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45화 (45/361)

45화 어선 실습

특히 이번 승선 실습은 사실 학생들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당시까지 해운회사라고 할 만한 기업이 많지 않은 데다 사람들이 선망하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 만큼 몇 안 되는 자리를 두고 경쟁이 치열했던 것.

여기서는 현장 실습을 해야 실적이 나오는데 고과가 잘 나와야 취직이 용이해지는 만큼 졸업 전 실습은 필수적. 그런데 때맞춰 실습을 못 하게 되었으니 처음부터 일정이 확 꼬여 버린 것.

분노한 어로학과 학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원래 담당 사관도 안 온답니다. 일정상 불가피한 사유라는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임시 강사가 배정되긴 했는데, 어업 조합에서 나온 인간이라 개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업 자체가 붕 뜬 상황입니다.”

“행정실엔 문의해 봤나? 학교에선 뭐라는데?”

강태준의 질문에 재진이가 억울한 듯 대답했다.

“사정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답니다. 학과장과 상의해서 결정하라는데 그쪽도 항해과 쪽이 수가 더 많으니, 다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 회유하려 들더군요.”

“뭐 그럼 대체 우리는 어쩌라고. 순서 다 지키고 나면 저흰 방학 때까지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데?”

“맞아, 그건 좀 심한데? 저번 3학년들 대만 실습도 항해과만 꼴랑 배정되고, 우리는 연안 실습밖에 못 했는데…… 이번에도 항해과가 우선이라고?”

“같은 학비 내고 학교 다니는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불만이 극에 달한 학생들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교내 상황이 이렇게 꼬인 것엔 학교의 재정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던 중 지역 유지인 이억수가 전란기의 어려운 시절 가건물을 지어 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신임 총장과 친분이 두터운 이억수는 행정 부속실에 자기 사람들을 심었고, 서서히 학교를 이용해 이권 사업에 발을 뻗었다.

동생 이억기는 그 첨병이나 마찬가지.

대학 교수진 가운데도 이억수의 입김이 들어가다 보니, 실습 일정 대부분이 전부 항해과에 유리하게 배정된 것이다.

어로학과 역시 참을 만큼 참았지만, 이번 일은 선을 넘는 처사.

분기한 사람들이 하나둘 불만을 토로하는 가운데, 강태준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분연히 외쳤다.

“이렇게 바보같이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항해과 그 자식들 지금 어딨어?”

“아니, 가서 어쩌시려고요.”

“뭐긴 뭐야? 당장, 실습선 찾으러 가야지.”

“네? 어떻게 말입니까?”

“뭐가 어려울 게 있나? 필요하면 무력으로라도 탈취해 와야 할 거 아냐? 우리 배 내놓으라고?”

“네? 그게 무슨?”

강태준의 폭탄 발언에 웅성거리는 학생들. 겁먹은 녀석 하나가 걱정스러운 듯 떠듬거렸다.

“하지만 형님, 사관들이 말하기를 선상 반란은 중죄로 분류된다는데…… 저희가 배를 억지로 가져오면 처벌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런 쫄보 새끼가. 그래서 니는 배알도 없냐? 비싼 등록금 내고 승선 실습도 제대로 못 하면 졸업 후 취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어? 우리가 호구야?”

“그, 그건 아닙니다만.”

주저하는 학생들을 돌아보며 강태준이 일갈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윗놈들 사정에 왜 우리 어로과가 희생되어야 하는데? 항해과 놈들만 학생이야? 매번 그놈들만 특혜를 보고 왜 우리는 피해를 봐야 하나? 전시 때 가건물 하나 지어 줬다고 생색내는 건가? 우리도 이 정도면 충분히 양보하지 않았어?”

강태준의 목소리가 커지자 모여 있던 학생들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급기야 성난 황소처럼 씩씩대는 녀석들.

강태준의 연설이 젊은 혈기에 불을 지른 것이다.

“시발, 꼬우면 짜르라고 해! 학생들 다 짜르면 학교가 문 닫는 게 먼저일 테니.”

“우리도 참을 만큼 참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밟히고 살 거야?!”

“가서 싸웁시다! 가서 권리를 쟁취합시다!”

“옳소!!”

봇물 터지듯 터진 불만에 기름을 끼얹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강태준을 비롯한 복학생들이 앞장서자 분위기에 휩쓸린 후배들도 뒤를 따랐다.

흐릿한 조명의 골목길을 빠져나간 일행은 순식간에 부두 앞 광장에 도착했다.

부두 앞에 계류된 실습선 하나.

그것이 바로 실습선인 명왕호였다.

마침 슬리핑 레일 위로 끌어 올려진 실습선에 매달려 치핑 작업을 하던 학생들은 멀리서 몰려오는 대부대에 깜짝 놀랐다.

“저거 뭐냐?”

“어로학과 놈들 아녀?”

서둘러 나온 일행의 전진을 멈추게 했지만 이미 흥분한 학생들은 가릴 것이 없었다.

돌격을 앞둔 기병처럼 길게 횡대로 늘어선 인원들이 일제히 나타났다.

강태준이 눈짓하자 앞으로 나선 김광필.

눈치를 보던 상대측에서 나온 것은 항해과 3학년이자 학과 대표를 맡은 송규익이다.

일행을 돌아본 그가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거, 어로학과 실습생들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오?”

“뭐긴, 뭐야 니들이 훔쳐 간 배 찾으러 왔다.”

“응, 뭘 말이오?”

“말장난할 시간 없어. 좋은 말 할 때 내놔. 실습선.”

사태를 파악하려는 듯 인상이 찌푸려진 송규익.

술렁거리는 학생들이 쑥덕대더니 잠시 후 이억기가 이죽거리며 나섰다.

“훔쳐 간 선박이라 말씀이 심하시군요. 선배님. 이건 정당하게 절차를 거쳐서 받아 온 겁니다.”

“너한테 안 물었는데? 그리고 애초에 그런 것도 모르고 온 줄 아나?”

“모르실 거 같아서 한 말씀입니다만, 애초에 규정상 저희 배고 넘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 절차에 우리가 동의한 적 없다면?”

“그러면 학교에 따지셔야죠.”

그 말에 강태준이 비웃듯이 귀를 후벼 팠다.

“어디서 개소리가 들리는구먼. 형 뒷배로 기어들어 온 놈이. 부끄러운 줄을 몰라?”

“뭐. 뭐요?”

“니 고교 때 학교 성적 조사 좀 했지. 가로 도배를 해 놨던데. 그 성적으로 진학이 가능한 게 이상하더군. 솔직히 얼마 줬나? 항해과 입학할 때?”

“그게 무슨 상관이요 지금?”

“너 새낀 말할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우리가 한가롭게 대화나 하자고 온 줄 알아? 말로 할 거 없어. 야, 쳐!”

와 하는 신호와 함께 기세를 드높인 학생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양과 사이에 쌓였던 앙금이 폭발하자, 어로학과 학생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항해과 역시 피하지 않고 그에 맞서 싸웠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정박지를 두고 물러선다는 건 자존심상 밀릴 수 없는 일이었던 것.

장내가 떠나갈 듯한 고함을 지르며 뛰어든 학생들.

여기저기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쌈박질이 벌어졌다.

“너 시팔, 거기 안 서?”

열이 오를 대로 오른 김광필에 달려드는 덩치들. 이어 패싸움이 벌어졌다.

패를 이룬 학생들은 상대와 치고받고 싸우며 차례로 잡아 두들겨 넘기기 시작했다.

싸움은 완전히 개싸움이었다. 발길질에 차이고, 허리를 질린 학생들이 나동그라지자, 열이 뻗친 일부는 야구 빠따 같은 각목을 방아 찧듯 마구 휘둘렀다.

그나마 김광필이 폼은 개중 나았다. 전장에서 굴러먹으면서 인민군도 때려잡아 본 놈인데다 총검 돌격까지 해 봤던 깜냥이 어디 가진 않는 것.

각목을 뺏은 김광필이 현란하게 움직이자, 명치를 찔린 학생들은 순식간에 게거품을 물고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었다.

“야 이 잡것들아, 드루와. 다 드루와!”

순식간에 세 놈을 해치운 김광필이 포효했지만, 사태는 어로학과에 지극히 불리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싸워도 결국 패싸움은 수적 우세가 절대적이다.

애초에 항해과 인원이 더 많아서인지 밀집된 쪽수부터가 몇 배는 차이가 났던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 있던 항해과 놈들까지 전부 가세하면서 상황은 더 불리해졌다.

아무리 싸움꾼이라 해도 한꺼번에 달려드는 숫자를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상대는 맷집 하나는 서러운 뱃놈들 아닌가.

중과부적에 밀린 어로학과 학생들은 하나씩 무력화되었다. 그렇게 패색이 짙어지던 그때, 어디선가 고함이 들렸다.

“동작 그만!”

어느새, 선미 갑판으로 올라간 강태준이 긴 휘발유 통을 들고 있었다.

“야, 이 X새끼들아! 쌈박질 안 멈추나? 이 배 홀랑 태워 버린다?”

강태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부두 앞이 조용해졌다.

그 자리에서 휘발유 통을 배 위로 콸콸 쏟아부어 버린 강태준.

선미로 뛰어 올라오려는 사람들의 행동에 강태준이 라이터를 켰다.

그에 헉하고 소스라치게 놀란 학생들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생각해 보니. 아주 단순한 해결책이 있더구만. 배가 없으면 굳이 싸울 것도 없지 않아?”

그 모습을 본 항해과 학생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런 미친 또라이를 봤나?”

“장난하지 말고. 그거 내려놓으십쇼. 선배!”

하지만 강태준은 여전히 지포 라이터를 딸깍거렸다.

“장난?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확 불 질러 버리는 수가 있어?”

강태준이 두 번째 자바라 통을 발로 차자 통이 엎어졌다.

불꽃을 튀기는 강태준에 깜짝 놀란 학생들이 애원하듯 외쳤다.

“그만! 진정하시고 말로 합시다.”

“그래요. 선배님 제발! 그만하십쇼.”

뒤에 멀찌감치 물러난 학생들은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실습선이 불타 버리면 손해를 보는 건 어로학과만이 아니다.

애원하듯 사정하며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을 정도.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송규익이 굳은 얼굴로 협상에 나섰다.

“원하는 게 뭐요?”

“실습선 내놔, 애초에 우리가 먼저 타기로 약속했잖아?”

“그건…….”

송규익은 우물거릴 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학과 대표라 해도 수업과 관계된 일은 일개 학생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그럴 권한이 없는 그로서는 난처한 일이었다. 당연히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원론적인 수준일 수밖에 없다.

“그건 많이 곤란하오. 그 부분은 행정처나 학과장님의 승낙이 있어야 하니 일단 협의를 해야…….”

“야! 그럼 우린 꿔다 놓은 보릿자룬가. 니들끼리 입 맞춰 놓고 장단이나 맞추라 이건가? 시펄, 야 우들이 전부 핫바지로 보여?”

강태준이 다시 라이터를 켜자 소스라치게 놀라 물러서는 학생들.

뱃전 위에서 태연하게 담배를 꺼내는 그가 라이터를 켰다.

그런 강태준의 행동에 간이 콩알만 해진 학생들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객기 그만 부리고 내려오소. 나이 먹고 뭐 하는 짓입니까?”

“닥쳐! 사설 그만 까고 부끄러운 줄 알아 자식들아? 어이, 이억기?”

순간적으로 지목당한 이억기가 크게 당황했다.

“나?”

“그래 임마, 니가 주모자지? 네놈이 실습선 항해과로 빼돌린 거. 삼척동자도 다 알아.”

“그건 모함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릴.”

헛기침을 하며 뻗대는 이억기. 하지만 어로학과 쪽에서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자 곧바로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렇게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한참 동안 이억기를 살펴보던 강태준이 담배를 끄며 선선히 끄덕였다.

“좋다. 이런 식으로는 답이 없으니, 그럼 정정당당하게 승부로 정하자고.”

“정정당당?

“대놓고 양보까지는 바라지 않겠지만 최소한의 형평성은 있어야지. 항해과라고 했지. 그럼 항해 시합으로 결판을 내자.”

“항해 시합이라니?”

“그래 무동력선으로 항해 실력을 겨뤄 보자 이거야. 영도 근처에 섬 많잖아. 포적을 한 바퀴 돌아서 돌아오는 걸로. 승부를 보는 게 어때? 그게 페어하지 않겠어?”

강태준의 제안이 의외였는지 웅성거리는 학생들. 어로학과 학생들조차 혼란스러운 모습이다. 그러자 이억기가 어이없다는 듯 비웃었다.

“아니 시정잡배도 아니고, 고작 그딴 걸로 우선권을 정하자고?”

“그게 뭐 어때서? 더없이 합리적인 제안인데. 사실 배 조종이면 항해과 니들이 제일 잘하는 거잖아. 아, 그렇군. 그렇다면 실력에 자신이 없는 건가? 명색이 항해과인데 어부 나부랭이보다 배를 잘 몰 자신이 없다?”

그 말에 발끈한 학생들이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이게 뚫린 입이라고.”

“그럼 선택해. 배를 태울 건지. 아니면 승부에 승복할 것인지. 설마 본인들이 유리한 대결도 피할 만큼 겁쟁이들인가 항해과는?”

강태준의 도발에 안색이 구겨진 항해과 학생들.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난 듯 모두 화난 표정들이다.

강태준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려들었군. 전부’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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