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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재벌 강태준-121화 (121/361)

121화 과징금 폭탄

빨갱이 전적이 있는 박정명이 사회 개혁이랍시고 재산 몰수 같은 방법을 썼다간 진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자 강태준이 걱정 말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어차피 미국으로서는 당장 국내에 직접 개입할 수 없습니다. 케네디 입장에서는 쿠바 작전의 실패로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을 테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대외분쟁에 있어서 소극적일 수밖에요.”

“그건 낙관론 아닌가. 오히려 이참에 저번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할지도. 게다가 무력만이 수단은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저희도 당근과 채찍을 같이 써야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말인가?”

“예. 일단 부정 축재자들을 불러 과징금을 부과한다 압박을 넣고 회유하시죠. 그걸 빌미로 산업 발전에 필요한 공장이나 기간산업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면 경제 개발에 필요한 기반을 마련하기에 한결 수월해질 겁니다.”

어차피 전액을 회수한다는 건 반발과 시기를 고려할 때 현실성이 떨어지는 만큼 일종의 타협안이었다. 그 말에 박정명이 탐탁잖은 얼굴을 했다.

“허허, 그럼 예산은 어디서 구하고. 투자를 하려면 마중물이 필요할 텐데, 국정운영에 필요한 예산 중 현상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제한 예비비론 정유 공장이나, 제철소 하나 제대로 지을 수 없는 상황일세. 그 정도 재원으로는 도로나 철도 공사는 꿈도 못 꿀 일이야.”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본과 외교관계를 복원하여 배상금을 받아 충당하던지 거액의 해외 차관을 끌어오던지. 지금 상황에서 둘 다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요.”

“외국에서 돈을 구한다고 공짜는 아닐 텐데, 국내에 묵혀 놓은 자금을 동원하는 게 빠르지 않겠나? 예를 들면 화교라던지.”

“각하. 화교들이 부유한 건 맞지만 그놈들도 현물자산이 많을 뿐, 그만한 현찰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의 신용등급을 생각하면 달러화하는 편이 합리적이죠. 게다가 원조로는 현상 유지만 할 뿐, 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박정명은 일부 수긍하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차관 도입을 누가 할 건데? 그러려면 교섭 경력을 가진 베테랑들이 필요하지 않겠나? 국내에는 협상 경험이 있는 관료들이 없어.”

“그렇다면, 기업가를 활용해 보는 것도 고려할 패지요. 애초에 부정 축재를 할 정도면 로비에 상당한 노하우를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부정 축재자를 되려 민간 외교 창구 역할로 활용해라?”

놀라는 박정명에 강태준이 빙그레 웃었다.

“몸에 나쁜 독도 쓰기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 세상 이치지요. 약점을 잡혔으니, 놈들도 필사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마련한 과징금 중에 일정 부분을 농어촌 고리채 정리자금으로 전용하면 국민 생활에도 큰 보탬이 되겠죠. 각하의 국정 지지율을 올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거고요.”

“흠, 다시 생각해 보니 좋은 생각이긴 하군. 그런데 농어촌 고리채는 애초에 탕감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겠나?”

그러나 강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는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습니다. 고리채를 놓는 사람들이 대다수 일반 마을 사람인 경우라서 모두 악덕 업자는 아닙니다. 빚을 아무 이유 없이 탕감해 버리면 사금융이 완전히 마비되어 소액을 빌릴 도리가 없는 영세민들에겐 오히려 역효과가 될 것입니다.”

“그건 생각 못 했군.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농촌 가구들이 자생력을 갖출 때까지 정책적인 지원을 해 줘야지요. 예를 들면 협동 농장이나 조합 같은 것을 설립해서 규모의 경제를 갖출 수 있도록 말이죠. 단순히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보다 정부 소유 자산과 국채를 기반으로 농어촌 안정 기금을 조성해 자금 전용 실태를 관리하는 것이 더 실효성 있습니다.”

강태준이 중점적으로 역설한 것은 금융구조와 기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산 진흥 기금을 편성하고, 근해어업과 원양어업에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말부터 비리의 소지가 큰 신규 선박 발주 대신 중고선 구매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박정명에게는 꽤 신선한 주제였다. 정권을 잡기 했지만, 쿠데타에 참가한 군인들은 대부분 경제정책에 문외한이었는 데다 그나마 쓸 만한 관료들은 죄다 합죽이가 된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경제정책에 대해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할 브레인이 없었던 것이다.

박정명은 강태준의 조언을 깊이 경청하면서 간간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관해서는 재차 설명을 요구하거나, 가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슬며시 다가온 비서관이 귀엣말을 건네자 박정명이 아쉬운 듯 악수를 청했다.

“이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구먼. 자네의 의견을 좀 더 듣고 싶지만 아무래도 회의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군.”

“제 짧은 소견을 진지하게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이참에 나도 느끼는 바가 많았네. 역시 기업인이라 그런지 군인들과는 보는 관점이 다르구먼. 근데 듣자 하니 점점 국가 경영이라는 게 쉬운 것 같지 않네. 이거 어깨가 무겁군.”

“각하의 안목과 능력이라면 충분하고도 남지요. 전임 정부의 실책을 반면교사로 삼아 국가 경영을 잘 이끄실 줄 믿습니다.”

그 말이 마음에 드는지 박정명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거 정론이군. 자네 말투를 보니 꽤 달변가구만. 사업만이 아니라 정치도 잘할 것 같은데. 어떤가, 이번에 공천받아 볼 생각은 없나?”

“아닙니다. 각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살지 갈잎을 먹으면 죽습니다. 저는 관보다는 민간이 더 체질입니다. 제안은 감사하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허허. 그럴 줄 알았네. 혹시 마음이 바뀌면 이야기하게. 자리는 언제든 열려 있으니.”

정중히 인사를 마친 강태준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뒷짐을 진 박정명은 창밖을 한동안 주시했다. 아까의 말을 되씹어 보던 그에게 부관인 정오근이 슬쩍 다가왔다.

“오, 임자 왔구먼.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았나?”

“예. 딱히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김 중령과는 같은 축구 동호회 출신이라 일전부터 면식이 있던 사이가 맞고요.”

“다만?”

“견지동 일대로 대규모 물량을 발주했는데 그 시점이 좀 애매하긴 합니다. 하필 그때 정전이 일어나 버려서.”

“경쟁사 근처에 대규모 물량을 발주했고, 정확히 혁명이 진행되는 시각에 정전이 일어났다라. 아주 공교롭군. 우연이라기엔 운이 좋아.”

“의도적이었을지 모른다 그 말씀이십니까?”

“좀 위화감이 들어서 말일세. 이야기를 나눠 보니 사람이 정말 머리가 좋더군. 그 정도 두뇌라면 정황상 예측하고 행동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그러면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아니야, 되었네. 예측을 했든 아니든 간에 우리 쪽에는 득이 되지 않았나. 속내가 어쨌든 공을 세웠는데 서운하게 대할 수야 없지.”

아무리 똑똑해도 일개 기업인일 뿐. 도전할 자가 아니라면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결심을 마친 박정명이 내선 번호를 꾹 눌렀다.

“예. 각하. 부르셨습니까?”

“지금, 중앙정보부장 들어오라고 해. 긴히 시킬 일이 있으니.”

며칠 후 열린 국가재건 최고 회의의 안건은 부정 축재자 처벌 특례 안이었다. 국회 동의 없이 최고 회의의 결정으로 발표된 특례는 이번에 감사 대상이 된, 총 600여 개의 기업과 리뉴얼된 부정부패자 명단을 포함 800억 600만 환에 달하는 금액을 추징할 것이 국정 최우선 사안으로 내세웠다.

기업들로서는 예측하지 못한 철퇴였지만, 권력자의 명은 지엄했다.

사건을 주도한 중앙정보부는 부패 색출에 열을 올렸다.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인 만큼 인지도와 실적을 올릴 기회임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역 따윈 없다. 문제가 없으면 만들어. 무조건 쓸어 버려라.

수많은 재력가들이 군홧발에 짓밟혔고, 저항이 있으면 어김없이 개머리판이 날아들었다. 이억수의 집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선글라스 부대가 거실까지 들이닥치자 가정부가 놀란 듯 호들갑을 떨었다.

“에구머니나! 이게 다 무슨 일이랍니까?”

“공무집행으로 나왔으니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하시게. 그보다 이 사장 어딨나?”

“그게 밖에 출타 중이십니다요.”

“그래? 잘 됐구먼. 일단 재산 목록 맞는지 확인하고, 회계 장부부터 싹 다 뒤져!”

마구잡이로 집안을 들쑤시는 요원들에도 가정부는 발을 동동 구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저택엔 항상 집안일을 대신 처리할 출판사 직원들이 상주했지만, 서슬 퍼런 공권력들 앞에서는 무력했다.

“와우. 이거 로얄 샬루트인가?”

“이거 보게, 부산에서 이름난 유지라더니 호화판으로 사는구먼.”

집안을 뒤질 때마다 온갖 것들이 다 튀어나왔다. 귀금속은 물론 샤브리 와인과 스카치 위스키 등등. 한국에 보기 힘든 비싼 술들이 즐비했다. 심지어 어떤 경로로 구했는지 모를 마오타이주까지 연도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나전칠기며 고려청자나 청화백자 같은 골동품들의 향연에 수색팀도 혀를 내둘렀다.

“거참, 이 집은 뭐 이렇게 재산이 많아. 얼씨구야. 이건 또 뭐꼬? 금인가?”

“오, 진짜 금궤인 거 같은데요. 이거 대체 몇 냥이야?”

금궤 위에 놓인 금두꺼비가 파리를 집어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마치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다. 신기한 듯 금으로 된 혓바닥을 만지작거리던 직원들을 뒤로하고 버럭 큰 소리가 들렸다.

“어이…… 이게 뭐꼬? 대체 뭔데 집에 외부인을 맘대로 들여?”

“그게 도저히 막을 수가…….”

“이런 밥벌레 같은 시키가 니들 뭐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난장판으로 어지럽혀진 거실에 분기탱천한 이억기가 씩씩거리자 중정 요원들이 성가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 이 자식들은 항상 레파토리가 똑같네. 시발. 식상한데 레파토리 좀 바꿀 수 없나?”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아이구야. 시발, 한 대 치시겠다? 어디 무서워서 살겠습니까.”

심드렁하게 귀를 후벼 파는 중정 요원의 행동에 안방을 뒤지고 있던 사내가 나타나더니 슥 하고 명함을 들이밀었다.

“중앙정보부에서 나왔소다. 업무차 나온 것이니 순순히 협조해 주기 바랍니다.”

“뭐, 중앙정보부라고?”

“그렇습니다. 내가 이쪽 책임자인 채인철 과장입니다.”

신분증을 확인한 이억수는 불안한 듯 뒤룩뒤룩 눈을 굴렸다. 예전에 본 기억으로는 이놈은 백 퍼센트 김필중 라인 아닌가. 그럼 윗선에서 작정하고 털러 나왔다는 건가. 잠시 후 눈에 띄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중정에서 여긴 어쩐 일로?”

“정말 몰라서 묻습니까? 부정 축재를 해 놓고 세금은 안 내니 강제력이라도 써야지. 구린내가 쿰쿰하게 나는데 안 나설 수가 있나?”

“그건 무슨 말도 안 되는 모함을. 어디서 헛소리를 듣고 오신 모양인데 오해입니다. 이건 분명히 착오가!”

“변명은 위쪽에 하시고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할 뿐. 여기 그쪽에서 납부할 금액이요.”

채인철은 더 듣기 싫다는 듯 통고장을 건넸다.

고지서에 적힌 액수를 확인한 이억수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고, 함께 있던 이억기 역시 헛바람을 삼켰다.

“10억, 10억 환?”

“사안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책정한 금액입니다. 그간 밀린 법인세와 세금이 상당하던데, 부끄러운 줄 아셔야지. 사회 지도층 입장에서 무릇 솔선수범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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