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6화 (6/301)

6. 복직자 (1)

“지혁 씨 식사하러 가시죠.”

“네.”

경력자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

여기 온 사람들 대부분은 처음 만난 사이다. 그래도 식사하고 얘기 나누다 보면 친해질 수 있다.

지혁과 황 대리는 계속 붙어 다녔다.

두 남자는 너무 가까워 보였다. 근데 이상하게 친해 보이진 않았다. 친하진 않고 그냥 가까운 사이.

황 대리는 수행 비서처럼 항상 지혁의 약간 뒤에서 따라다녔고, 지혁은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더군다나 누가 봐도 지혁이 훨씬 나이가 어린데, 둘이 그러고 다니니 자연스럽게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 저 젊은 친구가 뭐라도 되나?

- 왜 저러고 다니는 걸까.

- 경력자도 아니라며.

- 경력자가 아닌 사람이 오리엔테이션엔 왜 왔을까.

그렇게 시선을 빼앗아서, 점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 특별한 게 없어도, 장사 잘되는 집엔 사람들이 몰리는 것처럼 말이다.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 때쯤 되자, 사교성이라고는 눈곱 만큼도 없는 지혁의 주변에 사람이 꽤 많아졌다.

그 사람들은 덩달아 황 대리의 행동을 따라 했다. 황 대리처럼 깍듯하게 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혁이 아무리 어려도 존대하며 조심해 했다.

그리고 가끔 지혁이 말을 하면 모두 집중해서 들었다.

‘확실히 로열패밀리라, 아우라가 달라.’

황 대리는 어느덧 지혁의 주변에 많아진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본인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고, 말이다.

[3일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부터 각자 발령받은 부서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저희 인사팀의 문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까요. 회사 생활하시면서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지혁 씨, 오늘이 마지막인데.”

황 대리의 말에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직 본사 안 가보셨죠?”

“면접 보러 한번 가봤습니다.”

“사무실에는 안 가보셨겠네.”

“네.”

“생산팀은 제가 근무하는 곳과 가까워요. 층도 같아요.”

“그렇군요.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네, 그리고 황 대리님은 저의 담당이 되실 테니까, 더 자주 뵙겠죠.”

상품기획실에서 취급하는 제품에 따라 생산담당자가 정해진다.

즉, 지혁이 담당하는 제품을 황 대리가 취급한다면 곧 지혁의 생산 담당이 되는 것이다.

“아직 사원이시라, 제품군을 담당하진 않으실 텐데.”

보통 대리급 이상부터 제품 담당이 된다. 사원은 제품 담당의 서브 역할을 한다.

“더군다나 전 아우터 담당입니다. 아우터는 고참이 하지 않나요?”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마시고요.”

“아, 네 죄송합니다.”

황 대리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3일간 함께 지내면서 느낀 것이다.

지혁은 자기 말에 의심하는 걸 안 좋아한다. 특히 못 듣고 되물어 보면 정색을 하는데, 그럴 때면 그의 눈에서 시퍼런 불빛이 뚝뚝 떨어졌다.

“저와 담당으로 마주하는 날까지, 황 대리님은 절대 업무 욕심내지 마시고, 조용히 지내세요.”

“······.”

“그쪽 팀장이 아무리 푸시를 해도, 딱 필요한 것만 하는 스탠스. 무슨 말인지 알죠?”

“알겠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을 마칩니다. 모두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고, 웅성거리는 가운데 황 대리가 지혁에게 물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두 남자의 주변에 서성이는 10여 명의 사람.

지혁은 그들을 힐끗 본 뒤, 말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고요. 연락처와 어느 부서에서 일하는지 받아 놓으세요.”

“아, 네.”

“나중에 힘을 보태 달라는 말씀도 꼭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출입구를 향해 걸어갔고. 황 대리가 그를 황급히 불렀다.

“지혁 씨, 그래도 마지막 날인데, 한 잔 안 하십니까?”

“회사에서 뵐게요.”

***

삐비빅-

덜컹.

“어서 와~”

수아가 웃으며 지혁을 맞아주었다.

지혁은 해맑게 웃는 수아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뭐야, 벌써 적응 된 거야?”

“호호.”

집에 돌아온 지 거의 일주일이 되었다.

처음 수아는 지혁과 함께 있는 걸 불편해했었는데, 이젠 그를 향해 웃는다.

떨어져 지낸 시간보다 함께한 시간이 훨씬 길었기에.

그들이 관계를 회복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서로를 그리워했던 사이가 아닌가.

“흠. 흠.”

수아가 가까이 다가와 팔짱을 끼자, 도리어 지혁이 어색해서 헛기침했다.

“너 수줍어하는 거 귀엽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어색해서 그래.”

아무런 저의 없이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가.

‘그 세계’에서는 여자가 이렇게 웃을 때는 다른 뜻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알면서도 넘어가는 게 본능인지라, 지혁은 생존을 위해 일부러 여자를 멀리했었다.

“어서 손 씻고 식탁에 앉아. 밥 다 됐어.”

잠시 후.

김치찌개와 밑반찬으로 소박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았다.

“고기는 잘 안 먹으려고 하길래. 일부러 안 했는데. 삼겹살 구워줘?”

“아니야.”

두 사람은 조용히 밥을 먹었다.

처음 왔을 때보다 지혁의 표정이 좀 풀렸지만, 여전히 말수가 너무 없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수준이었고, 항상 대화는 수아가 이끌어갔다.

“오리엔테이션 끝났다고?”

“어. 오늘이 마지막이었어.”

“그럼 내일부터 바로 출근이야?”

“맞아.”

“원래 있던 부서로?”

“응.”

딸각. 딸각.

수아는 잠자코 식사하다가 물었다.

“괜찮겠어?”

“······.”

“스트레스 때문에 밤에 잠도 잘 못 잤었잖아. 잊은 거 아니지?”

“어떻게 잊겠어. 다 기억하지.”

“그 이상한 팀장 만나서는······ 막 입사한 사원한테 별 거지 같은 일을 다 시키고.”

“······.”

“생각하니까, 내가 다 화가 나.”

수아는 지혁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기회에 다른 부서로 배치받거나 하면 좋을 텐데······.”

지혁은 고개를 들어 수아를 봤다.

“······.”

그의 눈빛을 보고 수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좀 편해지긴 했지만, 지혁이 무심하게 바라볼 때면 괜히 긴장되었다.

“기억하니까, 가는 거야.”

“어?”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지혁은 피식 웃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걱정이라는 거. 참 오랜만에 받아보네.”

밥숟가락 든 상태로, 둘 사이에 또 스파크가 일었다.

생존을 위해 지혁의 오감은 극단적으로 발달해 있었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늘 좀 일찍 잘까?”

“야, 이제 일곱 시야.”

“씻었어?”

“응? 어어······.”

“금방 씻고 나올게. 방에서 기다려.”

“······.”

지혁은 일어나 욕실로 향하다가, 가만히 앉아 있는 수아에게 물었다.

“왜?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

“왜 자꾸 콘돔을 쓰는 거야? 너 그런 거 안 했었잖아.”

이 질문에 지혁은 당황했다.

콘돔을 왜 쓰겠는가. 이유야 뻔하지. 수아는 알면서 물어보는 거였다.

‘언젠간 얘기해야겠지. 내 애를 그런 세계 속에 살게 할 수는 없어.’

하지만 한껏 달아오른 상태에서, 분위기가 깨질까 봐 우려되었다.

“나중에 설명하면 안 될까.”

물론 최대한 늦게 얘기할 생각이다. 수아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

서울시 강남구의 선도 빌리지.

역삼역 인근에 선도 그룹 본사가 있는데, 마천루 4개가 모여 있는 이곳을 ‘선도 빌리지’라고 부른다.

선도 물산은 선도 빌리지 A동에 있다.

현실 세계 기준으로는 1년. ‘그 세계’에서 보낸 시간으로 치면 5년.

꽤 오랜만에 왔지만, 매일 오던 곳이라 찾아오는 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전 8시 50분.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내데스크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선도물산 직원인데요. 복직자입니다.”

“아, 네. 소속이 어떻게 됩니까?”

“선도물산 상품전략본부 의류 상품기획팀 오지혁 사원이에요.”

“의류 상품기획팀이요. 잠시만요.”

잠시 후, 얼굴 전체에 미소를 머금은 익숙한 사람이 게이트 안에서 나타났다.

“이야~ 지혁아~!”

윤현성 차장. 의류 상품기획팀의 이인자이며, 아우터 담당을 맡고 있다.

그는 지혁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건강하구나? 정말 잘 왔다! 네 걱정 많이 했어~ 하하.”

그는 안내데스크 직원을 향해 말했다.

“우리 팀 막내, 오지혁 씨 맞습니다.”

“네, 여기 임시 출입증입니다.”

지혁은 피식 웃었다.

걱정 많이 했다는 인간이 휴직 중 연락 한번 없었다.

윤 차장은 지혁이 가장 의지했던 직장 상사였었다.

항상 나이스한 얼굴로 나이스한 말을 하며, 심 팀장에게 갈굼당하는 지혁을 위로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윤 차장 없으면 회사를 어떻게 다닐까 했었는데, 사람을 잘 못 본 거였다.

‘윤 차장 같은 인간이야말로 진짜 뱀 새끼인데.’

지혁은 이 사실을 ‘그 세계’에 있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정말 완치 된 거야?”

그는 웃는 얼굴로 지혁의 몸 전체를 스캔했다.

한번 시선이 움직일 때마다 동공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잘 됐다~”

그러면서 지혁의 어깨를 두들겼고, 지혁은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았다.

윤 차장은 움찔해서, 손을 거두었다.

“너 분위기가 많이 바뀐 거 같은데?”

“죽다가 살아서 그런가 보죠.”

“······.”

어딘가 어려웠다.

윤 차장은 눈알을 굴리다가 말했다.

“자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올라가자.”

***

의류 상품기획팀.

부서에 도착해 보니, 예전과 똑같았다.

지혁이 쓰던 책상 위에 물건들로 어지러이 놓여 있는 거 말고는.

“팀장님, 미팅 중이시거든? 잠깐만 기다려.”

“네. 제 자리는요?”

윤 차장은 어지러운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임자가 자리 뺀 지 얼마 안 됐거든. 좀 너저분하지? 치우다 말아서.”

“그러면 여기가 제 자리라고요?”

“맞아.”

“1년 만에 왔더니, 이렇게 반겨주시는구나.”

“······.”

깔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지혁은 책상도 없을 줄 알았다.

‘심 팀장이 확실히 인사과 눈치는 보는 모양이네.’

슥- 슥-

지혁은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을 바닥을 향해 쓸어내렸다.

“뭐 하는 거야?”

“쓰레기통 앞에 앉을 수는 없잖아요.”

“아니, 그래도.”

윤 차장이 당혹스러워하는 중에.

“여어~ 이게 누구야.”

뒤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유의 코먹은 목소리로 지랄하는 게 일상인 인간.

“오지혁~”

심 팀장은 오지혁에게 다가왔다.

“잘 지냈냐?”

“네.”

“······.”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통상 이렇게 말하면 빈말이라도 ‘잘 지냈는지’ 되물어보는 게 일반적인데.

심 팀장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

“건강해 보이네?”

“······.”

심 팀장은 지혁을 지나쳐, 본인 자리에 가서 앉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막내가 타주는 믹스 커피 한잔 먹어보자.”

병가휴직 다녀온 직원에게 내리는 첫 업무가 믹스커피.

사실 심 팀장은 미팅 중에 커피를 마셨었다. 분위기 제압을 위한 행동이었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이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해 주기 위해서.

분명 들었지만, 지혁은 꼼짝 않고 서 있었고.

둘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에 윤 차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 일하는 척했다.

‘그래, 너답다. 항상 좋은 일에만 나서고, 분위기 안 좋을 때는 숨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런 윤 차장을 벌레 보듯 본 후, 지혁이 말했다.

“타 드려야죠. 커피믹스 어딨나요?”

“죠~기.”

아무렇지도 않게 턱으로 가리켰고, 지혁이 움직였다.

심 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탁!

종이컵을 책상 위에 거칠게 올려놓으며 지혁이 말했다.

“드세요. 많이.”

“그래~”

후르릅

심 팀장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모금 마셨다가.

“에잇~ 퉤! 퉤! 이게 뭐야!”

컵 안을 보니, 녹지 않은 프림과 커피 가루가 둥둥 떠다녔다.

“미친 거 아니야? 누가 믹스를 찬물에 타?”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제가 커피 믹스 타는데, 재능이 없나 봅니다.”

“뭐가 어째?”

심 팀장이 험악하게 바라봤지만,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취향에 맞게 직접 타 드시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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