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밥차 배송
강태준이 밥을 먹지 않으면 운전기사나 비서들까지 다들 쫄쫄 굶어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싸 준 것이지만, 수행원은 사실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이야, 오늘도 진수성찬이군요. 오늘은 바다가 컨셉인가?”
“이래서 내가 안 선생을 좋아해. 역시 내 취향은 역시 안 선생이 제대로 안다니까.”
제철 음식들이 가득한 도시락 안은 오세치처럼 화려한 색깔들로 포장되어 있었다. 가짓수도 푸짐하고 정성 들여 포장된 음식들을 본 비서진들은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운을 차렸다.
“크으. 요 청어 알이 죽입니다. 씹을수록 고소하네요. 알이 입에서 터지는 게 그냥 예술입니다, 예술.”
“그래. 이 다시마말이도 끝내줍니다. 그래.”
“요새 용화루 실력이 갈수록 느는 것 같습니다요. 양도 적당하고 맛깔나요. 살이 막 찌는 것 같다니까요.”
“그러게. 요새 실력이 더 늘었어.”
하도 오래 밥을 싸다 보니, 안연복의 도시락 제조 실력은 그야말로 장인의 경지에 도달했다. 영양 밸런스를 살리면서도 잔반이 없을 만큼의 양만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매번 질리지 않게 메뉴를 만들어 내는 수준까지 도달했으니, 그간의 노고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려면 시행착오가 많았을 텐데. 고맙구먼.”
“그러게요. 밥도 제때 못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따뜻한 밥이 배송이 된다면 참 좋을 거 같은데.”
그 말에, 뚝딱 식사를 끝낸 강태준은 물끄러미 깨끗이 빈 도시락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제철 음식을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제공한다는 생각을 지금까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식품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도 그렇고, 직원들 복지에도 꽤 좋은 생각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강태준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 볼까?”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밥차 배송 말이지. 이참에 권역별로 나누어서 배송 시스템을 구축해 보는 거지. 일단 시범적으로 서울권부터 도입해 보면 어떨까 싶은데?”
전국 용화루 지점과 식품 공장 인프라를 활용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아직 개별 도시락 배송까지는 어렵겠지만, 그 정도야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이 든 것이다.
“흠. 그럼 메뉴 선정은요?”
“그간 우리가 먹던 메뉴들을 취합해서 인기 있는 것 위주로만 선정해도 몇 달 치 분량은 나오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배 실장?”
“밥차 배송이라. 괜찮긴 한데 그렇게 전격적으로 운용을 하려면 직원 수요로는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강태준이 이번에 새로 영입한 비서진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최 부장 의견은 어떻습니까?”
“전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에 출근하면서 식사를 못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사무실 일대에도 꽤 수요가 있을 겁니다. 직원 식당이 있는 곳은 상관없지만, 바쁘게 다니는 경우에는 제때 챙겨 먹기도 어려우니까요.”
“내 생각도 같습니다.”
급속하게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식량 사정도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먹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대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안연복은 약간 걱정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취지는 참 좋지만 지금 용화루 일에 밥차 일까지 하면 운용이 제대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위생이나 청결 문제도 그렇고, 추가 인력도 많이 뽑아야 할 것 같은데요.”
“아이구, 설마 제가 막 일을 키울까 그러십니까. 부담 갖지 마십시오. 기계화 시스템을 구축하면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하진 않을 겁니다. 관리인도 새로 뽑을 거고요.”
그러자 안연복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게 더 부담된다는 말씀입니다. 회장님.”
“처음부터 수익을 낼 필요는 없으니, 시범적으로만 운용해 보자고요. 일단 감당 가능한 범위 내에서 차근차근 범위를 늘려 보자는 거지 무리하자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일단 수요 조사부터 하고, 지역 토착형 접근 방식으로 접근해 봅시다.”
일단은 운용부터 해 보고 수요에 맞춰 공장화를 검토해 보겠다는 말에 안연복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일이 많이 늘어날까 골치가 아팠는데, 듣고 보니 그렇게 못 할 일도 아니겠다 싶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음식 종류는 어떻게 할까요?”
“그거야 안 선생이 더 잘 알 테니, 구성은 그쪽에 맡기겠습니다. 대신 1일 1메뉴 원칙으로 가자고요. 점심 한 끼 정도만 운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단일 메뉴로 대량 제조를 해야 수요 변동에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식단을 통일하고 대량 식자재를 납품받으면 단가가 낮아지니, 같은 가격이라도 양질의 제품으로 승부할 수 있다. 일단 용화루에서 취사병 경력이 있거나 요리 경력이 최소 3년 이상 된 사람들 위주로 선발되었다.
물론 꼭두새벽부터 출근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최대한 지원자를 받았지만 아침에 출근하게 된 사람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곤 했다.
“아우, 졸려라. 새벽 2시 출근이라니. 내가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일찍 일어나 본 적이 없지 그래.”
“그래두 돈을 배로 주잖아. 인마. 그럴 거면 일찍 좀 자지 그랬어?”
그러자 핀잔을 들은 직원이 입을 비죽였다.
“거 참, 엄마처럼 잔소리 좀 하지 마, 빨리 청소부터 하자고. 오늘 배송된 물건은 뭔가?”
“고등어라네, 이번에 인천 앞바다에서 한 번에 30톤이나 잡혔다는군.”
“많이도 잡았구먼. 그러면 오늘 메뉴는 자반 고등어 조림인가?”
아침에 출근한 인원들은 꼭두새벽에 현지에서 갓 배송된 식자재 품질 검사를 하여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고, 4시쯤 다시 취반 담당 직원들이 출근해 밥을 지었다.
취반기를 쓰면 쌀 씻기부터 밥을 지어 뜸 들이기까지 원큐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우 편리하다. 거기다 배식기는 따뜻한 밥을 바로 식판에 담는 기계로, 현재 국내에서는 아무도 쓰는 곳이 없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물론 최신 조리 기구를 얻게 된 안연복은 매우 기뻐했다.
“장비가 아주 호화롭군요. 호텔도 아닌 곳에서 이런 물건을 쓸 수 있다니.”
“시간이 곧 돈이니,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을 최소화해야지요. 원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위생 아니겠습니까?”
“하하. 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강태준은 과감하게 대형 세척기는 물론 냉동고와 냉장고까지 최신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자르기, 튀기기, 굽기에 동원할 장비도 전부 공구했다. 물론 만만한 가격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기계들이 거의 없다 보니 대부분 외산으로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설비 개선에 상당한 금액이 들었지만 강태준으로서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강태준은 새로 직원들을 뽑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일단 일을 시켜 본 다음, 숙련도에 따라 직원들을 나누어 배치한 것이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마련한 급식 시스템은 상당한 괜찮은 호응을 얻었다.
일단 무엇보다 맛이 좋고, 품질이 괜찮았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집밥보다 낫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유는 절반 이상으로 높은 원가율과 신선한 식자재에 있었다.
그것은 강태준의 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내 가족을 먹인다는 마음으로 최고의 한 끼를 제공한다.’
다른 건 몰라도 밥을 제대로 못 먹는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다. 그래서 밥차에 쓰는 재료는 그날 공수한 것을 원칙으로 했다.
사실 양질의 식자재를 제공하는 데는 경제적인 계산도 없지 않았다. 어차피 원가율을 낮춰 수익을 내봤자 대부분 세금으로 나가니 차라리 직원들이나 사회에 환원하는 편이 생색을 내는 일이었던 것이다. 식품업체를 오래 운영해 온 백경에서는 장기 냉동 보관이 가능한 창고가 많았고, 대부분의 원자재를 현지에서 직접 조달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강태준은 직원들 중 외근을 나가는 사람들은 별도로 도시락을 신청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외근 직원들에게는 별도의 특별식이 추가되었는데, 어지간한 바깥 음식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에 오히려 외근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 * *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춘천지구.
공장지대에 배송을 끝낸 직원들 앞에 작업복을 입은 최 사장이 도착했다.
“이걸로 오늘 배송은 끝입니다.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식사부터 합시다. 거기 직원분도 같이 가시죠. 아직 식사도 안 하셨을 텐데.”
시간대가 점심시간이니 같이 밥이나 먹자는 배려였다. 평소라면 당연하게 따라갔을 테지만, 배차를 맡은 직원은 별 고민도 없이 거절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괜찮습니다. 회사에서 도시락을 준비해 줘서요.”
“도시락이요?”
”저희 회사에서 외근직이나 배차를 맡은 직원들은 미리 수요를 조사해서 도시락을 싸 주거든요. 그리고 거래처에서 비싼 걸 얻어먹었다간 회장님한테 혼납니다. 요새 하도 구설수가 많아서.”
“호오. 뭘 그런 걸. 근데 그거 신기하네요. 회사에서 싸 주는 도시락이라니. 맛은 어떻습니까?”
“아주 맛있습니다. 솔직히 이만한 한 끼가 없어요.”
“호오, 혹시 볼 수 있습니까?”
얼마나 맛있길래 같이 가자는 말도 거절하는지 궁금증이 일었던 것이다.
그렇게 식단을 본 사장은 말문이 막혔다. 무려 12찬으로 된 도시락이었던 것이다.
도시락통 안에는 송이버섯을 넣은 잡곡밥에, 어묵으로 만든 고로케, 계란을 씌운 햄, 돼지고기볶음, 채 썬 양배추와 연두부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에 자랑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이것보다는 약소합니다. 명절이 곧이라서 솜씨를 부렸다네요.”
“그래두, 그거참 맛있어 보입니다.”
“네. 저도 요새 이거 먹는 재미로 살지요. 이거 때문에 외근을 자청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니까요.”
표정들을 보니 다들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역력했다. 회사에 구내식당이 없어 도시락을 싸 오는 것도 일이었던 것이다. 때 되면 주는 대로 뚝딱 먹고 올라오는 것도 괜찮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바깥에서 먹는 것도 귀찮고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은근히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 자존심을 굽힌 사장이 앞으로 나서 물었다.
“저, 이 메뉴, 우리도 시킬 수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맛있다는 입소문이 나자, 알음알음 주문량이 늘어났다. 밥차를 운영하게 된 다음에는 밥차 기사들이 회수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그날의 맛이 어떤지, 개선할 점은 무엇인지 물어보기도 했다.
“오늘 밥 어땠어요.”
“튀김이 파삭한 게 끝내줬습니다. 그런데 무짠지가 너무 짠 거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개선하지요. 판촉 영업이 곧 시작이니 외근이 늘어나겠네요.”
“아닙니다. 내일은 회의가 많아서 직원들 대부분이 실내에 있을 겁니다.”
그날의 인기 있는 메뉴를 이야기하면서 세세한 반응들을 수집하니 꽤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배송 시스템 개선은 물론, 재고 관리와 수요 예측에도 도움을 주었다 고객사의 행사나 휴일 정보, 맛에 대한 반응, 희망하는 메뉴 등을 보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었다.
“참. 이게 웃긴 게, 고객의 목소리랑 실제 수요가 일치하지 않네요.”
“인간이란 게 모순적인 거지. 맨날 같은 맛이라 질린다면서 사실 조합을 보면 줄창 그것만 먹는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좀 다르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니.”
“까다로운 사람들이네요. 참. 설문 조사라도 솔직하게 써 주면 어디 덧나나.”
“어쩌겠나. 고객이 왕인데. 짜증 나도 어쩌겠어. 적당히 유추해서 맞춰 줘야지.”
조사 결과, 튀김이나 햄 같은 게 들어간 경우에는 잔반이 거의 없었음에도 오히려 그런 기름기 있는 반찬을 줄여 달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똑같은 조합이라 질린다며 담백한 음식을 넣어 봤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건강식으로 만든 음식이나 향토 음식이 들어가면 오히려 남기는 양이 무척이나 많았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식품 장사를 하는 입장에선 매우 귀중한 데이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사건이 터졌다는 소리가 들렸다.
“미래건설 구내식당에서 식중독이 발생했다고?”
“예. 무려 30명이 넘게 병원으로 실려 갔다네요. 다행히 크게 상한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지만 저번에도 한 번 터진 적이 있잖습니까. 그래서 지금 쉬쉬하는 중입니다.”
날이 평소보다 더운 데다 전날 쓰던 재료가 많이 남아 재활용한 것이 문제였을까, 음식이 상해 단체로 탈이 난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