.
“폐하께서 너보고 뭐라 말씀하셨는지는 알아?”
“뭐라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 미친 또라이 새끼가 한 명 더 있음을 깨달았단다.”
“······”
아리아는 입을 비죽일 뿐이었다.
“그보다 너. 공식석상에서는 내숭 떠는 거 아니였냐?”
“아 몰라! 짜증나 죽겠는데 그딴 내숭. 알게 뭐야.”
“얼씨구.”
“그보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군데?”
“뭐가?”
“미친 또라이 새끼가 한 명 더 있다며. 그럼 나 말고 한 명 더 있다는 뜻 아니야?”
“몰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시안은 그걸 왜 나한테 묻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무슨 독심술을 아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대체 왜일까.
“날 왜 쳐다봐? 진짜 몰라.”
“아니, 그냥.”
아리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안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발언을 철회하겠다 하면 되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린거야?”
“내가 너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이제 와 나몰라라하면 그게 약속이야?”
“그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지. 너 그러다 진짜 파면되면 어쩌려고 그래?”
“아, 몰라. 파면하라면 하라지.”
그러면서 아리아가 새침하게 홱, 고개를 돌려보이는데.
어떤 자신감이 느껴지면서도···.
참 대책 없는 말괄량이 느낌도 들었다.
“파면당하면 갈 곳은 있고?”
“있지.”
“있다고?”
“응. 루벤에서 살면 되잖아.”
“루벤? 설마 어둠의 숲에 있는 그 루벤? 내 영지?”
“거기 말고 다른 루벤이 있어?”
“누구 마음대로?”
시안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나 안 받아줄거야?”
“내가 널 왜 받아줘? 아니, 그보다 너 숙박비랑 식비 밀린 건 알고 있지?”
“이씨! 그거 준다니까 그러네!”
“언제 줄건데? 그리고 너 성녀직 파면당하면 돈 당겨올 곳도 없지 않아?”
“그, 그건···.”
“밀린 대금부터 결제하고 다시 이야기하자 그럼.”
시안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말을 일축시켜버렸다.
“나쁜 새끼! 쪼잔한 놈!”
“그걸 이제야 알았어?”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만해서 심성은 고약해! 세상에서 제일 찌질해!”
“야. 점점 말이 심해진다?”
“천하의 둔재 같은 놈! 줘도 못 먹는 호구 같은 놈!”
“······ 뭐?”
“핫!”
일순간 아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떠보였다.
이어 당황하는 표정과 함께 두 손을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 점점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이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너 방금 뭐라···.”
“몰라! 그리고 남이사 파면 당하든 말든! 길거리에서 객사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그러더니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콰앙! 문을 부수듯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쟤가 요즘 왜 저래 진짜. ”
그보다 저 놈의 성질은 참···.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진짜로 파면당하면 어쩔 수 없긴 하다만.”
갈 곳 없다는데 어디 함부로 내놓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다름 아닌 시안을 도와주려다 생긴 일 아닌가.
“그냥 신성 제국에서 편하게 살면 되는데. 쟤도 참 사서 고생한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뭐, 루카스가 좋아하겠네.”
시안은 피식, 흘리는 웃음과 함께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보다 신성 제국이 움직였다라···.”
시안은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황궁에 찾아온 신성 제국의 사절단.
정확히는 이번에 황혼 교파의 수장이 된 라히르 추기경.
“레이첼이 움직인건가?”
당장의 생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레이첼은 전 신성 제국의 추기경이자 황혼 교파의 수장.
지금은 라히르가 그 자리를 메꿨다고는 하나, 그 입김이 사라진 것은 아닐 터였다.
그리고 그 레이첼은 현재 엘란두르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럼 이사벨이 행동에 나선 건가?”
해서 이렇게까지 생각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신성 제국을 쥐고 움직일 생각이다···?”
하지만 상당한 비약이 섞인 추측이었다.
일개 교파도 아니고, 신성 제국 전체를 움직인다니.
물론 샤를롯 제국에 비하면 신성 제국이 조금 뒤쳐지기는 한다.
그럼에도 신성 제국은 같은 제국 반열에 드는 거대한 국가였다.
즉, 제국이라는 국가 전체를 쥐고 움직인다는 것.
굉장한 비약 섞인 추측이라 할 수 있었다.
“음···.”
하지만 시안은 마냥 넘길 수만은 없었다.
그 이유로는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것.
그리고 라히르 추기경이 신성 제국의 대표로 왔다는 것.
아리아에게 들은 라히르의 성정.
그리고 교황의 태도와 지금의 상황을 고려하면···.
“신성 제국이 황혼 교파에 의해 먹혔나?”
아리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빠르게 움직였다 하더라도 힘든 일이긴 했다.
하지만 악마와 관련하여 엮는다면?
어찌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레이첼이 악마와 관련되었음을 두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그런 레이첼은 현재 엘란두르에 있었다.
여기에 그동안 이사벨이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대응이 없었던 것까지.
“묘한데···.”
실로 묘했다.
묘해도 너무 묘했다.
만일 위의 추측들이 모두 맞다면···.
“신성 제국을 움직여 전쟁을 벌일 생각이다?”
정말 말도 안되는 생각이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안이 본 이사벨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엘란두르의 내정을 총괄한 이사벨.
어떤 의미로는 듀라크보다 이사벨이 더 까다로웠다.
“음···.”
하지만 섣불리 확신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는 건 교황청 내부에 악마 숭배자들이 있다는 건데···.”
더 나아가 교황청이 악마들에게 먹혔다는 뜻이다.
아리아가 자리를 비운, 그 몇 달의 시간만에 말이다.
“그게 말이 되··· 기는 하겠네.”
아마 평소의 시안이었다면 바로 고개를 저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안은 아니었다.
적어도 가능성은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시안이 경험한 카일의 기억 속.
천 년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뮤리엘이 악마에게 잠식될 당시.
교황청은 이미 악마 숭배로 가득차 있었다.
만일 현재의 교황청 또한 그러하다면.
천 년전과 같이 이미 악마들에게 먹혀있는 상태라면.
“음···.”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기에 시안은 확정짓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웅성웅성.
귀빈실 밖에서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란이 들려왔다.
슬쩍, 기감을 끌어올려 확인한 바.
황궁의 로열 나이츠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째,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귀빈실의 문을 열어 마침 시안의 눈앞으로 뛰어가는 로열 나이츠 한 명을 붙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누구··· 추, 충!”
갑작스러운 부름에 인상을 와락, 찡그리던 로열 나이츠가 시안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급히 군례를 해보였다.
시안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 그, 그것이···.”
그러자 로열 나이츠가 말을 흘리며 답을 해오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이···.
어째, 말해서는 안되는 종류의 것인 것 같았다.
심히 궁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로열 나이츠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기에 궁금증을 삼키려던 찰나.
“엘란두르에 파견했던 황궁의 조사단이 지금 막 돌아왔네.”
한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
그곳엔 황태자, 콘라드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충!”
시안과 로열 나이츠는 각 위치에 맞는 예를 내보였다.
콘라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열 나이츠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그럼 전 부대로 복귀하겠습니다!”
로열 나이츠는 다시 한 번 군례를 해보임과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로열 나이츠가 사라진 이후.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콘라드에게 물었다.
“황궁의 조사단이라면··· 악마와 관련하여 엘란두르에 파견한 조사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콘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 일로 시안, 자네를 찾아가려던 참이었네.”
“저를 말씀이십니까? 혹시 조사단들이 무언가를 발견한 겁니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네.”
콘라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 발견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함이 정확하겠군.”
“예? 그게 무슨 말씀··· 입니까?”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발견했으면 발견한 거고.
발견 못 했으면 발견 못 한 거지.
발견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은 뭐란 말인가.
시안은 의뭉스러운 얼굴로 콘라드를 바라봤고.
콘라드는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들려온 콘라드의 답.
“조사단의 잘려진 목이, 지금 막 황궁에 도착했다네.”
시안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