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73화 (73/361)

73화 황금빛 전망

강태준이 안연복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저 없는 동안 조미료 사업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믄요. 사장님께서도 무사히 귀국해서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부산에서 제일가는 음식점을 차려 준다고 않으셨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예전에 부지는 다 봐 뒀으니. 이미 계약도 체결했습니다. 최 목수님께서 지금쯤 터 닦고 있을 겁니다.”

“그게 진짭니까? 허허, 그런 건 미리 말씀해 주시지.”

“원래, 선물은 깜짝쇼가 더 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몸 성히 돌아오셔야겠네요.”

뭔가 떠나려니 못내 뒤가 밟히는 강태준이었다. 하지만, 아직 초사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탓에 출발은 계속 늦어졌다.

“초사는 아직 안 왔나?”

“시내로 나갔다가 그만 일이 생겨서.”

“외출 나간 거야 어쩔 수 없어도 아침에 일찌감치 와야 할 거 아냐?”

출발이 지연되자 짜증을 부리는 양 선장이었다. 좌불안석인 선원들이 부둣가를 서성이는 사이, 반가운 듯 손을 흔드는 손이 있었다.

“태준 씨!”

“아니 유하 씨 여긴 어떻게?”

멀리서 뛰어왔는지 노란색 원피스가 살짝 젖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쉰 그녀가 배시시 흰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아직 출발 안 했네요.”

“복만 씨한테 들었어요. 대양까지 나간다던데. 그렇게 멀리 나갈 거 같으면 진작 말해 줬어야죠.”

“아. 그러니까…….”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듯 더듬대는 강태준에 그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검은색 창에 금장 단추에 금실이 달린 멋들어진 모자였다.

통가죽으로 만든 챙이 마도로스 캡을 닮았다.

“자요. 제 선물이에요.”

“이게 뭡니까?”

“모자죠. 원양어선 타는 선원들이 햇빛 가리개용으로 자주 쓴 다 들었어요. 안감에 양막 주머니를 꿰어 넣었는데 뱃사람들한테는 행운의 부적이라는군요.”

안감을 보니 과연 삐뚤빼뚤하게 바느질 자국이 나 있다. 선원들에게 양막의 경우 익사를 막는 행운의 부적으로 여겨 옷의 안감에 꿰어 입고 다니곤 했다.

뜻밖의 선물에 말문이 막힌 강태준이 아무 말도 못 하자 설유하가 민망한 듯 귀밑을 쓸었다.

“바느질이 좀 서툴러서, 그래도 최대한 튼튼하게 박았으니 풀릴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이렇게 귀한걸.”

“고마우면 몸 성히 돌아와요. 가서 다치지 말고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인 그녀가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마친 강태준이 선박 위로 올라가자 옆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창피한 듯 약간 얼굴을 붉힌 그녀가 손을 흔들자, 강태준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종종걸음으로 떠나는 뒷모습에 은근히 아쉬움을 느끼는 강태준.

뒤에서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에 장난기가 돌았다. 은근슬쩍 어깨동무를 한 염일우가 히히거리며 웃었다.

“능력 좋네. 강 항사. 영 쑥맥인 줄 알았는데. 이거 고수인걸?”

“오해 마십쇼. 그저 아는 사입니다.”

“이 보소. 항해사 양반. 누굴 옹이눈으로 아나. 그러기엔 너무 끈끈해 보이는데.”

“그러게요. 볼수록 참하네.”

“우리 형님이 눈이 좀 높지요.”

궁지에 몰린 강태준이 대응하기 난감해질 즈음, 얼굴이 벌게진 초사가 비척비척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화가 난 양재문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이, 초사? 또 술인가?”

“캡틴! 죄송합니다. 사장님이랑 한잔하는 바람에.”

“아니, 그렇다고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 이거 상습범 아녀? 상습범?”

“죄송합…… 우욱!”

오바이트를 하는 모습에 격하게 인상을 쓰는 양재문.

깜짝 놀란 갑판장이 서둘러 달려왔다.

“자자, 들어가소. 강형. 이거 곯았네 곯았어. 대체 얼마나 처마신 거요. 작작 좀 드시지.”

“미안…… 실례 좀 하…….”

횡설수설하는 폼이 아직도 술에 덜 깬 듯하다. 하는 수 없이 선원들이 양옆에서 그를 부축했지만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

선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지그시 노려보던 양재문이 분하다는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아휴, 저거 완전히 상전 납셨군. 저걸 잡아 족칠 수도 없고.”

“보는 눈이 많습니다. 선장님. 오늘은 좋은 날인데 초 쳐서 되겠습니까?”

“그래. 내가 참아야지. 내가!”

망망대해로 떠나는 마당인 만큼 뒤숭숭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다. 게다가 가족들 앞에서 굳이 뺀지를 주기 뭣했다.

승선한 선원들이 출발 준비를 마칠 즈음 배 밑바닥에서부터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포구의 황혼을 부르는 소리에 사람들의 사선이 집중되자 이윽고 해안의 경비 초소로부터 펑 하고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 것.

유성처럼 길게 솟아오른 신호탄이 긴 꼬리를 끌며 꺼졌다.

“출발!!”

항구는 전투를 위해 출항 준비를 마친 항모 전단이 출발하듯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다. 어선 통제소에서 랜턴을 휘두르자 수백 척의 어선들이 포구 밖을 향해 전진했다.

수탉이 아침을 알리듯 기관 소리가 부산항을 깨우고, 등대에서 비춘 탐조등이 배를 훑듯이 비추었다. 번쩍이는 등대는 능선 위 초소를 내리비추었고 다른 하나는 수평선과 같은 각도로 비추었다.

잔잔한 해면 위에 빛의 길이 생기자, 둥둥 뜬 발동선들이 퉁퉁거리며 달려 나갔다.

오징어 배들은 제 몸뚱이만 한 그물을 짊어진 채, 휘황한 밝기의 카바이트 등을 매달고 있었다.

선두에 선 지평호가 뱃고동 소리를 내며 수면을 갈랐다. 얼마쯤 갔을까, 뒤를 돌아보자 아직까지도 가족들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항구가 거의 보일락말락 할 무렵, 마침 저 멀리 춘삼이와 광필이가 함께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멀리 부둣가에 선 복만이가 빼액 하고 소리를 질렀다.

“형님, 돌아올 때 꼭 내 선물 사 갖고와예!!”

“그래. 문딩아, 니것만 빼고 사 오마!”

그렇게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이 되는 지평호는 6월 29일, 구름 같은 환송객들의 배웅을 받으며 역사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부산을 출항한 지평호는 순조로이 대마도 북단을 지나 다음 날 아침 일찍 시모노세키항에 입항했다.

초사 김정욱이 정신을 차린 듯 감탄사를 토했다.

“이거 규모가 정말 엄청나군. 부산항의 몇 배는 되겠어.”

“예전부터 어판장으로 유명한 곳이니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요. 일단 점검부터 서두릅시다.”

난생처음 시모노세키를 방문하는 선원들은 벌린 입을 감추지 못했다. 기타쿠슈 공업 지대의 수십 개 공장 굴뚝에서 일제히 검은 먹구름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질로 장관이었다.

현해탄을 반으로 나눠 버린 평화선 덕분인지 다소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시모노세키는 원양으로 출어하는 배들의 전진 기지다. 항구에 입안을 마친 지평호는 열흘간 어로와 엔진을 최종적으로 점검한 다음 부식과 식수, 연료, 얼음 등을 보충하고 타이완의 가오슝항에 돛을 올렸다.

항구를 떠난 배는 8.5 노트의 속력으로 달렸다. 도착지까지 항해하는 동안, 주낙을 손질하며 어획고를 점치던 선원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꿈을 늘어놓았다. 갑판장인 염일우도 그중 하나였다.

“이번에 튜나 왕창 잡으면 돌아가서 집 사야지.”

“아니, 아재요. 출항 한 번에 무슨 놈의 집을 사요?”

“무슨 소리. 니들 이번에 계약 조건 안 읽었냐? 이번 항해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라. 보합금에 최저 톤수 제한이 없다고.”

“그게 뭐 대수라고 어차피 많이 잡으면 많이 받는 게 당연한 거 아니요?”

“이런 무식한 놈. 보합제가 뭔지도 몰라? 보합제는 총 어획고에서 모든 경비를 제외한 순 이익금을 선원 대 선원이 일정 비율로 나누는 거야. 선주랑 우리랑 반띵한다 이거지.”

헷또인 윤기진이 물었다.

“그래서 변죽 때리지 말고 우리한테 들어오는 돈이 얼만데요.”

“자, 계산해 보자고. 어획고를 100톤 정도로만 잡아도 무려 7만 5천 달러야. 여기서 발생하는 순이익을 3만 달러라고 치자. 그러면 지평호에 승선한 선원들을 머릿수대로만 나눠도 최소 1인당 500~600달러씩 가져간단 말이야.”

“인당 600달러 그게 참말이요?”

“그려. 그게 최소 기준이니 내는 적어도 천 달러는 먹지 않겠어. 그래도 짬이 있으니. 이번에 한몫 잡고 돌아가면 결혼하려고.”

“에이, 형이 무슨 여자가 있소? 만년 솔로인 주제에.”

“임마 내가 구라까는 줄 아나 자 사진 봐라. 내가 거짓말하는가?”

보란 듯이 내민 사진을 돌아가며 확인한 선원들이 오오 소리를 질렀다.

“이야. 참하네. 굼벵이도 기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형님아가 이런 아가씨를 어케 꼬셨수?”

“집안끼리 서로 아는 사이지. 지금껏 딱 세 번 봤지. 이번에 결혼 허락도 받았다.”

다들 갑판장을 다시 보는 것이 모두 충격을 받은 얼굴들이었다.

“진짜루? 이야. 부럽소다. 형님 혹시 제수씨는 없나?”

“임마, 어디서 그 면상으로 들러붙으려고. 택도 없다.”

“에이 형님. 그러지 마시고요. 사돈 남 말 할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뭐. 이 자식들이!”

선원들의 얼굴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연간 160달러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천 달러는 눈 돌아가게 많은 액수.

잘만 하면 조업 한 번에 수백 달러를 벌어들일 이번 출항은 실로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하지만 항해사 입장에서 볼 때, 가오슝항으로 항해는 여러모로 걱정거리가 많았다.

시모노세키에서 체류한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가오슝 기항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던 것. 강태준으로서는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캡틴, 죄송하지만 가오슝으론 왜 가는 겁니까?”

“아, 그거 향후 지평호의 주 어장이 남중국해로 예정되어 있으니 말이지. 어획이 순조롭다면 그쪽 일대도 기지로 활용할 계획이니 미리 쓸 루트부터 탐색해 보자는 걸세.”

강태준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흠. 그건 좀 섣부른 판단 아닙니까? 가오슝을 거치면 일정 중 20일 정도는 족히 날릴 텐데, 너무 일정이 지연되는 감이 있군요.”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일세. 사실 윗선에서는 이번 출어에서 200톤 이상 조업에 성공할 거라 생각하고 있어.”

200톤이라고? 강태준에게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아니, 200톤이라니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데요? 설마 신문에 난 그대로를 목표로 삼는다 이겁니까?”

“일단 15만 달러의 어획고를 달성할 수 있다 큰소리를 빵빵 쳤으니 시도는 해 봐야지. 진짜로 그렇게 잡기만 하면 그럼 단박에 쌓인 부채의 절반은 갚을 수 있지 않겠나? 실제로 모건 기술고문이 말하길 이번 출어는 배를 정부로부터 불하받을 때 지불한 선가의 절반을 하루아침에 뽑아낼 수 있는 노다지라 역설했다고 해.”

하지만 그건 헬리콥터나 보조선 수 대를 갖춘 선망선의 경우에도 쉽지 않은 성과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사고에 오재갑도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그거 신빙성이 있는 겁니까? 애초에 모건 씨는 애초에 남중국해 조업 경험이 전혀 없잖습니까?”

“낸들 아나 일본 조업선들 기준으로 잡은 목표니 우리 배는 그쪽 배들보다 훨씬 장비도 좋고 대형선이니 그 정도는 잡을 거라는 거지. 애초에 상어조업도 잘 하지 않았나?”

요컨대 상어조업 실적이 너무 좋은 바람에 기대치가 높아져 버린 거랄까.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