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가능성이 있다면 (1)
[6시 10분에 1층에서 만나요.]
황 대리는 늦지 않게 6시 정각에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 첫 출근 날 칼퇴근 하는 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하 팀장이 어서 나가라고 배려해준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나설 수 있었다.
황 대리는 로비에 먼저 도착했고, 잠시 후 ‘6시 10분.’
저벅. 저벅.
지혁이 나타났다.
게이트에서 걸어 나오는 그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황 대리는 생각했다.
‘젊은 사람이 참 묵직해. 외모도 깔끔하고. 조금 무섭긴 하지만, 어딜 내놔도 밑질 사람은 아니야. 여자친구 없다면, 동생 소개해주고 싶은데.’
정장 차림의 다부진 체격. 그 위에 롱 코트로 입었고, 머리는 짧다.
묘한 매력에 황 대리는 홀린 듯 지혁을 바라보았고.
지혁은 황 대리의 시선을 느낀 후, 무심결 이마를 손으로 한번 쓸었다.
“뭘 그렇게 보세요?”
“아, 아닙니다. 오셨어요?”
황 대리는 지혁의 공허한 눈빛을 보았다.
“방금 날 탐색하는 거 같던데.”
“탐색이라뇨.”
“그럼, 뭐였나요? 그냥 외양만 보는 눈빛이 아니었어요.”
황 대리는 질리는 기분이었다.
‘이건 뭐 쳐다도 못 보겠네. 이 남자는 눈빛까지 읽나.’
“정말 그냥 본 거였습니다. 감상했다고 표현을 해야 할까요.”
“감상······.”
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남자한테 듣기 좋은 말은 아니군요.”
“······.”
“어쨌든 가시죠.”
지혁이 앞장서서 걸었고. 황 대리는 그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글쎄요. 황 대리님 먹고 싶은 거 있나요?”
“진짜 저녁 식사하는 거예요?”
“그럼 이 시간에 커피 마시겠어요.”
지혁이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게 신기했다.
“그럼 술도 한잔?”
“드시고 싶으면 드세요.”
황 대리는 술을 좋아한다.
지혁과 친해지고 싶었던 그는 신나서 물었다.
“혹시 지혁 씨 여자친구 있나요? 없으면 제가 괜찮은 사람 소개해 줄 수 있는데.”
“여자친구는 없고, 아내는 있어요.”
“아~ 네?!”
지혁은 아내가 있는 게 여러모로 편하다고 생각했다. 귀찮은 일 생길 걸 미리 방지할 수 있으니까.
“결혼하셨구나······ 일찍 하셨네.”
지혁은 앞서 걸으며 말했다.
“아, 메뉴는 황 대리님이 드시고 싶은 거 먹는데, 고기만 피해 주세요.”
황 대리는 어이가 없었다.
‘고기 빼고? 그럼 메뉴가 너무 한정되잖아.’
***
횟집.
자리에 앉자마자, 지혁은 묻지도 않고 메뉴판 가장 상단에 있는 다금바리를 시켰다.
황 대리는 깜짝 놀랐다.
본인이 연장자이고 직급도 높으니, 저녁을 쏠 생각이었는데.
다금바리라면······.
‘어이 씨, 센데.’
30만 원이 넘는다. 회사원 월급으로는 저녁 한 끼로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좋은 거로 먹어야죠.”
“아······ 네. 하하.’
황 대리는 어색하게 웃었는데, 지혁은 이 비싼 가격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그 세계’에서 살면서 돈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 정확히 말하면 무뎌졌다기보다는 가치 기준이 바뀌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돈’보다 ‘재화’가 훨씬 더 중요한 세계에 살았었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돈은 아끼지 않고 쓰는 게 지혁에게는 당연했다. ‘그 세계’에서 돈은 그냥 쓰레기였으니까.
‘내편 에게는 아끼면 안 된다.’
‘조력자’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건 돈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지혁의 이런 생각을 모르고 있는 황 대리로서는 좌불안석이었다.
‘제기랄, 순댓국에 소주나 한잔하면 되지. 뭔 다금바리야.’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비싼 걸 시켰더니, 수저 놓을 자리도 없도록 엄청나게 나온다.
“드시죠.”
지혁이 소주잔을 채워주자, 황 대리는 눈을 질끈 감고 생각했다.
‘아. 몰라. 이미 음식 나왔어. 술이나 먹자.’
“하하. 그래요! 많이 드세요!”
황 대리가 술잔을 채워주려 하자, 지혁은 술잔을 덮었다.
“전 술 안 먹어요.”
“아······.”
지혁은 술병을 뺏고 말했다.
“어서 들이키세요. 제가 따라드릴 테니까.”
황 대리는 쭉 들이키며 생각했다.
‘이게 뭐야. 이 고급 안주에 혼술 하는 거야?’
황 대리는 웬만해서는 혼자 밥 먹지 않는다. 혼자 술 먹는 건 더 싫어한다.
그의 앞에 있는 저승사자 같은 지혁의 얼굴을 보며, 취기가 오르면 편해지겠지 싶은 마음에 황 대리는 술을 빠르게 마셨다.
말수 적은 지혁과 함께 있으니, 거의 황 대리 혼자 떠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쯤.
“황 대리님.”
“네.”
“이번 건 잘 해주셔야 해요.”
“오늘 생산의뢰서 주신 스타일 말씀이시죠?”
“네.”
“물론이죠. 저 이 회사에 스카우트 돼서 온 사람입니다. 하하. 염려 마세요.”
“오······ 그래요?”
지혁은 황 대리가 지원하여 입사한 거로 생각했었다.
“하하. 네. 제가 전 회사에서 기획상품 하나를 기가 차게 생산한 적이 있었거든요. 롱다운 점퍼였는데······ 그게 어쩌다가 소문이 돌아서.”
“생산을 어떻게 하면 소문이 나나요?”
“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좋은 퀄리티를 저렴하게 생산해 내면 업계가 알아주죠. 하하.”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렇군요. 실력자라고 하시니 안심이 되네요. 이번 건은 약속한 날짜에 맞춰서 좋게만 만들면 돼요. 가격은 신경 안 쓰셔도 되니까.”
황 대리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좋은 가격에 맞춰야죠. 견적서는 제가 작성되는 대로······.”
“다시 말하는데, 이번 건은 가격은 중요하지 않아요.”
“······.”
지혁의 정색한 말투만 들으면, 괜스레 오금이 저린다. 술자리라서 분위기 좀 풀렸다 싶었는데, 여지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났다.
황 대리는 소주 두 병을 비었으나, 술기운도 잘 안 느껴졌다.
“자, 이제 일어날까요?”
지혁은 일어날 채비를 했고, 황 대리는 식탁 위에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음식들이 눈에 밟혔다.
“아직 회 반도 안 먹었는데.”
“싸 가세요. 가족들과 함께 사시나?”
“아 네, 그렇긴 합니다만. 회를 싸간다는 게 좀······.”
지혁은 가게 주인을 불렀다.
“저기요. 여기 회 좀 싸주시고요. 광어 하나만 추가로 포장해주세요.”
“지, 지혁씨? 뭐 하시는 거예요?”
“가족들이랑 드세요. 먹던 것만 싸가면 좀 그렇잖아요.”
지혁은 곧바로 계산하러 갔다.
“여기 다 계산해주세요.”
황 대리는 깜짝 놀랐다.
‘어라? 쏘네?’
다금바리에 소주에 회 포장까지. 다 합치면 40만 원도 넘게 나왔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카드를 건네는 지혁을 보며 생각했다.
‘하긴, 오너일가에게는 이 정도는 껌값이겠지. 확실히······ 달라.’
이미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지만, 갈수록 지혁의 행동은 그의 확신을 더 해줬다.
하지만 지혁은 ‘수아 카드’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아한테 한 소리 듣겠는데.’
아직 지혁은 월급도 받기 전이다.
두 남자는 횟집을 나섰고.
황 대리는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하하, 잘 먹었습니다. 다음엔 제가 살게요. 아~ 이거 제가 사려고 했는데. 하하.”
지혁은 황 대리가 일부러 신발 늦게 신는 걸 봤었다.
“부탁드릴게 하나 있는데.”
“네~ 뭐든 말씀하세요.”
“생산 좀 가르쳐 주세요.”
“네? 생산?”
오늘 여러 미팅을 하면서, 생산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획하시는 분이 생산은 배워서 뭐 하시게요? 경력도 그렇고······ 지금은 기획일 배우는 데 집중하셔야 할 시기 아닌가요?”
황 대리는 지혁이 신입사원인 걸 생각했다.
“제가 요청 드린 것에 대해 가능 여부만 알려주시면 돼요.”
“······.”
지혁은 생각했다.
‘내가 기획팀에 있으니, 눈대중으로 관찰해서 배울 수 있지만, 생산은 그럴 수가 없어. 생산을 배워두면 제품 구성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으니, 분명 가치가 있을 거야.’
배 터지게 얻어먹고, 집에 가져갈 회 포장까지 받은 상황에서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아, 뭐. 알겠습니다.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매일 저녁 6시 10분에 뵐게요.”
“네······ 네?!”
지혁은 묵례 후 먼저 돌아섰다.
***
복직한 지 2주가 지났다.
상품기획1팀이 있는 A 구역에서는 첫 한 주일 동안은 매일 한 두 차례 정도 고성 소리가 오갔는데.
2주 차부터는 고성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단 2주 만에 완벽하게 장악이 된 것이다.
‘오지혁’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10층 A 구역에서는 명성이 자자했으며.
아무도 이 ‘미친 또라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10층 A 구역에서는 그 누구도 무섭지 않은 ‘오지혁 사원’은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런 지혁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상입니다.”
인사팀 배진수 대리가 관찰 보고를 했고, 보고 받은 후 인사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잘 지낸다는 거야. 못 지낸다는 거야?”
오지혁은 선도물산에서 보기 드문 ‘병가휴직 복직자’다. ‘직장 내 따돌림’이나 ‘직장 내 괴롭힘’을 겪지 않을지 인사팀에서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모수가 적은 경우, 그게 대표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인사팀 입장에서는 지혁이 문제를 겪지 않고, 잘 적응하는 게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경력자 오리엔테이션도 보낸 것이다. 물론, 복직 희망 부서에 자리를 만들기 위해 시간 벌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못 지내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배 대리가 대답하자, 인사팀장이 물었다.
“이게 혹시 따돌림당하는 건 아니지?”
“저도 애매해서 주변 사람 얘기도 들어보고 좀 더 자세히 관찰했는데, 따돌림을 당한다기보다는······.”
배 대리는 한 번 더 생각하고, 머뭇거리며 말했다.
“시키는 것 같습니다.”
“따돌림을 시킨다고?”
“네, 말이 좀 이상하죠. 근데, 그 외에는 적당한 표현이 없어서.”
“팀에서 혼자 노는데, 따돌림을 시키고 있다라······.”
말만 들어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팀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병가휴직 후 복직한 지 이제 2주 지났어. 그게 말이 돼? 사원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인사팀장은 생각했다.
‘심 팀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데. 그 미친개를 잡았다고?’
“확실한 건 지금 걱정해야 할 사람은 오지혁씨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얼핏 지나가면서도 봤는데, 심 팀장 몰골이 요즘 말이 아니더라고요.”
‘오지혁. 오지혁이라······.’
인사팀장은 머릿속으로 오지혁의 이름을 되뇌었다.
“원래 이렇게 좀 빡센 친구였나?”
“아니요. 아주 밝고 쾌활한 친구였습니다. 저도 복직 전 미팅하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좀 의아했었습니다.”
“흠······ 그래.”
‘완전 사람이 달라졌다는 얘긴데. 병가 휴직 동안 뭘 하고 지냈던 거지?’
“그러고 보니 오 씨네? 회장님이랑 같잖아.”
“네.”
선도그룹 직원만 22만 명.
이 중에 오 씨는 엄청나게 많다.
인사팀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배 대리.”
“네.”
“그 친구 본관이 어디인지 알아?”
“잠시만요.”
배 대리는 인사기록 카드를 검색해 본 후 말했다.
“오 씨가 이런 본관도 있군요.”
“어딘데?”
“연일 오 씨네요.”
인사팀장은 눈을 부릅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