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거제 의료원
생사를 도외시한 공격에 녀석의 눈이 불타오른다.
“시팔놈, 뒈져!”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목덜미를 향해 칼을 찌르는 녀석. 희열에 찬 녀석의 공격에 고개를 숙인 강태준이 허리춤을 찔렀다. 파악 피가 흩뿌려지는 순간. 다시금 콱-! 하고 강태준의 옆구리로 박히는 엄석대의 회칼. 급소를 찔렀음을 믿어 의심치 않은 엄석대였으나, 강태준이 손을 턱 하고 잡았다.
“무슨. 몸뚱어리가?”
“크윽. 이거 방검복이거든. 철판을 하나 덧댔지.”
다른 쪽은 방어력이 영 그렇지만 급소만큼은 확실히 보호하는 물건. 고통을 참던 강태준이 이를 드러내며 웃자 당황한 녀석이 멈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강태준이 허벅지에 칼날을 쑤셔 넣자 고통에 몸부림치며 칼을 떨어뜨리는 녀석.
틈을 놓치지 않은 강태준이 뒤로 돌아가며 목을 조른다. 필사적으로 손을 풀기 위해 저항하는 녀석. 팔을 긁으며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강태준은 끝까지 힘을 놓지 않았다.
“개, 이 시부랄…… 것이…….”
숨통이 막힌 눈깔이 돌아가며 핏기가 사라진다. 발버둥도 잠시 잠시 후 산소 부족으로 기절한 녀석이 손을 떨구는 순간. 강태준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까 부하 중 하나가 떨어뜨린 쇠 파이프로 머리통을 내려친다. 치고 또 치고…… 피가 튀겨 개구리처럼 엎어진 녀석이 경련했지만, 강태준은 멈추지 않았다.
“헉. 제기랄…….”
녀석의 얼굴이 형체도 없이 뭉개지고 나자 미동이 사라진다. 쇠 파이프를 집어 던진 강태준이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피가 흥건하진 바닥을 짚고 일어서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온몸을 파고드는 통증에 문득 옆구리를 보아하니 피가 흥건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예상보다 칼이 너무 깊이 들어갔나.‘
방검복만 믿고 너무 나댔는지 옆구리가 아주 찌릿하다. 엄청난 출혈과 고통으로 눈이 가물가물하는 강태준이었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정신을 붙드는 중. 하지만 용을 쓰며 밖으로 나오는 순간 칼을 든 채 서성이는 조직원들이 보였다.
당혹스러워하는 깡패들의 모습에 허탈해진 강태준. 입에서 절로 쌍욕이 흘러나왔다.
“이런 젠장 할.”
“형님은?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설마 이 새끼가 혼자 다 정리한 건가? 형님, 큰 형님 어쨌나?”
잠시 후, 대충 상황을 눈치챈 녀석들의 눈빛에서 살기가 풀풀 풍긴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는 강태준. 주위를 삥 둘러싼 놈들이 공격을 날리려는 찰나. 탕 하는 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꼼짝 마!!”
“무기 내려놔! 안 그러면 쏜다!”
서남현의 우렁찬 외침에 다들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만 녀석들. 눈치 빠른 일부는 곧바로 도주를 택했지만 득달같이 달려온 특공대원들이 길목을 막으며 깡패들을 곧장 제압한다. 진압봉으로 무자비한 매질이 이어지는 동안, 조직원 하나의 턱주가리를 날려 버리는 서 수사관. 사정없는 발길이 이어지는 사이, 특전 부대까지 나타나자, 전의를 상실한 깡패들이 손을 들고 항복했다.
“괜찮으십니까? 강 사장님?”
“살았군…….”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전에 다리가 풀리는 강태준을 서둘러 부축하는 서 수사관. 저 멀리 급하게 달려오는 광필이와 설유하를 보니 안심에 긴장이 풀린다.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늦지 않은 모양. 긴장이 풀리는 순간 눈앞이 가물가물해지며 의식이 끊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항구에서 강태준이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 *
흔들리는 물소리에 귀를 울리는 뱃고동 소리.
짙은 물빛의 꿈속. 어린 시절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가운데,
기억 너머로 다시금 예전의 악몽이 떠오른다.
붉은 화염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기 시작한 배.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하지만 단단히 묶인 밧줄에 결박당한 육체는 말을 듣지 않는다.
짙은 유독성 연기가 다시 피어오르고 화염의 열기에 버티지 못한 강태준이 비명을 지르는 사이 부드럽게 잡아채는 손.
번쩍하고 눈을 뜨는 순간 하얀 천장이 보이고. 옆에는 죽은 듯이 엎드린 설유하가 한 손을 꼭 붙잡고 있다.
강태준의 움직임에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안도의 숨을 쉬는 설유하. 서둘러 동공을 확인한 그녀가 안부를 물었다.
“아, 태준 씨?! 드디어 깼군요. 좀 괜찮아요?”
“괜찮기는. 죽을 듯이 아프지요.”
“정말요?”
그 말에 강태준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까는 빛의 속도로 도망가시더니, 이제 겨우 걱정이 됩니까?”
“이이는 참. 입이 산 걸 보니 꽤 호전되었나 보네요. 흥.”
강태준의 농담에 입을 비쭉대는 설유하. 그러자 시트를 가져오던 광필이가 강태준이 깬 모습을 확인하더니 후다닥 옆으로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야 형님!! 천만다행입니다. 정말 걱정했는데요.”
“넌 여기 왜 있어? 백화점 일이랑 멸치 납품은?”
“실무진 쪽에 맡기고 왔죠. 아니 바로 깬 사람이 지금 그게 문젭니까?”
“근데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나?”
바싹 마른 입술에 목소리가 마른 논두렁처럼 갈라지자, 얼른 물컵을 가져다주는 설유하.
반대로 환자복을 입은 등짝은 땀으로 흠뻑 젖은 것이 꽤 축축하다.
“3일을 내리 혼수상태였습니다. 이제 깨셨으니 지금. 빨리…… 의사를…….”
“아니, 지금은 부르지 마. 그보다 나 좀 부축해 주게.”
강태준이 서둘러 일어나기 위해 손을 드는 순간, 찌르르한 통증이 복부를 훑었다. 폐부를 찢기는 듯한 감각과 함께 옆구리를 엄습하는 고통. 강태준이 인상을 찌푸리자, 김광필이 그를 서둘러 그를 침대에 눕혔다.
“안정 취하고 누워 계십시오. 아직 상처를 봉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심해요. 다행히 콩팥 같은 장기는 피했지만, 출혈량이 많아서 몸조리를 잘해야 한다더군요.”
“여기가 어디지? 근데.”
“장승포 세브란스 병원입니다. 바로 옮기기에는 좀 위중한 상황이라. 일단 응급처치부터 했습니다. 미국에서 파견 오신 외과 의사가 한 분 계셔서 그야말로 천우신조였습니다.”
그 말에 구겨진 경호 차량으로 생각이 미친 강태준이 다급히 물었다.
“최 중사랑 나머지 경호원들은? 그 사람들은 무사한가?”
“만수는 타박상이 심해서 서울 쪽으로 즉시 이송했습니다. 머리가 터지고 뼈가 다 부러지긴 했지만, 의식은 멀쩡해서 생명엔 지장 없습니다. 다만, 경호원 둘은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죽었다고?”
“예…… 시신은 현장에서 수습했습니다. 피떡이 된 게 유가족에게 보여 줄 상태가 도저히 아니라서 영안실로 직행 후, 화장으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뭐 그래도 갑자기 트럭이 덮친 터라 고통 없이 갔을 겁니다.”
씁쓸해하는 광필이의 말에 조용히 묵념하는 사람들. 고개를 돌린 강태준은 실내를 살폈다. 소박한 건물 안은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것이 이곳 거제 의료원은 흥남 철수로 북새통이 된 피난민들의 의료를 책임졌던 곳이다. 강태준이 설유하에게 다시 물었다.
“엑스레이도 찍을 수 없는 곳에서 수술은 어떻게 했습니까?”
“동란 때, 야전군 사령부에서 사용하던 진단검사기가 남았는데 아직 작동하더라고요. 모자라는 피는 춘삼이랑 광필 씨가 같은 O형이라 다행히 수혈할 수 있었어요.”
“고맙군요. 양재문 전무님한테는 연락했나요?”
“춘삼이를 보냈으니 지금쯤 서울행 열차를 탔을 거예요. 이미 전보를 부쳤어요.”
“아니, 그러면 늦는데 지금이라도 빨리 지금 가 봐야 합니다.”
강태준이 얼른 일어나려 하자 김광필이 침착하게 그를 제지했다.
“형님 진정하십시오. 일단은 형님 몸부터 추스르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무리하다 상처가 터지면 그 뒤는 장담 못 합니다. 양 전무님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지금은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흠…… 하지만.”
그 말에 호응하듯 저편에서 서투른 한국말이 들려왔다.
“미스터 김의 말이 맞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지금 움직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푸른 눈의 의사 등장에 강태준이 고개를 숙이자,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의사. 설유하가 서둘러 부연 설명을 했다.
“아, 이분이 수술을 집도한 의사 선생님이세요.”
“집도의인 킷 갑슨입니다. 위험한 순간은 넘겼습니다만 아직 안심하실 단계는 아닙니다. 혹 패혈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니 최소 며칠은 병실에 머무르셔야 합니다.”
“예, 무엇보다 몸조리가 우선입니다. 형님. 새로운 정보는 바로 춘삼이 통해 갈 수 있도록 일러두겠습니다.”
세 명이 계속 만류하자 제아무리 고집 센 강태준으로서도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졸지에 감금 생활을 하게 된. 강태준
활동적인 강태준으로서는 답답한 일.
하지만 집도의인 갑슨이 말동무가 되어 준 덕일까. 회복실에 있는 동안 다소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다.
그렇게 서로 말을 나누다 보니 이 푸른 눈의 의사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 대체 무슨 일로 대양을 건너 지구 반대편까지 오게 된 것인지. 갑슨에게 개인적인 궁금증이 생긴 강태준이었다.
“근데 선생님께선 미군 출신도 아니신데, 어째 한국어를 엄청나게 잘하시네요.”
“존스홉킨스대에 있을 때 담당 환자 중에 한국전쟁 참전용사분이 하나 있었거든요. 그분께 배웠지요.”
“오. 그런 인연이. 근데 존스홉킨스대라면 의대에서도 명문 아닙니까. 그렇게 대단한 분이 이런 변방에는 왜?”
“뭐. 일종의 봉사활동이죠. 의대 생활을 하는 동안 교단으로부터 학비부터 거주지까지 지원을 좀 많이 받았거든요. 마침 제가 소속된 기독교 교단이 WHO (세계보건기구) 소속 미주지역협회 정회원 자격이라. 마침 저 스스로 보람된 일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죠. 그러다 우연히 제 전공의 교수님소개로 낙후된 섬 지역으로 의료인력 파견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참에 지원 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안식년이었거든요.”
“참 의미 있는 일을 하시는군요. 존경스럽습니다.”
“하하. 민망스럽습니다. 사실 이렇게 땜빵용이 아니라 의료의 질을 개선하려면 본질적인 해결이 필요한데 말이죠. 사실 휴전 이후, 인구 12만 명의 거제군에 양의라고는 장승포읍에 고작 1명이니까요. 좀 심각한 수준이죠.”
“그렇긴 하지요. 궁여지책으로 한지의사까지 두는 마당이니, 참. 기가 찰 노릇이긴 하지요.”
한지의사란 의료인이 부족한 일정 지역에 의사가 아니지만, 의료 지식이 있는 사람에 대해 의료행위가 허가하는 행위를 말한다. 다시 말해 하도 의사가 없으니 돌팔이를 의료인으로 국가가 공인해 영업을 허락한다는 뜻. 그 말에 갑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때문에 세계보건기구와 공동사업을 위한 보건 프로젝트(K-25)를 진행하기 위해 예비 실사를 진행하고는 있습니다만 통과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보건사업도 가시적인 효과를 주는 곳이 먼저거든요.”
“아, 그런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습니다.”
그 말에 갑슨이 씁쓸하게 웃었다.
“모르실 수밖에 없습니다. 말만 무성하지, 실제로 진척된 사항은 없으니, 추후 병원설립 및 유지비용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인프라가 갖춰진 쪽을 우선시하는 수밖에요. 덕분에 이곳 거제 지역은 병원설립에 큰 난항을 겪고 있지요.”
“흠. 병실이 문제라면 기존에 군부대가 쓰던 병실을 개량해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시군 쪽이랑 협의가 잘 안 되는 이유가 그전에 사기꾼에 몇 번 데인 일이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덕분에 땅 투기를 하는 게 아닌가 색안경부터 끼고 보지 뭡니까?”
“그런 일이…….”
“게다가 병실이야 어떻게든 확보할 수 있다 쳐도 추가로 인력 파견을 요청하려면 최소 요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최소 요건이요?”
“네, 아무 베이스도 없이 의료진을 파견할 수는 없으니까요. 자가 발전기는 기본이고, 외래 진료실과 최소 25명 이상 입원시킬 수 있는 병상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 비용이. 게다가 의약품을 보관할 수 있는 프로판가스 냉장고랑 내외과용 부대 장비도 필요하지요.”
“저런. 사람이 좋은 일을 하려고 해도. 결국 그놈의 돈이 말썽이군요.”
“애초에 자본주의 사회니까요. 어쩌겠습니까? 아쉬운 대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요.”
국제기구가 추진하는 대규모 의료 사업이라, 강태준으로서도 절로 관심이 갔다. 이 지역은 강태준 입장에서는 제2의 고향이 아닌가. 그렇게 이런저런 말을 하며 자연스레 의사와 친해진 강태준은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밀착 진료를 하는 이유가 설마 이거였나.’
이쯤 되자 강태준도 왜 이런 고급 인력이 지역 진료에 힘쓰기보다 자기 옆에 붙어 있는지 대충 감이 올 수밖에 없다. 강태준같이 나름 지역 유지라 할 수 있는 사람의 진료를 맡는다는 건 선교사로서는 사업상 필요를 어필할 다시없는 기회였던 것이다.
‘서울이나 부산처럼 대도시를 놔두고 오지인 거제군에 병원을 세운다는 건 경제적인 서포트 없이는 불가한 일이지.’
차후 거제를 장기 투자처로 생각하는 강태준의 입장에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일.
강태준이 속으로 주판알을 굴리는 사이, 춘삼이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 벌써 알아보았나?”
“예. 서울에서도 한바탕 습격이 있었다는군요. 덕분에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한발 늦었군. 양 전무님은? 무사하신가?”
“자상 때문에 수원 세브란스로 이송되었다네요. 지금 위중한 상태랍니다.”
“이런, 제기랄…….”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결국 당했는가. 하긴 이 정도 막가파인 놈들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터, 사실 살아 있는 게 용할지도 모른다. 추후 섣부르게 움직였다간 2차로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경거망동을 할 수도 없고. 초조감에 저도 모르게 손톱을 깨무는 강태준에게 불쑥 머릿속을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가만, 지금 놈들은 내가 정신을 차린 지 모르지 않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강태준이 춘삼이에게 되물었다.
“혹 바깥에서 지금 여기 사정을 알고 있나?”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24시간 내내 군경이 경비를 서고 있는데, 드나드는 인원도 이게 고작입니다요.”
“다행이군. 좋아.”
생각을 굳힌 강태준이 킷 갑슨을 향해 물었다.
“선생님, 수원병원 쪽 집도의랑은 혹 친분이 있으십니까?”
“당연하죠. 이쪽 업계는 좁은 동네라. 그쪽과는 꽤 자주 봤거든요. 거기 과장인 양승태 그 사람하고는 같이 자원봉사를 많이 다녔지요.”
“그럼 한 가지, 부탁 좀 합시다. 의사 양반.”
“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