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 엑시드, 그 너머(1)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힌다.
천지가 격동하는 풍경 속.
그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허억···! 허억···!”
시안은 달뜬 숨을 삼켰다.
내뱉어진 숨소리는 풍경 속에 휘말려 사라졌다.
닿았다.
역사상 단 6명만이 닿았던 신화적인 경지, 엑시드(Exceed).
마지막 마혼수라검의 9식과 함께 시안은 비로소 그 경지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군림하는 신을 끌어내릴 수 있었다.
하늘을 치솟는 오만을 꺾어내릴 수 있었다.
천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탄생한 7번째 엑시드(Exceed)의 기사.
시안은 끝내 그 경지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가슴 속을 가득 들어찼다.
그리고 휘청.
일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며 시안의 몸이 비틀거렸다.
시안은 멸살의 검을 바닥에 내리꽂아 가까스로 중심을 유지했다.
고양감과 함께 형용할 수 없는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시안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봤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리고 처참한 신의 비명을 마주할 수 있었다.
카이는 끔찍한 고통을 부르짖으며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전신으로 낭자한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갈기갈기 찢어진 전신은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군림도.
그 이상의 오만도.
그리하여 신(神)으로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교만은 꺾였고, 신(神)은 추락했다.
시안은 바닥에 꽂은 멸살의 검에 몸을 지탱하며 괴로워하는 카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큭큭큭···.!”】
카이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하하하하!!”】
억눌린 웃음이 터지며 소리가 높아진다.
높이 터져나오는 소리에는 광포함이 담겨있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광기 어린 웃음처럼 다가왔다.
이윽고 카이의 시선이 천천히 들려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눈빛.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오롯이 시안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 인정··· 한다.”】
카이는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카이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을 내려다 봤다.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신격에 허탈한 웃음을 흘려보였다.
【“실로 믿기지는 않으나···.”】
카이가 다시 시선을 들었다.
천천히 들린 시선은 다시금 시안을 향하며 번들거렸다.
【“이 세계의 파멸이 오늘이 아님을··· 인정한다.”】
카이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큭큭, 웃어보였다.
미치광이 혹은 정신병자.
한때 신(神)이라 불리던 자의 말로였다.
그런 카이의 모습에 시안은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이가 모든 것을 포기했음을.
카이는 이번 전쟁에서의 패배를 인정했고.
카이는 이번 시대에서의 패배를 인정했다.
하지만.
【“허나, 이번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말 그대로 이번 시대에서의 패배였다.
오늘에서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천 년전과 같은 패배에 불과했다.
크나큰 의미는 없는 패배에 지나지 않았다.
악마들은 언제고 다시 부활한다.
짧으면 수 십년. 길면 수 백년.
더 길면 수 천년의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부활한다.
그렇기에 이번 시대에서의 패배는 어디까지나 이번 시대에서의 일이다.
다음 시대 혹은 그 다음 시대.
그것도 안 되면 그 다다음 시대.
악마들은 다시 부활해 대륙을 위협할 것이다.
이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싸움이다.
그리고 시안은 그 싸움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천 년전, 카일이 지금 여기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 세계의 파멸은 오늘이 아니요, 이 시대의 대의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정한다.
이번 시대의 싸움은 명백한 패배임을, 카이는 인정한다.
【“허나.”】
카이는 한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순간 카이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카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시안의 바로 앞이었다.
시안은 황급히 멸살의 검을 잡아 뽑았다.
하지만 전신을 지배하는 탈력감 때문일까.
카이의 움직임이 한 박자 더 빨랐다.
덥썩.
우악스러운 손길이 시안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숨이 턱, 막혀오며 컥컥!
내뱉는 호흡이 거칠어졌다.
카이가 피로 젖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너의 파멸만은 오늘이 될지니.”】
목을 움켜쥐는 힘이 점점 거세어져왔다.
시안은 모든 마기를 폭사시키며 그에 대항했다.
“커컥···!”
그러나···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엑시드의 경지에 닿았으나 그 경지에 닿기 위한 과정이 고되었다.
남아있는 마력이 얼마 되지 않았고.
전신을 지배하는 탈력감은 여전했다.
꽈드득!
반면에 카이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 시대에서의 패배를 인정한 카이는 자신의 존재를 불살라 마지막을 태우고 있었다.
“커헉···!”
옥죄어오는 숨에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갔다.
-시안!! 안돼!!
-주군!!
귓가로 아른거리는 레아와 켄드릭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콰아아앙!
앞선 시야가 폭발하며 목을 옥죄던 힘이 일시에 풀려나갔다.
“허어억···!”
달콤한 숨을 힘껏 들이쉬며 생명을 탐했다.
정신이 흔들리며 의식이 흐릿해져왔다.
시안은 이를 까득, 씹어 왼쪽 볼의 살점을 뜯어내었다.
찢어지는 통증이 입안으로 퍼져나가며, 흐릿해지는 의식이 번쩍!
되돌아오는 정신과 의식에 손을 뻗어 멸살의 검을 재소환해 움켜쥐었다.
황급히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봤다.
-컥···! 커컥!
-끄으윽!
그리고 카이에게 붙잡혀있는 레아와 켄드릭을 볼 수 있었다.
레아와 켄드릭은 카이의 양 손에 각각 붙잡혀 있었다.
각자 사념과 마기를 끌어올리며 대항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카이는 레아와 켄드릭을 움켜쥔 채,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거라.”】
콰드득!
【“너의 존재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의 모습을.”】
발버둥 치던 레아와 켄드릭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느껴지던 레아의 사념과 켄드릭의 마기가 희미하게 꺼져갔다.
이윽고 피로 젖은 카이의 웃음이 시안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양손에 들린 미약한 피조물들을 바라봄에.
콰드드득!
피어나던 레아의 사념이.
타오르던 켄드릭의 푸른 안광이.
허무하게 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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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의 양손에 붙잡힌 레아와 켄드릭의 신형이 축, 늘어졌다.
카이는 그런 둘을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렸다.
허공을 부유하는 둘은 아무런 움직임을 내보이지 않았다.
콰당탕! 바닥에 쳐박힌 뒤에도 어떠한 움직임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 어떠한 반응도 없었으며.
그 어떠한 기운조차 느껴지지가 않았다.
시안의 두 눈이 쉼없이 떨려왔다.
흔들리는 시안의 두 눈이 초점없이 떨려왔다.
【“똑똑히 보거라. 너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이한 존재들을 말이다.”】
카이의 말에 시안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시안은 주변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모두가 쓰러져있었다.
콘라드는 복부가 뚫린 채, 내장을 쏟아내고 있었고.
아리아는 턱뼈가 으스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있었다.
세라는 혀가 뽑혀짐과 동시에 양쪽 귀가 뜯겨져있었다.
세미르는 모든 근육이 찢어져 터져있었고.
카리스는 머리에 돋아난 용의 뿔이 으스러져 두개골이 깨져있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움직임이 없었다.
모두가··· 모두가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선사하는 파멸일지니.”】
그와 동시에 시안의 머릿속에서 툭.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콰콰콰쾅!!!
시안의 주변으로 공간이 모조리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시안의 전신으로 끔찍한 마(魔)가 피워올랐다.
시안이라는 존재를 장작으로 타오르는 억겁의 화마.
그것은 들끓고 있었다.
생각이 들끓었고, 사고의 흐름이 들끓었다.
정신을 담는 그릇이 통째로 끓어올랐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들끓는 것만 같았다.
오래 전, 카일이 겪었던 그때와 똑같이.
하하하하하하!!!
들끓는 세상 속에서 카이는 광포하게 웃었다.
【“아둔하구나! 그리고 다르지 않구나! 한때 영웅이라 칭송받던 이들의 최후와!”】
천 년전, 세상을 구원한 여섯의 아르나이즈.
영웅들은 대륙을 빛냈으나, 영웅들은 빛나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찬란한 삶을 보내야 했던 영웅들이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악마에게 잠식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도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천 년전, 아르나이즈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처럼.
지금의 후예들도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세상은 저들을 영웅이라 기억할 것이다.
무구한 세월 속에서도 저들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아르나이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걸··· 이걸 과연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이딴 걸 과연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끓어오르는 시안의 생각은, 그 이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성의 영역이 도려내어지며.
그 사이로 끝을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오로지 존재의 파멸만을 갈망하는 지독한 분노.
존재가 갖는 근원의 죄.
분노(Ira)의 죄악은, 시안의 들끓는 생각 사이로 파고들어 자리했다.
이윽고 알 수 없는 회의감이 휘몰아쳤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노력을 했던 것일까.
어차피 이렇게 비참한 결과만이 남아있을 뿐인데 말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발버둥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텐데.
발악해도 달라지지 않는 운명의 결과.
나태의 죄악이 시안의 정신을 잠식했다.
그 뒤를 이어 질투, 색욕, 탐식, 탐욕.
존재에 기생하는 죄악들이 시안의 정신에 기생하기 시작했다.
악마들은 존재에 기생하여 그 부활의 신호탄을 알렸다.
그리하여 끓어넘치는 시안의 마력은, 붙잡는 모든 공간을 파괴시켰다.
또 그리하여 차츰차츰, 시안은 무너지고 있었다.
잠식된 죄악은 시안의 존재를 서서히 붕괴시키고 있었다.
잠식된 죄악이 서서히 발아한다.
지금 당장이라도 죄악을 다스려야 하건만.
이성이 끊어진 시안은 스스로를 돌보고 있지 않았다.
폭사하는 초월의 마력.
무한의 마력을 담는 드래곤 하트.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악마와 합일된 시안의 힘은 새로이 정립된 인과마저 초월하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힘을 버티지 못했고.
시안의 존재는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하나.
시안의 파멸.
더하여 현 시대에서의 영웅들의 파멸.
카이가 목표했던 파멸이었다.
이 시대에서의 싸움은 패배했다.
허나, 영웅들의 파멸을 선사한 것만으로도 목적은 달성했다.
악마들은 언제고 부활하는 불멸(不滅)의 존재다.
그러나 저들은 언제고 죽음을 맞이하는 필멸(必滅)의 존재.
지금의 파멸은 곧 후대의 파멸로 이어진다.
이 시대에서 영웅들의 대가 끊긴다.
저들은 더 이상 세대와 세대를 잊지 못하리라.
그리하여 종국에는 세상의 파멸로 이어질 것이리라.
결국.
이 모든 길의 끝에서 웃는 것은 자신이었다.
필멸(必滅)은 불멸(不滅)을 넘어설 수 없다.
이 끝없는 싸움의 끝에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카이는 광포하게 웃었다.
높이, 높이, 더 높이.
치솟는 광기의 웃음은 끝을 모르고 높아졌다.
감각 너머에서 시안의 초월적인 힘이 느껴진다.
신(神)조차 대항할 수 없는 아득한 힘이 터져나온다.
저것이 이 세상의 진정한 절대자였다.
그 어떤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렇기에 지금 시안은 파멸이라는 목표를 넘어서고 있었다.
카이가 아니, 교만이 그토록 갈망하던 참된 신(神)의 그릇.
솔직히 이 정도까지 예상한 결과는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시안이 반응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시안의 파멸만 있다면.
영웅들의 대를 이번 시다에서 끊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보기 좋게 죄악에 삼켜졌다.
스스로의 죄악을 다스리지 못하고, 악마에게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군주들의 새로운 그릇이 되어주고 있었다.
죄악에 잠식된 시안이 서서히 다가온다.
카이는 양손을 펼치며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안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마지막이자 첫 번째 죄악이 시안에게 스며들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진정한 신(神)의 탄생을 목도하리라.
하하하하하하!
카이의 웃음은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덥썩, 시안의 손이 카이의 목을 붙잡았을때.
숨이 막히는 카이의 두 눈이 희번뜩거리며 시안을 바라봤을 때.
흠칫.
카이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죄악에 잠식된 시안의 힘.
그로써 번들리거는 악(惡)의 힘.
이 힘은 분명한 악(惡)의 힘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무언가 이상했다.
시안 안에서 느껴지는 죄악의 힘이 무언가 이상했다.
카이는 마안으로 시안의 내부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죄악이··· 묶여있··· 다?”】
죄악이 시안에게 붙잡혀 묶여있었다.
죄악이 시안을 잠식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죄악이 시안을 잠식한 것까지는 맞았다.
그러나 죄악이 시안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존재가 갖는 근원의 죄들이 시안에게 억압당해 그 안에 묶여있었다.
따라서 잠식처럼 보이나 잠식이 아니었다.
【“죄악을··· 일부러 받아들였다고?”】
말이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르나이즈들조차 죄악을 다스리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죄악이 정신에 잠식된 순간.
그것은 다스린다는 개념이 적용될 수가 없었다.
악마들은 존재의 죄악에 기생하는 그 자체와 하나가 될 뿐이었다.
존재의 죄악은 그런 것이다.
근원의 죄란 그러한 것이다.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원인, 인(因).
거스를 수 없는 이 세상의 절대적인 법칙이다.
그런데 지금···!
【“······!!”】
일순간 카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딱 한 존재가··· 있었으니까.
그 저항할 수 없는 법칙을 거스르고자 했던 존재가 딱 한 명 있었다.
하여, 지금.
【“서, 설마···!”】
시안을 바라보는 카이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