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양재벌 강태준-248화 (248/361)

248화 영화 산업

얼 타는 차대응에 배춘삼이 안경을 건네주었다.

“아니, 정말로 기억 안 나십니까? 어제 입사 원서에 지장까지 찍으셨잖아요.”

안경을 고쳐 쓰는 순간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나는 기억.

벌거벗은 채로 노예 해방을 외치던 일. 광란의 파티를 벌이며 같이 독립선언문이랍시고 동네방네 소리를 지르던 것을 생각하자 낯이 대번에 뜨거워진다.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는 차대응에 춘삼이가 빙그레 웃었다.

“대충 기억나셨으면 뭐 편하게 대하십시오. 형님. 어차피 뭐 한솥밥 먹는 사이에 내외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럼 제 학위는…….”

“그것도 걱정 마십시오. 우리 강 사장님이 해결해 주실 테니까요.”

같은 시간 강태준. 술도 깰 겸, 찬바람을 바람을 쐬고 있었다.

“어 죽겠구먼. 죽겠어.”

새벽까지 술을 퍼마신 후유증일까 아픈 머리를 달래는 강태준.

그때 평소랑 마찬가지로 몹시도 쌩쌩해 보이는 광필이가 다가왔다.

“궁상맞게 여기서 뭐 하십니까?”

“그냥저냥 숨 돌리기지. 술 좀 마셨더니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그러게 운동 좀 하라니까요.”

“그래야겠구만. 니는 근데 왜 그렇게 멀쩡하냐? 두 탕이나 뛰고.”

“저도 모릅니다. 원래도 술이 잘 들어갔는데 근래 술이 더 잘 받는 거 같습니다.”

“거참 부럽네. 말한 건 해결했나?”

“당연하죠. 박 교수 그 자식 처음에는 지 심복 뺏어갔다고 어찌나 땍땍대는지 오리 새끼도 아니고 시끄럽더라고요.”

“그래서?”

“그러긴 뭘 그래. 그 양반 술 약하더만. 대충 양주 이빠이로 퍼 멕인 다음에 살살 달랬습니다. 대충 10만 원쯤 쥐여 주고 취업 승낙해 주는 걸로 끝냈습니다.”

“허 고작 정도로? 그나마 좀 양심이 있구먼. 더 진상 부릴 줄 알았더니.”

“에이 그 이상 뻗대면 칼 맞지요. 그동안 부려 먹은 게 얼만데. 뭐 나중에 프로젝트 몇 개 발주할 때 쏠쏠히 챙겨 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차 조교 학위 심사는?”

“이번 학기 중에 해결해 주기로 했습니다.”

“나중에 한 번 더 기름칠 좀 해. 괜히 나중에 심술 나서 강짜 부리면 서로 피곤해지니.”

“염려 마십시오, 형님, 제가 누굽니까?”

차대응을 영입한 후 공사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졌다. 어떻게든 빨리 자유를 찾고 싶은 차대응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던 것이다.

순환 배치를 끝내고 개보수가 이루어지자 홀가분한 표정이 된 차대응이 뿌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제 석굴암 습기 문젠 한시름 놓겠군요.”

“감격스럽습니다. 50년 만에 드디어…….”

“그러게요. 해냈습니다.”

“고생했어. 차 조교. 아니 차 박사.”

눈 밑이 퀭해진 차대응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문을 잇지 못하자 다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유를 얻은 행복인지, 아니면 성취감에서 오는 감동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차 조교의 공이 가장 컸다는 것이다. 광필이는 큰 깨달음을 얻은 모양인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호오. 역시 공돌이는 갈아 넣으면 뭐라도 되긴 되는군요. 저렇게 부려 먹을 수 있다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니 밑에는 안 둬.”

“아니, 형님. 제가 뭐랬습니까? 매정하게.”

“암튼 근성이 썩어 빠진 녀석들 열보다 저런 녀석 하나 나아. 니도 보고 뭔가 느끼는 것 좀 있어 봐라.”

“아니 왜 나만 갖고 그럽니까?”

석굴암 보수가 완료된 후 대외에 개방되었다. 사학계의 관심도가 큰 사안인 만큼 문화재 관리국과 역사학계에서 재방문이 이어졌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석굴암 복구 성공, 60년 만의 쾌거]

[국보의 눈물. 일제가 망친 문화재를 우리 기술로…….]

사람들은 완벽하진 않지만, 생각보다 잘된 복원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고건축물 복원 기술과의 비교를 하기도 했다.

바닥이 쩍쩍 갈라진 오사카성을 통해 일본의 문화재 복원 실태가 드러나자 국민 자긍심 향상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도 호평이 대다수. 불국사와 석굴암 중건을 마친 뒤, 박 대통령이 직접 참관해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문화재 복원의 정수라며 추켜세워 주기까지 했다.

“형님, 이거 멘트가 아주 죽이네요. 천년을 이어온 석공의 혼. 경주에서 다시 피어오르다.”

“알아서 장작들 불태워 줘서 좋네 그래.”

“덕분에 공조 설비 판매량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에어컨 규제가 풀리자 각지 공장들에서 불티나게 의뢰가 밀려들었다. 그간 에어컨 도입을 사치품이란 명목으로 규제한 덕에 남몰래 속앓이를 해 왔던 산업계에서도 크게 반기는 기색이었다. 공조설비가 가장 필요한 섬유공장과 가전업계부터 적극적으로 에어컨 도입을 검토하고 나선 것이다.

“이 정도 성과면 산니 쪽도 할 말 없을 겁니다.”

“그러게. 더 늦으면 산니 말고 다른데 연락해 보자고. 굳이 TV 브라운관 정도 만드는데 산니만 고집할 필요가 있겠나?”

“그러게요. 짝사랑은 여러모로 힘든 법입니다.”

강태준 쪽에서는 빨리 마음을 접기로 한 그때 산니에서 연락이 왔다.

“산니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트리나트론 부품 제조 라이센스 기술 이전에 대해 오케이했다는군요.”

“오 드디어!”

백경전자의 매출이 급상승하자 뒤에서 장고하던 산니가 드디어 강태준과 협력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백경에서 축포를 터트리던 시각.

월남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 * *

정글이 우거진 월남의 어느 한 지역.

총포가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검은 위장 색을 바른 남자가 급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가 가서 고지를 사수하겠습니다.”

“위험하네. 정 중위!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이래도 죽나 저래도 죽나 같습니다. 해병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 요충지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포격 지원을 해 주십시오!”

“정 중위!”

상관이 극구 말렸지만 결국 앞장서는 정 중위. 방서모를 쓴 월맹군이 개미 떼처럼 모여드는 가운데, 사방으로 떨어지는 포탄들.

위험을 무릅쓴 정 중위가 진지 위로 기어 올라가는 사이 어디선가 총성이 물렸다.

뒤를 엄호하던 김 중사가 총에 맞은 것이다.

“김 중사!”

“전 틀렸습니다. 절 버리고 가십쇼.”

따라오던 부하들이 적군의 공세에 맞서 시간벌기를 했다.

수류탄을 던지며 장렬하게 산화하는 부하들에 이를 악무는 정 중위.

쓰러진 사수를 옆으로 밀고 조준점을 잡은 정 중위가 월맹군을 향해 기관총을 쏘아 갈겼다.

“투타타타타타!!”

빗발치는 총탄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병사들.

그 모습을 본 정 중위가 포효하자 한국군에서 함성이 터졌다.

감독이 서둘러 사인을 보냈다.

“컷컷!!!”

분노의 포효를 하다 말고 곧바로 순한 양처럼 돌아온 사람들.

“어…… 벌써 끝입니까?”

“지금 감정 신 아주 좋았습니다. 잘 건졌어요. 일단 다음 촬영은…….”

주연인 정 중위가 감독에게 불려간 가운데, 조연을 맡은 방첩 대원들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힘들다. 이 짓도 실전보다 힘드네.”

“그러게. 이거 진이 빠지는구만.”

이번 작품은 국립영화 제작소 의뢰한 영화 [짜빈동] 촬영 현장이었다. 해병대의 신화를 재현하는 영화제작에 방첩대원들 역시 한 자리 단역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앉아서 음료를 건네받은 대원들은 서로들 아까의 작품에 대해 품평하기 바빴다.

“임마. 기서 인상 팍 쓰고 그게 뭐야. 좀 죽는 척이라도 해야지. 필름 끊기게.”

“아따 형이 해 보소. 카메라 보면 그게 어색해서 말처럼 안 된다니까. ”

“그러게. 괜히 할 일 없으니까 여기 와서 훈장질이야. 꼬우면 지가 찍던지.”

그에 발끈한 광필이가 버럭 했다.

“뭬야? 이 시키들이 진짜. 사람 좋은 말로 하면 알아들어야지. 그리고 대사가 그게 뭐냐. 국어책 읽기냐?”

“어차피 후시 녹음하니까 상관없잖아유 실탄 날라가고 폭탄 터지는데 그거 신경 쓸 경황이 있나.”

“그려, 감독님도 가만있는 마당에 형이 나서서 꼽 주니까 좀 그렇소. 그래.”

“아니 감독님, 말 좀 해 보십쇼. 자꾸 잘했다 잘했다 하니 이 시키들이 지가 잘한 줄 안다니까. 매번 다시 찍는 이유도 모르나.”

“하하…….”

“쓸데없이 감독님 괴롭히지 말고. 니는 좀 짜져 있어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감독이 난처해하는 사이, 나타난 강태준.

등짐에 산더미만 한 간식을 들고 온 인부들에 모두들 환호를 질렀다.

“오오. 역시 사장님밖에 없습니다.”

“자자 간식이라도 먹으면서 해요. 글고 광필이 저놈 말은 무시하세요. 지 영화 출연 못 했다고 승질내는 거니.”

“아니, 형님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됩니까?”

“뭐가 되긴 질투의 화신이지. 니 요새 딱 하는 짓 보면 태생이 고문관이여.”

그 말에 다들 왁자하게 웃자 뻘쭘한 광필이가 투덜거렸다.

“아놔, 내가 그렇게 쫌생이인 줄 아쇼. 이게 다 잘되라고 하는 거지.”

“임마. 니가 감독이야? 그보다 야 수상하다. 닌 맨날 바쁘다면서 자꾸 여기 오는데?”

할 말 없어진 광필이가 우물거리는 사이, 저쪽에서 불쑥 응우옌의 목소리가 들렸다.

“광필 씨? 거기 있어요?”

“네네. 대위님!”

“저 이쪽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식사 준비 중인데 이게 좀 많이 무거워서.”

“네네 갑니다 가요!”

말투까지 살갑게 변한 광필이가 서둘러 응우옌에게 달려갔다. 미묘하기 짝없는 핑크빛 무드에 대원들이 띠껍다는 얼굴을 했다.

“아놔. 입맛 떨어지게 광필 형, 저거. 내가 생각하는 거 맞지?”

“이런 개 같은. 커플은 다 뒤져야 함.”

분노한 대원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솔로의 분노를 몸소 실천하는 방첩 대원들에 강태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런 못난이들 같으니라고, 노오력을 할 것이지.”

“저런 것들 데리고 영화라니, 감독님도 고생 많으십니다.”

“하하. 아닙니다. 다들 순수하고 되게 열심히신데요. 저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죠.”

“추가로 부족한 점은 없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이 정도로 지원을 해 주시는데 못 찍으면 죽어야죠. 더욱이 국방부에서 대놓고 밀어주는 홍보 영화 아닙니까?”

“하하. 대통령께서도 관심을 두고 있기는 하지요.”

“우리 강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시작도 할 수 없었던 일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모든 장비가 진짜라니 전쟁 영화를 이렇게 리얼하게 찍을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제 얼굴에 금칠하시는군요.”

사실 그 점에 대해선 나름 뿌듯하게 생각하는 강태준이었다. 사실 이번 영화에 이렇게까지 지원하게 된 데에는 강태준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 영화를 찍게 된 계기 자체가 강태준이 보낸 편지 한 장 때문이었던 것이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불철주야 국가를 위해 헌신하시느라 실로 어려움이 많으십니다.

월남 파병 장병들이 각지에서 고투하고 있는 와중, 북한에서는 대남 적화 통일을 위해 호시탐탐 분열을 노리고 있습니다. 냉전이 격화되는 현시점에서 월남 파병 장병들의 희생을 되새기고 짜빈동의 영웅적 업적을 기리고자, 혁명 정신과 국민 애국심 고취를 위해 영화제작을 하고자 합니다.

강태준은 장문의 편지를 통해 영화제작의 당위성을 호소했고 이를 읽은 박정명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국군 사기 진작과 애국심 고취라는 대국적 명제 앞에 마음이 동한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