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서울 진공 작전
그런 혼란에 빠진 장신영을 깨운 것은 제30사단장의 목소리였다.
“각하 명을 내려 주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일단 헌병대 1개 대대를 보내서 인도교부터 막도록. 적의 수도 진입부터 봉쇄한다.”
“그렇다면 중화기를…….”
“중화기는 안 돼! 북괴와 대치하는 마당에 화력 투사라니 내전을 벌인다고 광고할 일 있나?”
“네? 각하 지금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닙니다. 역도들은 일개 민병대가 아니라 훈련받은 정예 병력입니다. 설마 카빈 소총만 가지고 적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일단 시간을 끌게. 이건 내 선에서 처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총리 각하께도 보고를 올려야지 서울지구 방첩부대에 지휘 본부부터 설치하고 결정하지.”
“각하!! 그러면 시간이…….”
“일단 시행해!”
방첩대장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미 반란을 소병력으로 막기에는 한참 늦었다. 쿠데타를 막으라는 건지 아니면 막지 말라는 건지 당최 헷갈리는 명이었던 것이다. 보고를 받은 이한송 장군이 무력 진압을 역설했지만, 일선의 장성들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지금 병력을 투사해야 합니다. 당장 출동 명령을 내려 주십쇼. 어서!”
“아직은 안 돼. 최종 결정권자가 승낙하지 않으면.”
“지금 그걸 기다릴 때입니까. 그럼 장 총리께서는 어디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월권으로 문책당할 것을 두려워한 장성들은 명백한 증거에도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 어이없게도 장석운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닿지 않았고, 머리가 없어진 상층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군을 규합한 쿠데타군은 노량진을 향해 꾸역꾸역 진군하고 있었다.
우우웅~!
적막하게 가라앉은 땅거미 위로 탱크의 궤도 도는 소음이 요란하다.
병력을 실은 장갑차가 한강교를 건널 차례가 되자 모두의 눈빛에 긴장이 어렸다. 여기만 넘어서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셈. 예배실처럼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명이 기묘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신영 측은 상황이 어떤가?”
“아직 미동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와 동조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30사단은?”
“아직 미동 없습니다. 아무래도 사전에 전략이 누설된 듯합니다.”
누설의 진원지는 30예비사단이었다. 거사 참여자 간 알력으로 밀고가 들어가자 제30사단장과 방첩대장이 보고를 올렸다. 그로 인해 병력의 합류가 늦어지면서 병력 차출에 차질을 빚은 것. 병력 합류가 지연되자 사건이 누설되었음을 안 인지한 쿠데타 세력에서도 벌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병력 동원이 지지부진해서야. 이럴 거 같음 차라리 야산이나 도시를 점거하고 협상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오?”
“일단 출동 병력이 있어야 협상이고 나발이고 할 것이 아닌가. 거병 책임자인 이 대령은 어떻게 되었나?”
“야산으로 도피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해서…….”
“한시가 급한데 이렇게 꾸물거리다니. 정신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약속을 했으면 재깍 움직여야 할 일이 아닌가!”
남형욱이 버럭 성질을 부리자 어쩔 줄 몰라 하는 장교들이 변명하기 급급했다. 서로 남 탓을 하며 책임 떠넘기기에 바쁜 동안 냉막하던 박정명의 얼굴 역시 밀랍 인형처럼 창백해졌다. 혁명군의 동선이 그대로 노출된 마당에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잡힌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 아닌가.
박정명이 줄담배를 태우는 사이, 저쪽에서 일단의 병력이 접근 중이다.
혹시 진압군인가? 긴장한 병력이 전투태세를 갖추던 찰나 저쪽에서 불빛이 깜빡이며 신호가 왔다. 깜빡임을 확인한 김한동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다행입니다. 아군입니다!”
“해병대 제1여단 김재근 준장입니다. 장군! 무사하십니까?”
“오, 재근이 자네가 제일 먼저 왔군.”
기꺼움에 목소리 톤이 높아지는 박정명이 살갑게 그를 안았다.
“소식 듣고 바로 내려왔습니다. 최대한 빨리 내려오려고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자네가 와서 천군만마일세.”
박정명은 과하게 반가워했다. 거사가 평소보다 일찍 노출되자 김포의 해병대 병력이 박정명과 합류하기 위해 한강을 타고 남하한 것. 최전방의 1군단을 뺐다는 건 남침을 각오한 무리수가 분명했지만 지금 이 순간의 박정명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우군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초조감을 감추지 못했던 김한동도 용기를 회복했는지 투지를 불태웠다.
“1,500명이 추가되었으니 살짝 부족하긴 해도 전력상 해 볼 만한 전력입니다. 이제 제30군단이 움직이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합니다.”
“좋아. 방송국을 장악하는 즉시로 육군본부를 치고 중앙청까지 순차로 점거한다!”
“예!!”
이제부터는 속전속결. 한강 인도교 앞으로 도착하자 미리 도착한 헌병대가 GMC 트럭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육안상으로는 약 50여 명쯤 되는 병력.
해병대가 진입하자 대기 중이던 헌병대가 우왕좌왕했다.
“반란군이다. 반란군이 왔다!
“전군 정지! 진입하지 마라. 진입하면 쏜다!”
정말 군대가 나타나자 헌병대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확성기를 든 박정명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본인은 2군 부사령관 박정명이다. 지금은 비상 상황. 반공 간첩들이 서울에 침투해 사령관으로부터 예하 출동 명령을 하달받았다.”
“헛소리 마라. 귀하는 지금 반역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들어오면 바로 사살한다.”
이미 단단히 언질을 받은 중대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박정명은 시간을 끌며 배치도를 살펴보았다. 어림잡아 봐도 숫자는 많지 않아 보였다. 박정명이 회유를 위해 돌아보자 김학동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정후 대위는 6군단장의 심복입니다. 결코 항복할 사람이 아닙니다.”
해병대장이 그렇게까지 단언하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박정명은 경고를 무시한 채 왼쪽 손을 올렸다. 진입하라는 명령이었다.
트럭이 대교 안으로 진입하기 무섭게 헌병대 쪽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해 고개를 숙였지만, 박 소장은 아니었다.
“장군 위험합니다!”
“어서, 장군을 보호하라!”
수뇌부의 돌발행동에 대경한 사람들이 서둘러 가드를 펼치려 했지만, 박정명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총탄이 날아옴에도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듯 달려가는 박정명. 빗발치는 총알은 그를 피하기라도 하듯 좌우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걸 보던 소장파들도 용기를 내어 엄호사격을 했다. 정오근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장군! 제 뒤에 서십시오!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박정명은 말없이 권총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제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강철의 차가움.
그렇다. 혁명은 말이 아니라 피로 이루어지는 법.
피가 두부로 쏠리자 머릿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오기 전에 술 한잔을 걸쳐서일까. 알딸딸하게 취한 박정명의 마음속엔 분노와 흥분, 고양감 등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술기운이 머리에 올라오자 두려움이 가신다. 격정에 휩싸인 박정명이 일갈했다.
“전군, 나를 따르라!”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해병대의 총탄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 * *
야심한 밤. 백경출판. 을씨년스러울 만큼 운무가 치솟은 으스스한 별 밤빛에 강태준은 생각했다. 방 과장을 포함한 인쇄인력은 총 대기 상태.
어디선가 귓가로 총성이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에 시계를 살피던 강태준이 명을 내렸다.
“지금쯤에 벌써 시작했겠군. 준비 시작하게.”
“예. 벌써요?”
“그래. 예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일단 종이부터 잘라 놓고, 인쇄할 준비 마치고 있으라고.”
“정말로 쿠데타가 성공할까요?”
“위로 수십 번은 반란 이야기가 올라갔을 텐데 지금까지 액션이 없다는 건 반란을 우습게 봤다는 증거일세. 의도치 않게 허를 찌른 셈이지.”
“그래도 정규군과 비교하면 수에서 너무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의지의 차이도 크지. 한쪽에서는 목숨을 내걸고 결사적으로 싸우는데 다른 쪽은 진압 의지조차 없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나? 박정명이 수도를 장악하면 이 게임은 끝이야.”
“설마 장석운이 그 정도로 무능할까요. 하지만 만약 반란이 조기에 진압이라도 되면.”
“두고 보면 알겠지. 혹 일이 틀어지더라도 우리는 영향받을 이유가 없네. 일이 밀려 야근했다 퉁 치면 그만이지. 어차피 우리랑 그쪽은 직접적인 역학관계도 없지 않나?”
애초에 반란이라는 것은 사전 계획부터가 완벽하기 힘든 만큼 속도전이 핵심. 하지만 박정명이 이제껏 구속되지 않았다면 역사대로 일이 흘러갈 것이고, 그리되면 일단 승기는 저쪽에 넘어갈 확률이 높다고 강태준은 확신했다.
‘장석운이 그 정도 판단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정변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제아무리 유리한 상황이라도 진압 명령을 내려야 할 사람이 수도원에서 기도나 하고 자빠졌다면 답이 없지 않겠나…… 이걸 게임에 대입해 보면 맵핵을 다 켜 놓은 상대가 병력을 움직이지 않아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본진이 털리면 그것으로 끝.
그렇게 인도교 위에서 혈투가 벌어질 무렵, 김필중 일행은 혁명 공약 인쇄를 위해 견지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프가 공장 앞에 급정거하자 미리 대기하던 이억수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지프에서 내린 김필중이 바로 자료를 건넸다.
“이게 혁명 공약 포고문일세, 준비는 끝났나?”
“예. 완벽하게 세팅 완료입니다.”
“그럼 서두르지. 적어도 6시까지는 포고문이 완비돼야 하네.”
“다 들었지? 다들 작업 시작해!”
2인 1조로 짜인 인원이 용지를 잘 편 다음 인쇄 기계 위로 부지런히 옮겼다. 기계가 돌아갈 때마다 인쇄된 용지는 32절지로 절단 작업을 마친 후 몇백 장씩 묶어 용지 박스로 들어갔다……
컨테이너에 접힌 인쇄 용지 박스를 몇 개씩 포장해서 상자에 담고, 담고, 담고, 또 담고……
옵셋 프린터가 움직이자 건물 안은 소음에 귀가 먹먹했다. 이억수의 목청이 커졌다.
“속도가 너무 느려! 시간이 너무 걸리니 흑백으로 찍어!”
천천히 돌아가는 기계에 차지만이 불퉁스레 지적했다.
“이렇게 해 가지고 어느 세월에 끝나겠나?”
“걱정 마십시오. 지금 예열 중이니 곧 최대까지 속도를 올릴 겁니다. 졸업앨범도 수분이면 찍어 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빨리빨리 하게. 이 일은 속도가 생명이야. 자, 얼른 로드 올리게. 어서!”
이억수의 닦달에 인쇄공이 인쇄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
50프로 로드까지 올라가던 인쇄 속도가 버벅거리는 것이 아닌가.
덜커덕거리는 인쇄기에 이억수가 성질을 팍 부렸다.
“어이, 박 기사. 무슨 기계가 이리 굼벵인가?”
“저도 풀로드로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요. 그런데 자꾸 차단기가 떨어지는 바람에…….”
변명을 주절거리는 박 기사에게 열받은 이억수가 짜증을 부렸다.
“뭐야? 이번에 휴즈 교체하지 않았어? 접대 장비 점검 안 했나?”
“예. 철저하게 점검 마쳤습니다만 계속 출력이 떨어지는 게 무슨 다른 문제가 있는 거 같습니다. 적어도 설비 문젠 아닌 거 같은데…….”
“그럼 원인부터 파악해, 이래 갖고 시간 내 제때 뽑겠어? 이따위로 뽑다간 해 뜨겠어!”
헐레벌떡 뛰어갔다 온 이억기가 곧바로 원인을 파악하러 나갔다.
잠시 후 사태를 논의하던 박 기사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전력이 강하되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주위 인쇄공장에서 풀로드로 인쇄를 돌리고 있어 전력 과부하가 걸린 것 같습니다.”
“과부하라니. 니미, 저쪽에서 기계 돌리는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자 계기판을 돌아보던 박 기사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인쇄소 전력은 저희 쪽 배전 라인이랑 같은 전선에서 파생되거든요. 아무래도 이 일대 사용하는 전력이 급격히 늘어나는 바람에 전력 수급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뭐라고?”
이억수로는 황당한 소리였다. 사실 옆 출판사에서는 강태준이 주문한 물량을 맞추기 위해 인근 인쇄소에선 며칠째 풀로드로 돌리고 있었다. 주말 납품 물량을 완료하려면 하루 종일 돌려도 빠듯한데 낮에는 전력 사정이 나빠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다 보니 야간조업으로 인쇄 물량을 상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후좌우로 기계를 돌려대고 있으니 발해 측에서 아무리 출력을 올리려 해도 전력 부족으로 인해 골골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 로드를 최대치로 맞추면 한 시간 내 얼마나 인쇄 가능한가.”
“대략 시간당, 3천 장 내외가 한계입니다.”
보고를 들은 이억수가 재차 이마를 좁혔다.
“그럼 당장 옆 공장에 가서 공장 멈추라고 해.”
“네? 가서 부탁을 하라고요?”
“돈으로 보상하면 될 거 아닌가. 야근 수당 기준으로 하루 일당 2배 보상해 준다고 해. 오늘 밤만 넘기면 되니 어서 서둘러.”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발해출판이 서둘러 회유에 나섰지만, 이억기를 만난 강호 인쇄소 사장은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여보시오. 지금 돈으로 우릴 매수하겠다 이건가? 우리가 그진가? 아님 당신네 하청이야?”
“그게 아니라 편의를 봐달라는…….”
“그건 곤란한데. 우리도 지금 일정 맞추려고 하는 거지 나도 좋다고 야근하는 거 아니야. 애초에 이건 당신네들이 잘못이지. 저녁 9시부터 12시까지 조업 시간만 제대로 지켰어도. 우들이 이렇게 뺑이 칠 이유가 없지 않나.”
맺힌 것이 많은 듯한 표정이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