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10화 (10/301)

10. 뜻이 있다

같은 층 C구역에 있는 생산팀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지혁은 정 과장 뒤를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금요일에 심 팀장 샤우팅이 여기까지 들렸을지 모르겠네. C구역까지도 들렸으면 좋았을 텐데.’

지혁이 B구역을 지나쳐 가는데, 직원들의 눈빛이 느껴졌다.

똥 피하려는 듯한 모습.

‘여전하구나. 하여간 회사는 소문이 빨라.’

심 팀장과 부딪쳤던 건 금요일에 있었던 일이고, 이제 월요일 아침인데. 다들 아는 눈치였다.

회사에서 아무리 바빠도, 가십거리는 참 잘 전파된다.

사람들의 눈빛과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이동했고, 어느덧 생산팀 자리에 도착했다.

정 과장이 앞에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하 팀장님 자리에 계신가요?”

이른 아침인데도 생산팀에는 몇 사람 안 앉아 있었다.

가장 복도 쪽에 앉은 여직원이 말했다.

“정 과장님, 안녕하세요. 팀장님 잠깐 자리 비우셨어요.”

“아, 그래요? 아침부터 바쁘시네.”

“네, 로비에 거래처 왔다고 내려가셨는데.”

“아, 그럼 좀 걸리겠네요.”

정 과장이 대화하는 사이, 지혁은 생산팀 자리를 살폈고 곧 황 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엇! 지혁 씨!”

황 대리는 환한 얼굴로 다가왔고, 지혁 또한 살짝 미소지었다.

“생각보다 빨리 만나네요? 하하. 안 그래도 상품기획팀 찾아가 보려 했는데.”

정 과장은 황 대리를 눈여겨보다가 지혁에게 물었다.

“누구셔? 난 처음 뵙는데. 아는 분인가?”

“네, 경력직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분입니다.”

“아, 너 거기 갔었다고 했지. 하여간 경력자도 아닌 게.”

지혁은 황 대리에게 정 과장을 소개해줬다.

“대리님, 상품기획실 정성재 과장님이세요. 수량 규모가 가장 큰 니트 제품 기획을 맡고 있으세요.”

물론, 살짝 띄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 과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아~!”

황 대리는 꾸벅 인사하며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에 경력 입사한 황성준 대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해요.”

정 과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너 소개하려고 왔는데, 어째 내 소개를······.”

그때, 어디선가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지혁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정 과장은 무심결에 지혁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어? 미팅 가셨다더니 일찍 오셨네?”

생산팀의 하재웅 팀장이 왔다.

***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하 팀장은 정 과장을 향해 물었다. 혹시 뭔가 사고라도 터진 게 아닌가 싶어서 물어본 것이다.

상품기획과 생산팀은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다. 기획팀의 오더에 따라 제품을 생산하기에 같은 직원 사이지만 갑을관계에 가까웠다.

또한, 입고된 제품에 하자가 생기면 생산팀은 말 그대로 상품기획팀에 탈탈 털린다.

상품기획팀이 이른 아침에 찾아오는 건 안 좋은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하 팀장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저희 팀에 막내가 와서요. 인사시키려고 왔습니다.”

“아······.”

하 팀장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표정을 보였고.

지혁은 뚫어져라 하 팀장의 이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듯, 하 팀장은 손으로 이마를 한 번 쓸었다.

‘뭐 묻었나?’

손을 보니 아무것도 안 묻어 있다.

“자네 뭘 그렇게 보나?”

하 팀장의 물음에 지혁은 이마에서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하 팀장님 뵜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저희 구면이잖아요.”

하 팀장의 색을 보고 있었으나, 자연스럽게 거짓말했다.

“흠. 그렇지. 몇 번 본적은 없지만, 어쨌든 초면은 아니지.”

지혁은 뚫어지게 하 팀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원색에 가까운 파란색. 하 팀장이 꽤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사람에게 보이는 색 중에 섞이지 않은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 즉, 삼원색은 드물다.

원색을 가진 사람은 개성이 강하면서도 특출나다.

‘생산팀도 어울리긴 하지만, 만약 영업 쪽에 있었으면 대성했을 텐데.’

파란색을 보이는 자는 정의로운 성향이 강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준다.

방어적 성격이 강한 생산팀보다는 고객을 직접 만나는 영업팀에 있었다면, 훨씬 더 능력 발휘를 했을 것이다.

“쳐다만 보고 인사는 안 할 거야? 인사하러 왔다며.”

하 팀장은 생각에 빠져 있는 지혁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지혁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잘해라.”

정 과장은 내게 말했다.

“다음 영업팀으로 가볼까. 다들 수고하세요~”

“······.”

지혁은 이동하기 전 황 대리를 지나치며 말했다.

“잠시 후에 봐요.”

영업팀, 개발팀, 기술연구실, 무역팀······.

몇 번 띄워주니까, 정 과장은 신나서 지혁을 열심히 데리고 다녀주었다.

마지막으로 디자인개발실까지 인사한 후 지혁이 말했다.

“정 과장님, 저 잠시 화장실 좀 들렀다가 갈게요.”

“흠. 그래. 나 먼저 올라갈게.”

정 과장이 올라간 뒤, 지혁은 약간 시차를 두고 올라갔다.

그리고 상품기획실이 있는 A구역이 아니라, C구역으로 향했다.

“황 대리님.”

“어, 지혁씨.”

“시간 돼요?”

“네, 물론이죠.”

“잠깐 나가시죠.”

“어디로요?”

지혁은 옥상을 떠올렸다가 바로 생각을 바꿨다. 거긴 듣는 귀가 많으니까.

“1층으로 가시죠.”

***

선도 빌리지를 벗어나, 5분 정도 걸어갔다.

황 대리는 뒤따라오며 말했다.

“어디까지 가요? 너무 늦게 가면 팀장님이 찾으실 텐데.”

“똥 싸고 왔다고 하면 되죠.”

“설마······ 농담?”

지혁은 황 대리를 빤히 보며 말했다.

“교양있게 대변으로 말씀드릴 걸 그랬나.”

“그럼 그렇지. 웬일인가 했네요. 오리엔테이션 있는 동안 실없는 소리는 한 번도 않던 분이.”

황 대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 근데, 재밌었어요. 개그 센스 좀 있는 것 같은데.”

지혁은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이 장소면 눈에 잘 안 띄겠네.”

“뭐 하세요?”

황 대리는 지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모습이 기괴해 보였다.

‘뭔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 거야?’

지혁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당분간 제가 연락하면 여기서 만나요. 저와 회동하는 모습, 나눈 얘기 등. 제가 허락할 때까지 누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돼요.”

“알겠습니다.”

황 대리는 그가 위엄있게 지시하는 모습을 보며 ‘오 부회장’을 떠올렸다.

‘확실히 달라. 외모도 은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은 자기 생각에 매몰되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되어 버린다.

지혁은 황 대리의 표정을 읽고, 한마디 더 했다.

“제 정체에 대해서도요.”

“네.”

“할 얘기 있으면 무조건 만나서 육성으로 하는 거예요. 메시지, 통화 금지.”

“네······.”

황 대리는 좀 질리는 기분이었다.

‘적당히 좀 하지. 과한데.’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하 팀장에 대해서 얼마나 아세요?”

“하 팀장님이요?”

황 대리는 눈을 끔뻑이다가 말했다.

“모르죠. 면접 때 뵈고 오늘 처음 봤는데.”

“뒷조사 안 해봤어요?”

“그걸 왜 합니까?”

‘본인의 인사권자에 대해 뒷조사도 안 해보다니.’

지혁은 이런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대부분 황 대리처럼 행동하겠지.’

‘그 세계’에서는 황 대리 같은 안일함이 정신 나간 사람이지만, 여기선 지혁이 이상한 사람이다.

“하 팀장님은 공정에 대해서 결벽증 가까운 게 있을 거예요. 거래처와 만날 때는 항상 하 팀장님께 보고하시고, 차 한잔 마시더라도 절대 얻어먹지 마세요.”

“······.”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얻기 쉬운 사람일수록 쉽게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죠. 그게 신뢰에 대한 기준이 높기 때문인데. 한번 황 대리님을 믿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절대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

“다시한번 강조하는데, 절대로 의심 살 행동은 하지 마세요. 특히 회삿돈과 관련돼서는요. 10원 하나도.”

황 대리는 지혁의 말을 들으면서 묘했다. 분명 추측으로 하는 말일 텐데,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혹시 하 팀장님이랑 같이 일해 보셨어요?”

“불필요한 질문은 받지 않아요.”

“아, 네.”

지혁은 황 대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하 팀장의 마음을 사야 합니다. 티 없이 정직하고 공정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주면, 쉽게 마음을 여실 거예요.”

“······.”

“황 대리님.”

“네?”

“저와 함께할만한 분인지 지켜볼 거예요. 최선을 다해 주세요.”

이 말에 황 대리는 눈에 불을 켜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사무실에 돌아오니, 심각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또 사고 났나? 진짜 다이나믹하네.’

‘그 세계’ 못지않은 정글. 무난한 하루가 없다.

심 팀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윤 차장, 그래서 못 하겠다고?”

“······.”

“그걸 네가 안 하면 누가 하냐?”

정 과장이 날 발견하고 아는 척했다.

“어, 지혁이 왔니? 너도 이쪽으로 와.”

정 과장이 눈에 띌 정도로 친절해졌다.

팀원들은 정 과장이 지혁을 챙기는 게 어색했다.

사실, 알고 보면 미친개가 단순하다.

지혁은 정과장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 회사생활 할 때부터 정 과장을 이렇게 살살 달래면서 대했다면 어땠을까.’

묻지도 않은 걸 정 과장은 친절하게 상황 설명을 해줬다.

“상품전략본부에서 갑작스러운 지시가 내려왔어. 내년에 본부 차원에서 ‘팍스버거’랑 콜라보를 하기로 했는데, 그쪽에서 테스트 오더를 요청했나 봐.”

“팍스버거?”

머릿속 기억은 5년이 지나있지만, 현실 세계에서 사라진 건 겨우 1년.

제품 콜라보를 할 정도면 꽤 큰 브랜드일텐데, ‘팍스버거’라는 브랜드는 처음 들어봤다.

“아, 넌 모를 수도 있겠다. 요즘 SNS에서 뜨고 있는 브랜드야. 한 1년 됐나? 매장 수는 아직 많지 않지만 화제성이 좋아서 내년에 콜라보 하기로 했어.”

“그렇군요.”

심 팀장이 말했다.

“정 과장, 뭐 그렇게 상세하게 설명을 해. 어차피 상관도 없는 애한테.”

지혁이 심 팀장을 바라보자, 그는 눈을 피하고 정 과장에게 말했다.

“회의에 집중해.”

“알겠습니다.”

심 팀장은 다시 윤 차장을 다그쳤다.

“그쪽에서 바람막이 점퍼를 원한다잖아. 네가 아우터 담당 아니야? 겨우 100장인데! 그냥 좀 하자!”

“전 선도물산 소속 매장에 깔리는 제품만 기획합니다. 제 의향은 들어가지 않을 그런 기획 오더는 할 수 없습니다. 수량은 중요하지 않아요.”

“야 이 치사한 인간아. 누가 모를 줄 알고? 납기는 짧고, 책임은 크고!”

이번 기획 상품을 본 후, 팍스버거에서 내년에 콜라보 할지의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

단순히 겨우 100장짜리 오더가 아니었다.

“······.”

“차장이란 놈이 진짜.”

그래서 차장인 것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을 줄 아니까.

아무리 심 팀장이 맹비난을 퍼부어도 윤 차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즘 시즌 준비 중이라 바쁩니다. 이런 특수한 건은 팀장님이 직접 하셔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우터 하실 줄 알잖아요.”

윤 차장의 회심의 일격에 바로 심 팀장은 화제를 돌렸다.

“장 과장이 한번 해볼래?”

“전 잡화 담당입니다.”

심 팀장은 정 과장도 한번 바라봤지만, 니트를 담당하고 있는 그는 요즘 너무 바빴다.

“팀장님?”

그때, 생각도 못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어차피 지금 일도 없는데, 제가 해볼까요?”

심 팀장은 지혁을 힐끔 본 후, 다시 눈을 피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