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지켜보고 있다
보다 못한 윤 차장이 나섰다.
“야, 오지혁. 너 팀장님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윤 차장은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인 일 말고, 남의 일에 나서서 한 마디 할 수 있는 상황.
지혁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었지만, 직접적으로 대응하기는 부담스러웠고.
정의로운 선배로 나서서 훈계할 수 있는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내가 틀린 말 했나요?”
“그럼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나? 너무 하잖아! 보자보자 하니까 어디 팀원이 팀장님한테! 어?!”
윤 차장은 일부러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팀장을 비호하며, 아래 직원을 훈계하는 위엄있는 모습을 모두가 봐주길 바랐다.
또한, 지혁의 돌발행동이 염려되어, 최악의 경우 말려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럼 윤 차장님이 대신 결재하세요.”
“뭐?!”
“이거 윤 차장님이 안 한다고 해서 제가 하는 거 아닌가요. 상품기획 1팀 점퍼 담당이 누구죠?”
윤 차장은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야! 그 소리가 갑자기 왜 나와? 지금 그 얘기 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다시 가져가라고요.”
윤 차장은 눈알을 굴렸다.
‘팍스버거 담당자와 미팅도 끝냈고, 생산의뢰서도 나왔으니 디자인 수정도 끝난 거야. 이제 진행만 시키면 되잖아. 지금 받아도 나쁜 건 없어.’
그때 지혁은 윤 차장의 의지를 꺾는 한마디를 했다.
“일주일 안에 제품이 나와야 하는데.”
“일주일?!”
윤 차장은 귀를 의심했다.
‘미쳤군. 지퍼를 어떻게 하려고. 점퍼를 일주일 안에 완성 시킨다고? 어쩐지 너무 순탄해 보인다 했어.’
생산의뢰서를 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지퍼가 들어간 거로 생각했었다. 제품 납기 얘기에 윤 차장은 바로 생각을 접었다.
“담당은 그렇게 막 바꾸는 게 아니야. 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
“책임감 갖고 열심히 해. 인마. 팀장님한테도 예의 있게 잘하고. 알겠어?!”
지혁은 어이가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쓰레기네. 양아치 새끼.’
고개를 끄덕이며 윤 차장에게 말했다.
“그러죠. 앞으로 팀장님 말고 윤 차장님과 친하게 지내야겠어요.”
“그래! 어, 어?!”
‘더 친하게 지내겠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윤 차장은 바로 알아차렸다.
타깃을 너로 바꾸겠다는 것.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뭐, 뭔 말을 그렇게 해.”
“그럼 친하게 지내지 말까요?”
“아니, 뭐 그런 뜻은 아니지만······.”
지혁은 윤 차장을 보며 무섭게 웃었고, 윤 차장은 그의 눈빛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엿 됐다. 괜히 나섰어. 젠장.’
반면, 심 팀장의 표정은 한결 좋아졌다. 희망을 본 듯한 얼굴이었다.
“결재했어요?”
지혁의 물음에 심 팀장은 깜짝 놀라서, 말했다.
“어, 어. 여기.”
그는 재빨리 생산의뢰서에 결재한 후 건네었다.
“생산팀 갔다 올게요.”
지혁은 윤 차장의 옆을 쌩하고 지나쳤다.
***
“황 대리님.”
지혁은 생산팀에 오자마자, 황 대리부터 찾았다.
“어~ 지혁 씨. 오늘 자주 보네요?”
아침에는 인사하러 왔었고, 지금은 일로 왔다.
“하하.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네요. 좀 전에는 대성실업이라며 통화했던 거 같은데.”
대성실업 본사에서 점심시간에 통화했었고, 지금은 오후 4시 30분.
지혁은 일 처리를 속전속결로 했다.
이 회사에 아직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황 대리는 지혁이 마냥 반가워서 재잘거리는데, 지혁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흠! 일 있어서 왔겠죠?”
“여기, 생산의뢰서요.”
“네? 갑자기?”
황 대리는 당혹스러웠다. 오늘 처음 출근해서, 이제 업무 파악 중인데.
“이봐, 자네는 협조부서에 왔으면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지켜보고 있던 생산팀 하재웅 팀장이 책상에 앉은 채로 말했다.
“계신지 몰랐네요. 강녕하셨습니까.”
“······.”
오늘 아침에 본 사이. 이런 인사는 약간 비꼬는 투 같았지만, 하 팀장은 넘어갔다.
지혁은 다시 황 대리를 바라봤다.
“왜요? 못 해요?”
“잠시만요. 아직 이 회사 생산의뢰서 양식이 익숙하지 않아서요.”
황 대리는 생산의뢰서를 첫 장부터 쭉 살피며 말했다.
“점심때 전화로 얘기한 그 스타일이군요. 수량 100장인 걸 보니.”
“맞아요.”
심각한 표정으로 생산의뢰서를 살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수량은 적은 데, 오가닉 원단 쓰고, 썬그립에, 앞뒤 그래픽 다 들어가고. 아이고 배색 원단도 있네. 납기는 1주.”
“······.”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황 대리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혁 씨, 잠깐만요. 팀장님께 보고 좀.”
“네.”
황 대리는 생산의뢰서를 들고 하 팀장을 찾아갔고.
잠시 후, 하 팀장은 큰 소리로 지혁에게 물었다.
“이거 팍스버거 콜라보 건 아닌가?”
“맞아요.”
하 팀장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이런 건 상품기획실에서 직접 하지 그래. 수량 적은 스타일은 생산팀에서 굳이 할 필요가 없어. 어차피 자재 대부분을 사입 해야 하니까. 공장 컨트롤 할 것도 없거든.”
이 몇 마디 말에 지혁은 하 팀장의 의중을 파악했다.
‘리스크 있는 건 아예 안 받겠다는 거네. 팀장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런가? 파란색이 보여서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사입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 많거든. 필요하면 생산팀에서 소개를 해줄게.”
하 팀장은 지혁을 만만하게 봤다.
이렇게 분위기를 만들어서 떠넘기면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원이니까.
다만, 지혁을 잘 알고 있는 황 대리만이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음······.”
지혁은 고민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못 한다는 거죠?”
“아니. 못 하는 게 아니라, 상품기획실에서 직접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거지.”
“그럼 할 수 있다는 건가요.”
“응? 어, 할 수야 있지.”
“그럼 하세요.”
“······.”
묵직한 한 마디.
하 팀장은 말문이 막혔다.
‘뭐지? 왜 이렇게 침착해?’
보통 말단 직원이 협조를 구하러 왔을 때, 팀장급이 거부하면 우물쭈물하다가 돌아가야 정상이다.
‘이걸 어떻게 대꾸해야 하나. 못 한다고 말할 수는 없고······.’
하 팀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업무 효율성을 고려했을 때, 우리가 받기에 적절한 스타일로 보이지 않으니, 상품기획팀 내부적으로 다시 논의해 봐.”
“······.”
“다음부턴 최소 1,000장 이상 오더만 의뢰하도록 해. 서로 이런 불편한 일 없도록. 황 대리. 저 친구한테 괜찮은 사입업체 소개해 줘.”
“네? 아 네.”
황 대리가 미안한 얼굴로 쭈뼛쭈뼛 다가오는데, 지혁이 말했다.
“업체 소개 안 받을게요.”
“······.”
“생산팀에서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생산팀 업체를 소개받나요?”
“······.”
“제가 거래하고 싶은 업체 뚫어서 하면 되지.”
하 팀장은 눈이 번쩍 뜨였다.
“아는 업체가 있어?”
“아니요.”
“생산 경험도 없는 사람이? 눈 뜨고 코 베일 수 있는 게 벤더야.”
“뭐······ 쿵짝쿵짝 잘 맞춰서 하면 되겠죠.”
“쿵짝쿵짝?”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쿵짝쿵짝.’ ‘좋은 게 좋은 거.’
지혁은 하 팀장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세 번째 눈으로 봤던 그의 색을 기억한 것이다. 삼원색으로서의 아주 선명했던 파란색. 의심이 많으며 ‘공정함’에 대한 결벽증이 있는 사람.
지혁은 하 팀장을 향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우리 회사에 생산팀이 있는데, 수량이 적다는 이유로 상품기획팀 사원이 제 맘대로 업체선정 해서 쿵짝쿵짝 잘 해봐도 될까요?”
“······.”
하 팀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고.
지혁은 잠시 기다렸다가 그의 책상 위에 있는 생산의뢰서를 집으려 했다.
탁!
그때, 하 팀장은 생산의뢰서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손으로 눌렀다.
“황 대리.”
“네.”
“생산의뢰서 접수해.”
“네. 알겠습니다.”
***
“그럼 지혁씨, 견적서 작성 후에 연락 드릴게요.”
“네.”
뚜벅. 뚜벅.
지혁이 돌아간 뒤.
하 팀장은 황 대리를 불렀다.
“황 대리. 잠깐 이리로 와 봐.”
“네, 팀장님.”
하 팀장은 황 대리를 옆에 앉힌 뒤 물었다.
“쟤 뭐 하는 애야?”
“네?”
“둘이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아······.”
“솔직히 말해 봐. 그냥 일반 사원 아니지?”
하 팀장은 지혁에게서 뭔가를 느꼈다.
그는 팀장으로서 인사권을 갖고 있으며, 면접에도 참관하는 등 여러 직원을 경험했다.
즉, 사람 경험이 많기에 어느 정도 인물 볼 줄을 안다. 지혁은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경력직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났는데요. 일반 사원 맞습니다. 팀장님도 아는 사이라고 하셨잖아요.”
“알기야 알지. 직접 같이 일해본 건 아니지만, 어쨌든 기획팀에 있었으니까.”
하 팀장은 일 년 전에 봤던 지혁을 떠올렸다.
‘분명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밝고 씩씩한 신입사원이었던 걸로만 기억한다. 심 팀장에게 갈굼 당하는 거로 유명했었고.
“황 대리. 진짜 나한테 말 안 하는 거 없어?”
“······.”
황 대리가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짓자, 하 팀장은 옳다구나 싶었는지 더 채근했다.
“나 자기 팀장이야. 앞으로 오랜 시간 한 팀으로 일해야 하는데. 숨기고 그럴 거야?”
“아······ 이게. 정확하지가 않아서.”
“괜찮아. 얘기해 봐.”
“추측으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아, 알아서 들을 테니, 뭐든 얘기해 봐.”
황 대리 머뭇 거렸고.
“아, 빨리!”
결국, 마음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지혁 씨가······ 오너 가문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너······ 뭐?! 오 회장님?!”
선도그룹의 제왕. 오종건 회장. 그 이름이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하 팀장의 동공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유는?”
“경력직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너가 되고 싶냐느니······ 뭐 일반적이지 않은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그리고 하는 행동이 너무 당당하고 거침이 없어서······ 이상하다 싶어서 한번 떠보기도 했거든요.”
“오너와 연관된 게 아닌지 떠봤다고?”
“네.”
“근데?”
"아니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그렇지."
“딱히 부인을 하지 않더라고요.”
“······.”
지혁에게 받은 조력자로서의 ‘제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성도 같습니다. 오 씨.”
“그렇네.”
“희귀한 성은 아니지만.”
“본관도 아나?”
“아니요. 저도 궁금하긴 했는데, 그런 것까지 물어보기가.”
“흠······.”
하 팀장은 생각했다.
‘설마······ 아니겠지. 오너 일가가 왜 여기에. 그것도 사원으로.’
오 회장의 장남인 오 부회장의 나이는 48세. 지혁과는 무려 스무 살 차이다.
그 정도 나이 차이라면 정상적인 동생일리는 없고.
'오 부회장의 아들일까? 혹은 오 회장의 숨겨둔 아들?'
재벌가의 삶은 일반인들과는 다를거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일까.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만약 출생의 비밀이라면, 일반 사원으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병가 1년 동안 경영 수업을 받고 변신해서 온 걸지도.’
신입사원이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1년 병가휴직을 받은 것도 그렇고. 죽을병 걸렸다더니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그렇고.
한쪽으로 생각을 몰아가니, 상황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하 팀장은 점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머릿속으로 막장 아침 드라마를 한편 찍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앞으로 오지혁 앞에서는 행동 조심하면서 지켜보자. 젠장, 오더받기를 잘했네.’
까똑!
심각한 얘기를 하던 중이라, 둘 다 깜짝 놀랐다.
황 대리 핸드폰이었다.
‘오지혁 씨.’
“어?”
지혁 얘기 중에 그에게 메시지가 오니, 어쩐지 꺼림칙했다.
“뭐해. 메시지 확인해 봐.”
“네.”
[오늘 퇴근하고 좀 봅시다. 그리고······.]
‘허걱!’
황 대리는 그다음 메시지를 보고 기겁했다.
[지금은 내가 의도한 상황이라 넘어가지만, 다음부턴 허락 없이 함부로 내 얘기하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황 대리는 갑자기 안색이 파래져서 동공이 흔들렸고.
하 팀장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재빨리 물었다.
“왜? 뭔데? 왜 이렇게 놀라?”
황 대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메시지 내용의 반만 잘라서 말했다.
“퇴근하고 저녁같이 먹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