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견고한 연대를 위해
지혁은 황 대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뭘 도와야 하냐’는 황 대리의 물음.
일단은 얘기를 들어보려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사람을 제대로 본 것 같아.’
“황 대리님 생산팀이라고 하셨죠?”
“맞아요.”
“저는 상품기획팀입니다.”
“아······.”
상품기획과 생산팀은 이빨과 잇몸 같은 사이. 생산팀은 기획팀이 구상한 제품을 생산한다.
즉, 생산팀에 의해 제품의 퀄리티, 원가, 납품 시기가 결정된다.
“진작 말씀을 하시지~”
황 대리는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지혁의 어깨를 툭 밀치며 웃었다.
“알고 보니 협조 부서에 계셨네. 잘 부탁드립니다. 생산팀인데, 당연히 힘을 보태 드리야죠 하하.”
“······.”
지혁은 여전히 황 대리가 밀친 곳을 바라보다가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업무 협조나 구하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네?”
“황 대리님의 모든 걸 내놓는다는 생각으로 협조해 주셔야 해요. 제 말만 따라주시면, 분명 원하는 성공 이룰 수 있어요.”
‘뭐야······’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하는 지혁이 신기했다. 근데, 홀린 듯 그 말을 잠자코 듣고 있는 자신도 이해가 안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리엔테이션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심지어 지혁은 자신보다 4살이나 어리다.
“아, 그래요. 일단 얘기를 들어봐야죠. 앞으로 뭘 할건데요? 저보고 뭘 도와달라는 건데요?”
지혁은 잠깐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그의 목표는 오진양 부회장이 오너가 못 되게 하는 것이다.
선도그룹에는 22만 명이 있다.
동료들을 몰살 시켰던 에이원 캠프의 캡틴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다시는 그런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한배를 타기로 했으면 최소 80%는 까야지.’
“오 부회장이 오너가 못 되게 할 겁니다.”
꿈뻑. 꿈뻑.
황 대리는 귀를 의심했다.
‘지가 뭔데? 오 회장님이랑 무슨 관계라도 되나?’
일반인과 다른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긴다 싶었는데.
로열패밀리라서 그랬던 건가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성이 같네.’
황 대리는 다시 한번 지혁의 위아래를 살폈다.
‘맞아, 분명 뭔가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미친 소리를 할 리가.’
가만히 지혁을 바라봤다. 어떻게 물어볼까 고민하다가 살짝 입을 열었다.
“오 부회장님과 무슨······ 관계가 있으신가 봐요?”
“관계?”
지혁은 ‘그 세계’에서의 캡틴과 오 부회장에게 보였던 보라색을 떠올렸다.
“관계가 있죠.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관계가.”
“그러니까······ 욕심이 생기신 거죠?”
지혁은 황 대리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런 물음도 그렇고. 갑작스러운 황 대리의 태도 변화가 의아했다.
또한 어찌보면 ‘욕심’이 생긴 게 맞았다. 원래는 세상 끝나는 날까지 편안히 월급만 받으면서 살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고도 할 수 있죠.”
지혁의 대답에 황 대리는 눈빛을 빛냈다.
“왜 욕심이 생기셨어요?”
지혁은 사람들이 별로 없는 빈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리 옮겨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네, 알겠습니다.”
황 대리는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며 생각했다.
'일단은 뭔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대하자.'
***
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곁들여 얘기를 나누었고.
지혁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황 대리가 착각하고 있구나.’
속으로 웃었지만, 굳이 그 오해를 풀고 싶진 않았다.
지혁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이런 오해는 앞으로 계획을 펼쳐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 부회장이 장남으로 태어난 거 말고 뭐 잘난 게 있죠?”
일부러 황 대리의 착각을 도울 말들을 했다. 어차피 거짓말은 아니니까.
“아~ 장남이요?”
“네. 왜 꼭 장남이 오너가 되어야 하냐고요. 능력있고, 의지가 있으면 다른 사람이 오너가 될 수도 있는거지.”
“맞습니다~ 왕세자도 아니고. 좀 그렇긴 해요~”
주변 사람들은 황 대리와 지혁을 이상하게 봤다. 한 눈에 봐도 어려 보이는 지혁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황 대리가 이상해 보였다.
지혁은 황 대리의 이마에서 본 흰색을 떠올리며 웃었다.
‘내가 이래서 흰색을 좋아하지. 참 순수하다니깐.’
황 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자자, 앞으로 제가 열심히 도와드릴 테니까, 쭉쭉 나가세요. 어차피 가장 긴밀한 협조부서에 있기도 하고요.”
“······.”
“이런 게 인연이죠~ 하하.”
“제가 황 대리님을 믿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지금 한 말······ 후회 없으시죠?”
지혁은 싸늘한 시선에 황 대리는 약간 당황했지만.
“하하. 네! 적극 협조할게요~ 자자, 한잔 받으세요.”
“그럼, 약속 하신겁니다.”
확실하게 다짐을 받으려는 지혁의 태도가 의아하긴 했으나, 이내 호기롭게 대답했다.
“네!”
이 대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
첫날 오리엔테이션의 서로 알아가는 시간은 점심시간 넘도록 이어졌다.
시간이 꽤 흐르니, 어색한 분위기도 사라졌고, 경력자들은 이제 삼삼오오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어쩌다 보니, 지혁은 황 대리와 둘이서만 있었는데. 황 대리 혼자 말하고 지혁은 가끔 짤막하게 대답해주는 정도였다.
지혁을 혼자 두고 자리를 옮기기도 뭐하고, 황 대리는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혹시, 미래상사의 황 대리 아닌가?”
스포츠머리의 건장한 남성이 다가왔다.
“엇! 김 과장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
황 대리는 반가움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를 반겼다.
“하하.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에 어쩐 일로 왔겠나? 자네 이번에 입사한 거야?”
“네~ 와~ 이게 웬일이야. 그럼 저랑 입사 동기?!”
“하하! 그렇구먼! 하하!”
김 과장은 지혁에게는 묻지도 않고, 바로 합석 했다.
두 남자는 반가움에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갔는데.
같은 회사 출신은 아니고, 전에 일하면서 알게 된 사이였다.
낯선 분위기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참 반갑다. 신난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대화를 이어가다가.
“근데, 이 친구는 누군가?”
김 과장은 지혁을 향해 대뜸 반말로 물었다. 한 눈으로 봐도 어려 보이니까.
황 대리는 지혁이 로열패밀리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 네. 이분은 상품기획팀에 오지혁 씨인데요.”
“씨? 직급이 없어? 경력이 짧다는 소린데? 어떻게 경력 공채로 온 거야?”
“아, 경력 공채가 아니라요. 음······ 복직자래요. 회사 적응 잘하라는 인사팀 배려로 오신 거 같아요.”
“복직자?”
김 과장은 지혁을 위아래 흩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입사하자마자 육아휴직이라도 다녀온 건가? 하하! 애 잘 보게 생겼네.”
“······.”
“한 잔 따라봐~ 편하게 불러도 되지? 난 올해 마흔이야. 몇 살 먹었어?”
황 대리는 당황하여 땀을 삐질 흘렸으나, 지혁은 시종일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그러고 보니, 나 여기 앉은 뒤로 말이 없네? 불편한가? 아니면 말을 못 하나?”
뻥!
지혁은 숟가락으로 맥주병 뚜껑을 땄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연회장이 다 울릴 정도였고, 사람들이 쳐다봤다.
“28살 먹었어요. 많이 드세요. 아주 많이.”
콸콸.
그리고 김 과장의 잔이 넘칠 정도로 가득 따라주었다.
“응? 어어. 하하. 아주 호탕한 친구네? 으하하!”
김 과장은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만 크게 해서 웃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려고 일부러 크게 웃는 것이었다.
꿀꺽. 꿀꺽.
김 과장은 원샷을 했고. 황 대리가 옆에서 말렸다.
“과장님 이미 좀 드시고 온 거 같은데, 적당히 하시죠.”
“회사에서 마시라잖아. 괜찮아~ 근데, 자네는 왜 이렇게 이 친구 눈치를 보는 거야?”
김 과장의 말에 황 대리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눈치 안 봐요. 왜 눈치를 봅니까.”
“어째 분위기가 꼭 상사 대하는 거 같은데?”
“에이~ 아니에요.”
황 대리는 작게 말했지만, 지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오늘 처음 본 사인데요. 더군다나 저보다 한 참 어리고요.”
“그럼 내일부터 나랑 같이 다니는 거 어때?”
황 대리는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지혁이 있는 앞에서 대답하기는 곤란했다.
“나중에 얘기하시죠.”
‘내 말을 가볍게 생각했나보군.’
조력자를 잘 못 선택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황 대리에게 계획을 공유한 상황. 이젠, 무조건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흠! 그래~”
김 과장은 좀 더 앉아서 대화를 나누다가, 지혁의 눈치를 보며 일어났다.
“술맛 떨어져서 더 못 앉아 있겠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오지혁이라고 했나? 젊은 놈이 응? 좀 웃어라. 웃어. 간다~”
멀어지는 김 과장을 보며, 황 대리가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 과장님이 술 많이 드셨네요.”
“실수가 잦을 분이네.”
“네?”
지혁은 김 과장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분 업무능력 좋은가요?”
“그럼요. 일 잘하시죠.”
“굳이 여기 아니어도, 갈데 많겠죠?”
“네? 뭐 그렇긴 한데. 그건 왜요?”
그의 무례한 행동에 불쾌한 건 아니었다. 누가 면전에서 쌍욕을 퍼부어도 지혁은 눈 하나 깜짝 안 할 사람이니까.
다만······ 확고한 연대를 위해 본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그날 저녁.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은 정확하게 정각 6시에 마쳤다.
[금일 오리엔테이션 일정을 마칩니다. 내일도 9시까지 이곳으로 모여주시면 됩니다.]
황 대리가 말했다.
“지혁 씨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새로운 동료분들하고도 시간 보내는 건 어때요? 전 내일 김 과장님이랑 좀······.”
황 대리는 내일부터 김 과장과 함께 다니고 싶었다.
어쩌다보니 오늘 지혁과 같이 지냈으나.
재미도 없고, 불편하고.
“······.”
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사회자를 보고 있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부 말씀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일어나려던 경력자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고, ‘당부’라는 말에 황 대리도 사회자를 바라봤다.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은 여러분들에게 회사 소개와 더불어 커뮤니티를 위한 자리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해주시면 되지만, 최소한의 정도는 지켜주셔야 합니다. 특히······.]
사회자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성적인 것과 관련된 표현. 상대방이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만한 말과 행동은 조심해 주셔야 합니다. 이건 입사 이후에도 권고사직 대상이 될 수 있거든요.]
“뭐야, 갑자기.”
황 대리는 뭔가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생각에 집중해서 사회자의 말을 들었다.
[금일 한 분이 퇴출 조치 되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오리엔테이션 겨우 3일간 진행하잖아요. 남은 기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기를 당부드립니다.]
황 대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후쯤부터 김 과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분 실수를 하시던데.”
지혁이 말했다.
“실수가 잦은 분은 기분 좋을 때 술 마시는 거 조심해야 돼요.”
“서, 설마······.”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직원 한 분이 그 분 때문에 곤란해 하더라고요. 말려할 것 같다고 생각해서, 제가 인사팀에게 얘기했어요.”
“왜 지혁 씨가······.”
“응당 그래야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지혁은 황 대리를 쏘아보며 말했다.
“제 눈에 거슬리기도 했고요.”
“······.”
“그래도 많이 거슬렸던 건 아니라서, 이 정도로 넘어갔어요.”
봐줬다는 식으로 말하는 지혁의 태도가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 입사 취소가 됐는데, 이 정도라고?'
“아, 참고로 제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배신자입니다. 배신자라면 이 정도로 안 넘어갔을 거에요.”
꿀꺽.
이건 분명 경고였다.
지혁의 눈을 바라봤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네. 이게 사람의 눈빛이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 눈 밖에 나면 안 된다는 걸.
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어떻게 하죠? 내일 김 과장님 못 오시게 되었는데. 그리고 저 낯을 좀 가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