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작지만 중요한 일 (1)
“진짜?”
심 팀장 대신 윤 차장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오~ 자식. 패기 있는데?”
그는 무거운 짐을 덜어낸 듯, 활짝 웃으며 말했지만.
심 팀장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오지혁은 아직 기획 경험이 부족해.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이 오더가 수량은 적지만, 실패했을 때 여파가 너무 커. 만약 잘못되면? 책임을 넘길 명분이 될까? 이제 막 복직한 직원한테 일 넘겼다는 책임을 피하기 힘들 것 같은데.’
선도물산의 근간은 종합상사였다.
지금의 선도물산은 선도그룹 내에서 관계사 분리 합병 등을 통해 상사, 건설, 패션을 아우르는 거대 기업이 되었다.
지혁은 ‘패션’에 속해있으며, 패션은 크게 인터내셔날 영역과 브랜드 영역으로 나뉘는데.
인터내셔날 영역은 세계의 유수 브랜드의 한국 판권을 계약하여, 백화점에 입점시키고 제품을 수입하여 판매한다.
브랜드 영역은 선도물산에서 직접 브랜드를 운영하며 상품기획부터 제품생산, 판매까지 모든 걸 다한다.
상품기획 1팀은 브랜드 영역에 소속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선도물산의 자랑, 국내 토종 스포츠 브랜드 ‘스타덕’을 기획한다.
스타덕은 프로골드컵, 로카프, 넥티브, 네피도 등 1980년대 토종 스포츠 브랜드들이 대거 출현했을 때 함께 출시된 브랜드인데.
현재 국내 매출 규모 5위로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와 순위 경쟁을 벌이는 유일한 토종 스포츠 브랜드이다.
즉, 상품기획 1팀이 하는 일은 상징성이 있으며, 선도물산 경영진의 많은 관심을 받는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콜라보 제품에 문제가 생긴다면, 아주 많은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오지혁은 안돼. 윤 차장, 정말 못 하겠냐? 겨우 한 스타일인데?”
윤 차장은 시무룩한 얼굴로 얘기했다.
“겨우 1 스타일인데, 왜 지혁이가 하면 안 돼요? 제가 뒤에서 봐줄 테니까, 한번 맡겨보시죠.”
윤 차장 입장에서는 지금 그림이 가장 좋았다. 잘 못 되더라도 오지혁과 심 팀장 책임이니까.
“그럼 담당은 윤 차장이 하고, 오지혁이 서브로 돕게 해.”
“그건 안 되죠.”
서로 그럴듯한 명분을 세워가며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었고, 지혁은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왜 안 되는데?”
“······.”
“바빠서 못 하겠다며? 윤 차장이 담당만 맡고, 오지혁이 하게 하라니까?”
담당이 되어야 문제가 안 생기도록 신경 쓴다.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럼 팀장님이 이 스타일 담당을 맡으시고, 오지혁이 움직이게 하시죠. 제가 뒤에서 돕고요.”
“윤 차장! 정말 이럴 거야?!”
평소에 두 사람의 의견 충돌은 보기 어렵다.
지금 심 팀장과 윤 차장. 두 고참이 서로 안 하려는 모습을 보며, 정 과장과 장 과장은 사안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이거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거구나.’
“아, 진짜. 추하다. 추해.”
지혁의 혼잣말에 두 사람은 뜨끔했다.
‘이런 새가슴 가진 인간들. 진짜 쪼잔하다.’
윤 차장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너 방금 뭐라 그랬냐?”
“들렸어요?”
“뭐?”
지혁은 심 팀장을 향해 말했다.
“만약 문제 생기면, 제가 너무 하고 싶어 해서 시켰다고 하세요. 지금 책임질 일 생길까 봐, 서로 미루는 거잖아요.”
“······.”
“못 미더우면 지금 막내가 말하는 거 녹음하시던가. 아니면 제가 합의서라도 쓰고 맡을까요?”
모욕감을 느낀 심 팀장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외근하러 다닐까. 저 새끼 때문에 힘드네.’
지혁은 그럼 심 팀장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녹취, 서류 필요하면 지금 하세요. 갑자기 왜 체면을 차리고 그러세요. 앞뒤 안 맞게.”
지혁은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제가 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고, 심 팀장은 합의서나 녹취는 하지 않았다.
팀원들 다 보는 앞에서 도저히 막내에게 책임 전가 합의서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윤 차장님 어서 오세요.”
“어.”
윤 차장은 지혁의 책상 옆에 간이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둘의 포지션이 바뀐 것 같았지만, 윤 차장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이 뜨거운 감자를 놓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기에.
“지혁아~ 잘할 수 있어! 형이 많이 도와줄 테니까.”
“형?”
지혁이 정색하고 물어보자, 윤 차장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형 맞잖아.”
“좋으세요?”
“뭐가?”
“어려운 일 책임지지 않게 되어서 좋냐고요.”
“······.”
윤 차장은 멀뚱히 지혁을 바라봤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 겨우 사원 주제에 차장한테 하는 말버릇하고는. 확 눈깔을 그냥······.’
생각만 할 뿐,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상황 알려주세요. 상세하게.”
“나도 잘 모르는데. 오늘 들었고, 처음부터 책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 그놈의 책임 얘기는. 아는 대로만 얘기하라고."
"······."
"요.”
벌레 보듯 하는 눈빛에 윤 차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혁은 같은 말 반복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
“그래······ 팍스버거는 대성실업에서 런칭한 브랜드거든. 알지? 외식대기업.”
“그냥 얘기해요.”
“어. 방송에서 연예인이 팍스버거를 한번 언급했어. 그때부터 젊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줄 서서 먹을 정도거든. 매장 수가 몇 개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지혁은 묵묵히 들었고, 윤 차장은 그의 눈치를 한번 봤다.
“그걸 상품전략실장님이 눈여겨보신 모양이야. 콜라보 기획해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내년에 우리 스포츠 브랜드 ‘스타덕’과 하기로 했는데, 테스트 오더 조건을 뒤늦게 내민 거지.”
“뒤늦게?”
“응. 그쪽 담당자가 최근에 바뀌었는데. 좀 까다로운 모양이야. 특히 디자인 부분 때문에······ 팍스버거 브랜드 로고를 앞가슴에 너무 크게 달아 달라는 거야. 그건 디자인적으로 말이 안 되거든. 스타덕 브랜드의 헤리티지가 있는데.”
“······.”
“그쪽에서는 콜라보 해서 사실 이득 보는 게 크게 없잖아. 콜라보로 음식 만드는 게 아니라, 옷 만드는 거니까. 그래서 괜히 태클 거는 것 같기도 하고.”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은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테스트 오더가 어긋나면 내년 콜라보가 진짜 무산될 수도 있어.”
“그래서 윤 차장님이 안 하려고 하신 거고요.”
“그렇지. 어?! 아, 아니. 난 그냥 바빠서······.”
지혁은 재밌다는 듯 윤 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윤 차장님이 안테나가 좋으시네요. 관심 없다더니, 뒷사정까지 다 알고 계시고.”
윤 차장은 이게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 헷갈렸다.
그런데, 칭찬이었다.
지혁은 윤 차장이 쓸모 있는 인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계속하세요. 내가 알아서 들을 테니까, 아는 거 모르는 거, 확실하지 않은 거. 전부 다 얘기하세요.”
“어, 그리고 상품전략실장님은 요즘 ‘콜라보’에 대한 관심이 많으셔······.”
윤 차장은 한동안 아는 대로 다 얘기했고, 지혁은 가끔 필기하면서 들었다.
약 30분 경과.
윤 차장은 침이 말라갔다.
어느 정도 다 얘기했다 싶었는데도, 지혁은 ‘계속’을 외쳤다.
취조하는 것 마냥, 쥐어 짜냈다.
괜히 긴장되었다.
등에 식은땀마저 배길 때쯤.
“이게 진짜 다야. 더 없어.”
“흠······.”
타닥. 타닥.
지혁은 볼펜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상품전략실장님 의중이 들어간 일이라 테스트 오더는 중요하며, 성사 여부는 팍스버거 담당자가 갖고 있다는 거네요.”
지혁은 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이번 일의 가장 주요한 포인트는 ‘콜라보’ 자체가 아니라, 상품전략실장님 눈에 거슬리지 않는 거네.”
“······.”
“퀄리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성사만 되게끔 하면 되는 일.”
윤 차장은 속으로 놀랐다.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내네. 얘가 이렇게 일머리가 좋았었나?’
“팍스버거 담당자 연락처 알아요?”
“난 모르지. 알아봐 줄까?”
주객이 전도됐다. 어느새 윤 차장은 자연스럽게 지혁의 서브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니요. 상품전략본부 좀 갔다 올게요.”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실인지 확인해봐야지.”
***
상품전략본부에 가서 팍스버거 콜라보 담당자라고 하니,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라며 아주 협조적이었는데.
그들의 태도를 보면서 윤 차장이 한 말이 맞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중요한 일인가 보네.’
팍스버거 담당자 연락처를 받은 후, 지혁은 바로 나갔다.
“외근 갔다 올게요.”
아무도 지혁에게 어디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는 상품기획 1팀에서 완벽한 자유인이었다.
대성실업 본사는 강남에 있어서 찾아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진아 과장. 외식사업부 마케팅팀.’
상품전략본부에서 받은 명함을 보았다.
일단 만나는 게 중요했다.
어떤 사람인지를 봐야 전략을 짜니까.
대성그룹 본사 로비에 도착.
정확히 점심시간에 맞춰서 왔다.
지혁은 바로 전화했다.
[여보세요?]
[김진아 과장님 됩니까?]
[아, 네. 누구신가요?]
[선도물산 상품기획팀 오지혁이라고 해요.]
[오지혁씨?]
[네, 팍스버거 콜라보 담당을 맡게 됐거든요. 미팅했으면 해서 연락 드렸어요.]
[아······ 실례지만 직급이.]
[사원이에요.]
[허······ 참······ 와······.]
별다른 말은 안 하지만, 전화기로 들리는 추임새에서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담당이시라고요?]
[네.]
그때 게이트에서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점심을 먹으러 나온 것이다.
지혁은 매의 눈으로 전화기 든 사람들을 살폈다.
그들의 표정. 목소리, 분위기.
지금 김진아 과장과 매칭되는 사람을 찾기 위해 눈과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세계’에서 생존을 하기 위해 시각과 청각이 예민하게 훈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으신 거 같은데요. 제가 전략본부 쪽에 다시 연락을······.]
“착오 없어요.”
지혁은 김진아 과장 앞에 섰고. 그녀는 전화기를 든 채, 놀란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이런 앞머리를 내리고 있네'
이래서 남자보다 여자들의 '색깔'을 보기가 어렵다. 머리가 길고, 앞이마를 가린 경우가 많으니.
“누, 누구세요?”
“전화 드렸던 오지혁입니다.”
“네, 네?!”
김진아 과장은 눈이 동그래졌고, 지혁은 명함을 건네었다.
“잠시 미팅할 수 있을까요?”
“아니 연락도 없이 갑자기.”
“저희 좀 전까지 연락하지 않았었나요?”
김진아 과장은 황당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지혁은 어이없을 정도로 뻔뻔했다.
하지만 차마 여기까지 왔는데,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근데 지금 식사 시간인데.”
“네, 식사하고 오세요. 기다릴게요.”
“······.”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먹고 왔거든요.”
김진아 과장은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잠시 후에 봐요.”
“네.”
김진아 과장이 사라진 뒤, 지혁은 샌드위치를 사 먹으러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잠시 후.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로비에서 지혁은 김진아 과장과 마주 보고 앉았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지혁의 물음에 김진아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빨리 올라가 봐야 해요. 미팅이 있어서.”
“아, 네.”
“그럼 용건만 간단히 하죠.”
김진아 과장은 가장 쟁점이 되고 있는 사항을 대뜸 말했다.
“네, 전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브랜드 시안의 사이즈는 조정할 수 없어요. 디자인도 중요하겠지만······.”
“네, 조정 안 할게요.”
지혁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네?”
“자, 그럼 그건 됐고.”
지혁은 김진아 과장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또 원하는 거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