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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9화 (9/301)

9. 시선이 향하는 곳

선도물산 상품기획팀.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오지혁 인사드립니다!”

꿈인가? 내 모습이 보이는 걸 보면 꿈인 것 같은데.

정장을 입고 있지만 아직 대학생 티를 벗지 못한 모습이 참 싱그러워 보인다.

열심히 공부해서, 꿈에 그리던 직장에 취업하게 된 첫날.

“어 왔냐? 저기 앉아.”

“네!”

날 가장 먼저 맞아준 건 정성재 과장이었고, 그가 처음 온 내게 한 말은.

“시키는 것만 잘해도 중간은 간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가 뭐야. 복창해야지.”

난 해맑게 소리쳤다.

“시키는 것만 잘해도 중간은 간다!”

“아따, 패기 좋네.”

이 팀에서 바로 위 선임 직급은 10년 차 과장. 난 차이가 크게 나는 막내였다.

팀원들의 미소가 기괴하게 변해갔고,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장면이 바뀌었다.

탁!

“야! 오지혁!”

심 팀장이 니트 티셔츠를 거칠게 내 얼굴을 향해 던졌다.

“네?”

“누가 메인 칼라를 이런 거로 하래. 어?! 옐로우에 수량 배분을 가장 많이 하면 어떡하냐!”

10층 전체를 울리는 심 팀장의 일갈.

다른 팀의 사람들까지 모두 바라봤다.

꿈속에서 나는 당황해서 우물쭈물 대답하고 있었다.

“그거 팀장님께서 지시하신······.”

“조용히 안 해?!”

“······.”

이 제품을 설계할 때 난 분명히 블랙에 수량 배분을 많이 해야 한다고 했었다.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으면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심 팀장의 말에 결국 옐로우로 했다.

그런데 SKU(칼라웨이) 재점검을 하라는 상품전략본부 지침으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이다.

“이 제품 담당 누구야?”

“접니다.”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왜 핑계를 대나? 어?!”

“······.”

“네가 알바야?”

심 팀장은 내 코앞까지 다가와 인신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줏대 있게 행동 안 해? 네가 시키는 것만 하는 파트타임 잡이냐고 이 새끼야!”

난 꿈속의 나에게 소리쳤다.

‘지혁아, 그럴 때 가만히 있는 거 아니야. 가만히 있으면 병신 되는 거야.’

하지만 내 목소리는 나에게 닿지 않았다.

꿈속의 지혁은 동태 눈깔로 눈만 끔뻑일 뿐이었다.

그리고 수긍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거구나.’

꿈속의 지혁은 정말 병신같이 그러고 있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 숙인 나.

속 사정을 모르는 주변인들의 시선은 내게로 쏟아졌다.

난 그렇게 문제 많은 직원으로 낙인찍히고 있었다.

하지만.

“네!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수량 조정이 가능한지, 생산팀과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지혁은 주눅 들지 않았다.

씩씩하게 대답했고.

그런 태도에 심 팀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가장 하고 싶었던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네 책임이야. 알겠냐?”

***

“지혁아, 아침 먹자.”

수아의 부름에 지혁은 눈을 떴다가, 눈이 부셔서 바로 다시 눈을 감았다.

‘해가 떴나?’

침대 보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왜 이렇게 자면서 낑낑대?”

“아······ 기분 더러운 꿈을 꿔서.”

이따위 악몽을 꿨다는 게 기분 나빴다.

“근데 해 뜰 때까지 자는 건 처음 아니야?”

“······.”

“결혼한 이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런가.”

회사생활 할 때는 9시 출근이지만, 항상 8시 전까지 가기 위해 새벽에 일어 났었고.

주말에는 일 생각에 잠 설치다가 항상 이른 새벽에 일어났었다. 힘들수록 피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엔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 세계’에서의 아침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 낮과 밤의 의미가 없었으니까.

“어머니 집이라 안심돼서 그런가? 어쨌든 너 잠 많이 자는 거 보기 좋다.”

지혁 또한 막판에 악몽을 꾸긴 했으나, 많이 자서 기분은 개운했다.

“아, 근데.”

“응?”

“어머니 집에선 이름 부르지 않기로 했잖아. 안 좋아하셔.”

수아는 혀를 쏙 내밀고 웃었다.

“아, 맞다. 습관이 돼서.”

수아는 지혁의 팔짱을 끼며, 콧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맘마 먹자.”

“헛.”

이건 좀 견디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지혁은 슬그머니 팔짱을 풀었다.

식탁에는 8첩 반상이 차려져 있었다.

“지혁아, 잘 잤니?”

“네, 어머니. 뭘 아침부터.”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며, 지혁은 생각했다.

‘이러다 살찌겠는데. 몸 무거워지는데.’

“엄마 집에 자주 못 오잖니. 올 때라도 제대로 먹여서 보내야지.”

“······.”

“어서 앉아라.”

“네, 어머니도 앉으세요. 잘 먹겠습니다.”

“오냐~”

어머니는 숟가락도 안 들고, 지혁이 먹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왜 안 드세요?”

“엄마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어.”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손주 만나면 우리 지혁이 닮았겠지.”

어머니는 어제부터 틈만 나면 손주 얘기를 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못 막는 게 아니라 안 막는 거다. 어머니니까.

수아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호호. 집에 온 지 이제 일주일 됐어요.”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게 남녀 사이인데.”

피임하고 있다는 걸 수아가 말할까 봐, 지혁은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수아는 그 얘기는 하지 않았으나.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이쁜 손주 안겨 드릴게요.”

대신 지혁에게 부담을 주었다.

“아이고~ 우리 아가 어쩜 말도 이리 이쁘게 할까! 호호. 많이들 먹어라~”

지혁은 사무실 빌런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보다 지금이 더 불편했다.

빨리 자리를 피하려고 먹는 속도를 올리고 있는데.

“지혁아. 근데 너 진짜 괜찮은 거니?”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혁은 밥숟가락 든 채로 어머니를 바라봤는데.

“그냥 좀 달라진 것 같아서.”

“······.”

“내가 낳고 키운 자식인데, 모를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 두 여자가 제일 무섭다.’

지혁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당연히 괜찮죠. 보셨잖아요. 아주 건강하잖아요.”

“표정과 눈빛. 분위기.”

어머니는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변했어.”

***

수아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조용히 밥만 먹었다.

“······.”

지혁 또한 ‘변했다’는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회사 복귀했다며?”

“네.”

“선배들이 반겨주니?”

어머니는 지혁이 힘들게 회사생활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뭐······ 자기식대로 반겨주죠.”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혼자서 지혁을 키우셔야 했던 어머니는 꾸준히 회사생활을 했었다. 그래서 지혁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했다.

“결국 회사생활은 사람이지. 어떤 사람을 만나는 지가 회사생활을 결정하니까. 하지만 지혁아, 어차피 다 지나간다.”

“······.”

“다 가족 딸린 사람들이야. 너무 미워하지 마라. 갚으려 하지 말고.”

지혁의 생각을 꿰뚫고 있는 듯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괜한 걱정이었다.

지혁은 심 팀장과 팀원들에게 복수를 꿈꾸고 있는 게 아니다.

“어머니, 염려 마세요. 전 필요한 일만 해요.”

지난주 금요일에 기선제압을 위해 좀 세게 나가긴 했지만.

심 팀장에게 복수하려는 게 아니었다.

‘이용’

심 팀장을 이용하려는 것일 뿐.

조직에서 운신의 폭을 넓히려면 그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명성’이 있어야 한다.

그 명성은 업무 성과를 통해 얻는 게 가장 좋지만, 그건 시간이 걸리며 운도 따라야 한다.

1년간 병가휴직을 내고 돌아온 복직자.

‘얘 건드리면 좆된다.’

지금의 지혁에게는 이 정도 명성이면 충분했다.

더군다나 직원들의 인심을 잃은 ‘심 팀장’이라면 이 목적달성을 위한 이용 가치로서는 제격이었다.

복수 따위는 상관없다.

지혁의 눈은 필요하며 앞으로 해야 할 일만 쫓고 있었다.

어머니는 약간 당황하여 대꾸했다.

“그,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좀 전에 지혁의 말 한마디에서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

‘실종 중에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궁금하긴 했으나, 상처가 될까 봐 묻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얘기해주겠지.’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자주 놀러 와라.”

어쨌든 지혁을 보며,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안심은 들었다. 그게 중요했다.

***

월요일.

복직 후 맞이하는 첫 월요일.

지혁은 가뿐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그 세계’에서 팽팽한 긴장 속에서만 살았더니, 평온한 주말을 보내는 게 더 불편했다.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마음 속 긴장의 활시위가 조금씩 당겨지는 느낌이었는데, 이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제야 좀 안정이 되네.’

적절한 긴장감은 삶에 활력이 된다. 어제 꿀잠 잤다.

어느덧 회사 도착.

‘오전 8시 55분.’

저벅. 저벅.

지혁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상품기획 1팀의 공기가 급랭해졌다.

팀원들 모두 일부러 지혁의 시선을 피했다.

탁!

지혁은 서류 가방을 일부러 소리 나도록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적절한 소음은 상대방의 심리를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아무도 대꾸가 없다가, 한 박자 늦게 마지못해 대답했다.

-안녕~

-굿모닝.

하지만 심 팀장은 못 본 척 했다.

지혁은 그의 옆에 가서 섰다.

“심 팀장님?”

“응? 어어. 왔어?"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침부터 바쁘신가 봐요? 아직 업무 시작 시각도 안 됐는데.”

‘8시 58분.’

심 팀장은 시계를 보고 생각했다.

‘늦어도 출근 시간 30분 전에는 와야지. 건방진 자식.’

하지만 차마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그러게. 바쁘네. 어서 일 봐.”

지혁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일이 없는데요.”

여전히 심 팀장을 쏘아보며 옆에 서 있었고, 그는 좌불안석이었다.

‘이 새끼가 아침부터 왜 이러지.’

“과업을 정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으응. 그렇지.”

덜컥.

그때 상구 머리에 사각 턱의 남자가 머그잔을 들고 상품기획 1팀으로 들어왔다.

“오지혁이.”

정성재 과장.

상품기획 1팀의 미친개이며, 리틀 심 팀장으로 불리는 남자.

“지금 몇 시야. 어?!”

1년 만에 보자마자, 대뜸 지랄이었다.

“야 이 새끼야. 오랜만에 회사에 왔으면 1시간은 일찍 와서 선배들 자리도 좀 닦아 놓고! 어?”

정 과장의 일갈에 팀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금요일에 본 모습이 있기에 지혁은 분명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월요일 아침부터 또 한바탕하겠거니 싶었다.

“······.”

“금요일에 첫 출근 했다면서? 협조부서 돌면서 인사는 했어?”

“아직 못 했어요.”

“왜?”

“얼굴도 잘 모르는 1년 차가 혼자 돌아다니면서 인사하면 받아 주겠어요? 좀 그렇잖아요.”

지혁은 정 과장의 팔을 붙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정 과장님 기다렸죠. 워낙 평판이 좋으시니까. 인사 다니는데 도와주시면 너무 힘이 될 것 같아서.”

“응?”

정성재 과장은 자존감이 강하고, 권력자에게 약하다.

잘났다고 살살 부채질해 주면 알아서 협조하는 스타일이다.

권력자의 명령에는 물불 안 가리는 스타일이라, 나중에 지혁이 위로 올라가면 알아서 길 것이다.

‘저, 저 새끼가.’

지혁의 행동을 보며 심 팀장의 눈두덩이 떨리고 있었다.

자기한테는 지랄하면서, 본인 심복인 정 과장에게는 살랑거리니까.

그 또한 지혁이 의도한 바였다.

‘강한 연대는 끊어 놓는다.’

“아~ 그랬었어?!”

방금 소리 질러놓고는 지혁이 부드럽게 잘났다고 해주자, 정 과장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알았어. 인마. 가자. 어디부터 가볼까?”

‘흰색의 남자.’ 황성준 대리가 오늘부터 사무실로 출근할 거라고 했었다.

지혁은 부드럽게 정 과장에게 말했다.

“생산팀부터 가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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