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불편한 기적
“말조심 하세요.”
처음에는 황당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모욕을 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 듣기에 좀 불편하셨으려나.”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배 대리에게 사과했다.
“아직 적응중이라.”
“······.”
현실 세계에 적응 중이라는 의미였지만.
‘암 투병 1년을 하고, 복직했으니······.’
배 대리는 자기식으로 해석해버렸다.
“그래서······ 굳이 기존 팀으로 복직을 하겠다는 거죠?”
“’굳이’라기보다는 ‘당연히’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니까.”
배 대리는 지혁을 가만히 바라봤다.
보통 직원들은 인사팀에 오면 긴장하기 마련이다.
긴장은커녕 이보다 더 편한 곳은 없다는 자세였으며, 시종일관 표정에 여유가 넘쳤다.
그리고 업무 특성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에, 표정과 태도를 보면 어느정도는 속내를 짐작하곤 하는데.
지혁에게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 남자의 정면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린 놈이 왜 이렇게 반말 섞어서 하는 거야.’
하지만 혼잣말처럼 말을 하니, 대놓고 항의하기도 애매했다.
“팀 변경을 하는 게 인사 고과에도 더 좋을 겁니다. 제가 배정을 잘해드리면······.”
“어이가 없네요.”
지혁은 눈을 빛내었다.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 거죠? 의사를 말씀드렸는데?”
“······.”
“보통 이렇게 제안을 하는 경우는 뭔가 꾸린 게 있다는 거거든.”
“말조심 하랬죠.”
“아, 미안요. 그러니까 내 의지로 팀 변경을 요청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회유하려 들지 마시고.”
지혁의 쏘는 눈빛에 배 대리는 움찔했다.
“정 원하면 직권으로 하세요. ”
“······.”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지셔야겠지만.”
배 대리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예요?”
“······.”
방 안에 둘밖에 없지만, 배 대리는 주변을 살핀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오지혁씨가 팀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회사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
“왜 굳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냐고요. 월급을 더 주나요? 아니면 인사고과 받기가 더 유리한가요? 절대 아니거든.”
지혁이 잠자코 있자, 배 대리는 자신감을 얻고 더 격정적으로 말했다.
“주변 사람도 생각해야죠. 제가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 제안을 하는 건데.”
지혁은 멈추라는 듯, 가만히 한 손을 올렸다.
“이 조직에 돌아오기로 한 이상.”
“······.”
“받은 건 돌려줘야 해요. 모두가 알도록요.”
지혁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고, 배 대리는 마른 침을 삼켰다.
‘받은 건 돌려준다?’
마치, 우리 안에 맹수와 마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게 기본이거든요. 생존의 기본.”
***
저벅. 저벅. 저벅.
배 대리는 빠른 걸음으로 상품기획실을 찾아갔다.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너 뭐 하는 놈이야?”
“······.”
“똥 싸놓고, 치우는 건 내 몫이야? 어? 보고만 하면 끝이냐고!”
“죄송합니다.”
오전부터 지랄하고 있는 상품기획실 심원석 팀장. 선도물산에서 안하무인에 막말의 대가로 통한다.
팀원 한 명이 공개된 사무실 안에서 잘근잘근 씹히고 있었다.
“넌 이 라운드 티가 팔릴 거로 생각했냐? 고객조사 해봤어? 이 판매율 어쩔 거야?! 어!”
“컨펌받고 진행했는······.”
“그러니까 왜 날 기만했냐고! 이딴 걸 왜 컨펌 받은거야!”
옆에서 잠깐 듣기만 했는데도 배 대리는 숨 막히는 것 같았다.
기다리려 했으나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인사팀 직원으로서 이런 모습은 멈추도록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심 팀장님.”
“뭐야?! 어?”
심 팀장은 배 대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싹 표정이 바뀌었다.
“어이쿠, 배 대리님 오셨어요?”
심 팀장은 인사팀 직원들에게는 직급에 상관없이 친절하다.
인사팀 외에도 ‘갑’이라고 생각되는 부서에는 직급 상관없이 최고의 예우를 갖췄다.
팀원들과 ‘을’ 위치의 부서에는 정반대였고.
“근무 중에 불쑥 죄송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심 팀장은 책상 옆에 조그만 간이 의자를 가리킨 후, 방금 갈구던 직원에게는 가보라고 눈짓을 보냈다.
“어쩐 일로? 뭐 좋은 일 있습니까? 하하.”
심 팀장은 인사팀과 친하게 지내면 콩고물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경영자를 자주 만나는 부서이다 보니.
초승달 눈매로 손을 비비며 기다리는 그에게 배 대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지혁 사원이요.”
“네?”
심 팀장은 잘 기억이 안 나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천장을 바라봤고.
배 대리는 한숨을 쉬었다.
‘겨우 1년 지났고, 팀원이었던 사람인데······ 너무하네.’
“1년 전에 병가휴직 낸 직원 있지 않습니까. 암 투병으로······.”
“음? 아아~~”
심 팀장은 이제 기억이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부고 연락 왔습니까?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어서 잊고 있었네요. 조의금은 당연히 보내야죠. 팀원들에게 소식 전해서 조치하겠습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배 대리는 무거운 목소리 말했다.
“복직한답니다.”
“······.”
심 팀장은 잘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대꾸 없이 가만히 있었다.
“오늘 인사팀에 다녀갔어요.”
심 팀장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걔······ 안 죽었어요?”
“······.”
“병 걸린 애를 어떻게 일 시켜요?”
“완치됐더라고요.”
“네?”
심 팀장은 이 말이 믿기지 않았다.
“췌장암 말기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검사 결과지와 의사 소견서 확인했습니다. 확실히 완치됐어요.”
“허······ 참나. 기적이네?”
심 팀장은 헛웃음을 지으며 지혁의 이름을 되뇌었다.
“오지혁······ 오지혁이라······.”
입사하자마자 상품기획실로 부서 배치받아서, 병가를 내기 전까지 1년 동안 심 팀장 아래서 일했었다.
심 팀장은 팀원들에게 기대하는 업무 기준이 높았고, 경력 여하에 상관없이 본인이 생각하는 수준으로 무조건 해오길 바랐다.
지혁은 열심히는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해 심 팀장의 업무 기준을 충족시키기 어려웠고.
군말 없이 주는 족족 열심히 하는 지혁에게 심 팀장은 계속 과중한 업무를 맡겼다.
업무적으로 마주칠 일이 많다보니 싫은 소리도 많이 들었지만, 오지혁은 항상 밝고 씩씩했다.
심 팀장은 그 모습이 거슬렸다.
심리적 지배를 못 하고 있다는 불만족이······ 오지혁을 대할 때마다 그의 가슴 속에 견고히 자리 잡았다.
“잘······ 된 거네요. 그렇죠?”
심 팀장이 어렵게 꺼낸 말에 배 대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다행입니다. 네, 잘된 일이죠. 근데, 지혁 씨가 기존에 있던 팀으로 복직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쪽으로요?”
“네······.”
심 팀장은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왜 그럴까요?”
배 대리는 잠시 생각했다.
‘받은 걸 갚아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 말 하기는 좀 그렇고.’
“팀 업무가 적성에 맞나 봅니다.”
피식.
심 팀장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얼어 죽을. 일도 못 하는 게.”
“처음부터 잘하는 신입사원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흠!”
인사팀 직원 앞에서 말실수 했다는 생각에 헛기침한 후,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저희 팀은 TO가 다 찼는데.”
“그럼 강제로 다른 팀으로 복직을 시켜야 하는데, 그게 취업 규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 인사팀에서 좀 난감할 수 있겠군요.”
심 팀장은 뭔 말인지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협조해 드려야지. 하하. 며칠만 시간을 주십시오. TO 하나 만들죠. 뭐.”
없던 TO가 생기려면, 사람 한 명 빠지는 수밖에 없다.
배 대리는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네, 필요한 부분 있으면 말씀 주세요.”
***
다음 날 아침.
지혁은 거울 앞에서 옷맵시를 살피고 있었다.
수아가 옆에 다가와 물었다.
“어머님께 연락 드렸어?”
“어, 어젯밤에.”
“많이 놀라셨지?”
“당장 오시겠다는 거, 주말에 뵙겠다고 했어.”
수아는 지혁의 넥타이를 고쳐주며 말했다.
“괜찮으시대? 아들을 자부심으로 생각하시는 분인데.”
“일 때문에 그렇다고 하니까, 알겠다고 하시던데.”
“그렇게 말했다면, 그러셨겠네.”
수아는 지혁의 재킷 안쪽에 연결된 기다란 걸 보았다.
“이게 뭐야? 칼집 아니야?”
“맞아.”
“그게 왜 거기있어?”
수아는 기겁하는 눈으로 바라봤고, 지혁은 피식 웃었다.
“이게 있어야 안심이 돼.”
“······.”
“얘기했잖아. 항상 죽을 위험 속에 살았었다고.”
“아니, 그래도.”
“그냥 내게는 부적 같은 거야. 괜찮아.”
들은 얘기가 있기에,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현실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
지혁은 15센치가 좀 안되는 짧은 칼을 빼어들고 말했다
“그래서 짧은 거로 했잖아. 이 정도 길이로는 쇄골하동맥엔 공격효과가 약하겠지만, 상완동맥, 요골동맥, 경동맥, 심장은 치명상이 가능하거든. ”
"이게 뭔 소리야······."
수아는 식겁한 얼굴이었고,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릴했네. 이상하게 당신 앞에선 말이 많아져."
“흠. 어찌됐든 그거 지니고 다니면 이상하게 볼 것 같은데.”
“다과용 칼이라고 하면 되지.”
“뭐?”
“사과를 너무 좋아해서, 언제든 깎아 먹을 수 있게 들고 다닌다고.”
수아는 이젠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쓸 일 있겠어? 걱정하지 마. 하하.”
지혁이 웃는 건 처음이었는데, 그 소리가 참 섬뜩하게 들렸다.
“나 오늘 명동으로 출근하거든? 좀 늦을 수도 있어.”
“웬 명동? 회사 강남 아니야? 이전했어?”
강남 출퇴근 거리를 생각해서 신림동에 신혼집을 구했었다.
“경력직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래.”
“경력직? 그건 경력 입사하신 분들 대상 아니야?”
“맞아. 오래 쉬었으니까 회사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오라는데.”
“와~ 좋다. 역시 대기업이 달라. 배려가······.”
이 말에 지혁은 피식 웃었다.
“배려? 글쎄······ 내가 보기엔 개수작 부리는 거 같은데.”
“······.”
“근데, 뭐. 월급 받으니까. 다녀올게.”
***
선도그룹 인재원은 전국 각지에 펼쳐져 있다. 서울의 중심지 명동에도 있는데, 정확하게는 남산타워 바로 아래 남산동에 있다.
골목길을 지나 유선형의 현대식 건물에 도착.
“와······ 여기 이런 게 있었어?”
지혁은 좁은 골목길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신식 건물에 놀랐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데스크에서 여직원이 맞아주었다.
“경력직 오리엔테이션에 오신 거 맞으시죠?”
오지혁의 나이는 28세.
오리엔테이션 참가자들의 대부분은 30대 중반을 넘는다.
경력직보다는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에 어울리는 외모다.
“네, 맞습니다. 오지혁이라고 합니다.”
“아······ 오지혁 씨군요. 여기 명찰 받으시고, 강당 안으로 들어가셔서 빈자리 앉으시면 됩니다.”
저벅. 저벅.
지혁은 시간에 딱 맞춰 왔고, 강당 안 자리는 대부분 꽉 차 있었다.
가장 앞자리만 비어있었고,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오리엔테이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21세기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그룹. 선도그룹에 입사하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경력 입사자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사회자를 바라봤다.
[우리 그룹을 대표하여, 입사하신 여러분께 첫 인사를 드릴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원래 예정된 자리는 아니었는데, 잠깐이라도 인사를 드리고 싶으시다며 오셨습니다. 운 좋게도 근처에 미팅이 있으셨다고 하네요. 오늘이 아니면 뵙기 어려울 분입니다. 하하.]
심상치 않은 소개에 장내는 술렁였다.
사회자는 강당 뒤를 향해 크게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오진양 부회장님을 소개합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웅성. 웅성.
-오 회장님의 장남이잖아.
-그룹 이인자.
-실질적인 일인자 아니야? 오 회장님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셨으니까.
-대박이다. 그런 분이 웬일로.
뉴스로만 접했던 선도그룹의 오너를 가장 앞자리에서 봤다.
웨이브 진 앞머리. 이마를 훤히 드러낸 그의 모습에서······.
“씨발, 뭐야.”
오 부회장의 머리 주변에 보이는 익숙한 색깔.
지혁답지않게 당황했다.
짙은 보라색.
그건 분명 에이원 캠프 캡틴이 가진 색이었다.
동료들을 다 죽음에 몰아넣은 그 캡틴의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