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가능성이 있다면 (2)
“연일?!”
인사팀장은 기겁하여 소리쳤고, 배 대리는 움찔했다.
‘내가 뭐 잘못했나? 화면에 나온 대로 읽은 것밖에 없는데.’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어서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본관: 연일’
분명 ‘연일 오 씨’다. 해주, 보성, 동복도 아닌 연일 오 씨.
“네······ 다시 봤는데, 본관이 연일로 적혀 있습니다.”
“어디 봐봐.”
인사팀장은 기어이 직접 확인하려 했고, 화면을 본 후 불안하게 눈알을 움직였다.
‘역시······ 느낌이 이상하다 싶었어.’
선도 물산의 인사팀장.
사람 보는 촉 하나는 이 회사의 전문가다. 지혁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뭔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연일 오 씨였던 것이다.
“와······ 이걸 왜 이제 알았지. 배 대리! 이런 건 진작 확인하고 얘기를 해줬어야지!”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지······.”
인사팀장은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 회장님이 연일 오 씨잖아!”
“······.”
배 대리는 의아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그룹 직원 수가 22만 명인데. 그중에 본관이 같은 사람 있다는 게 이상한 일인가?’
인사팀장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배 대리의 얼굴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자네는 연일 오 씨가 우리나라에 몇 명인 줄 알아?”
“글쎄요.”
“천 명도 안 돼.”
“······.”
“천 명이 뭐야. 오백 명도 안 될걸?”
배 대리는 인사팀장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렇게 희귀한 성씨라면······ 혈연관계일지도 모른다는 걸 말하는 건가? 그리고 아무리 인사팀장이라지만,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고 있지?’
배 대리의 뚱한 표정을 보며 인사팀장이 말했다.
“이 사람아. 그룹 인사팀이 오너 일가에 관련해서 웬만한 건 다 알아야지. 회장님 본관은 인터넷에도 나오잖아. 딱 봐도 특이한데, 그런 거 알아볼 생각도 안 해봤어?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아······ 네. 전 거기까진 생각 못 했습니다.”
“난 눈에 띄는 신입사원 있으면 인사기록 카드를 자세히 본단 말이야. 그게 기본이야.”
“네······.”
‘근데 왜 오지혁 씨는 발견 못 하셨던 걸까?’
그에 대한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그 친구 입사 때 등수가 10등 안에 안 들지?”
“네, 중간 정도입니다.”
“그래서 내가 놓쳤었군.”
인사팀장은 손톱을 뜯으며 생각에 잠겼고, 배 대리는 잠자코 앉아서 기다렸다.
“배 대리, 오너 쪽에서 특별한 지시가 내려온 건 없었거든?”
“네.”
“일단은 계속 예의주시하며 지켜봐. 아무한테도 이 얘기는 하지 말고.”
“······.”
배 대리의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고, 인사팀장이 말했다.
“그래, 그냥 우연의 일치일지도 몰라. 하지만 확률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일이니까. 내가 무슨 얘기 하는지 알지?”
인사팀장은 콕 집어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배 대리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오지혁 님 행동 예의주시하고, 그분 회사생활에 위협이 되는 일이 있으면 자네가 지혜롭게 잘 처리해.”
어느샌가 인사팀장은 지혁을 존칭하여 부르고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네, 보고 드리겠습니다.”
***
이틀 뒤면 팍스버거 콜라보 제품 납품일이다.
대성실업으로 요청받은 날짜보다 하루 빠르게 움직였다.
지혁은 매일 황 대리에게 제품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확실히 믿는 사람이라면 맡기고 위임하는 스타일이지만, 황 대리의 업무 능력을 아직 믿지 못했다.
또한 매일 저녁 그에게 과외를 받고 있으니,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5시 59분.’
쓸데없이 야근 좋아하는 심 팀장 아래 상품기획 1팀은 항상 늦게 퇴근하는 분위기였다.
지혁은 상품기획1팀에서 항상 일등으로 퇴근했고, 그로 인해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어갔다.
아무리 독고다이로 회사생활 하는 막내라도 가장 일찍 퇴근하니 자극이 되었고, 정 과장과 장 과장도 7시 전에는 퇴근했다.
‘6시 땡.’
지혁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가볼게요.”
“어, 그래.”
근데 지혁은 바로 가지 않고, 심 팀장을 유심히 바라봤다.
“왜, 왜에? 뭐 할 말 있어?”
심 팀장은 쫄리는 기분을 느끼며, 말을 더듬었다.
“우리는 뭐 회식 같은 거 안 하나요? 그래도 막내가 1년 쉬고 돌아왔는데.”
“뭐?”
심 팀장은 생각했다.
‘이 새끼가 무슨 꿍꿍이지.’
심 팀장은 어떻게든 지혁의 약점을 찾아내려고 요즘 안간힘 중이었다.
지혁과 함께 회식했다가는 분명 체할 것 같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당연히 해야지~ 요즘 다들 바쁘잖아. 시기를 보고 있었어. 팍스버거 콜라보 끝나고 난 후, 날짜 한번 보자고.”
피식.
지혁은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웃었고.
심 팀장은 움찔했다.
지혁은 꼭 이렇게 웃고 난 뒤, 심 팀장 가슴을 후벼파는 날카로운 말을 뱉었었다.
“갑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날이 아니었다.
“휴우-”
심 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1층에서 황 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 후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카페로 이동하여, 매일 저녁에 1~2시간 정도 ‘생산’업무에 대해 배웠다.
‘실력은 남들 모르게 키워야 한다.’
지혁이 ‘그 세계’에서 살아남았던 방식 중에 하나다.
모르게 실력을 키워야, 견제 받지 않으며 주변을 방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적절한 시기에 큰 기회가 찾아 온다.
“뭔 일 있죠?”
오늘따라 황 대리는 굳은 표정으로 지혁을 맞았다.
지혁은 굳이 이마를 통해서 색을 보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감정 변화 정도는 표정만 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 또한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훈련된 것이다. 뒤에도 눈이 달려야 살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지혁 씨.”
“네.”
“제품 내일까지 준비시키기로 했잖아요.”
“······.”
황 대리는 지혁이 화낼까 봐 조마조마했다.
“미안한데, 하루만 늦추면 안 될까요?”
약속받은 납품일보다 하루 당겨서 준비했던 거였다. 하루 정도 늦춘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이유는요?”
정말 하루가 될지, 며칠이 더 흘러갈지를 알기 위해 원인 판단이 중요했다.
“이 회사는 물류센터에 입고 예정 통보를 일주일 전에 해야 한대요. 이전 회사에서는 3일 전에 하면 됐거든요.”
“······.”
“죄송합니다. 어제 입고 예정 통보를 했는데, 전산에 뜨지를 않아서 확인해 봤더니.”
황 대리는 지혁의 눈치를 봤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긴장하고 있었는데.
“방법이 있겠죠?”
지혁은 화내지 않았다.
황 대리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물류 팀에서 허락을 해주면 예외처리가 가능한데······.”
“······.”
“제가 전화로 사정 설명드리고 애를 써봤는데, 허락을 안 해주시네요.”
“왜죠?”
“이런 사례가 한, 두건인 줄 아냐며······ 예외를 두면, 질서가 서지 않는다고요. ”
“지랄하고 있네. 지가 귀찮아서 그런 거지.”
황 대리가 식겁한 표정을 짓자, 지혁이 말했다.
“황 대리님한테 한 말 아닙니다. 일단 알겠고요.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
“하루 늦어지고 말 일이면 두겠는데, 그렇게 보이지가 않네요.”
황 대리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오전까지 물류 팀 연락을 기다려본 후에, 아니다 싶으면 직접 찾아가 볼 생각입니다.”
지혁은 시계를 본 후 말했다.
“어차피 지금 가면 다 퇴근하고 없겠네.”
“······.”
“내일 아침 일찍 저랑 함께 가죠. 지체해서는 안 될 일 같네요.”
“지혁 씨도 간다고요? 아~ 안 그래도 됩니다. 저 혼자 내일 일찍······.”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황 대리의 말을 끊었다.
“못 믿겠어요.”
“······.”
“반드시 되어야 하는 일이거든요. 일 처리 하시는 모습을 봤을 때, 믿음이 안 가네요.”
지혁의 돌직구에 황 대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난하거나 화내는 거보다 더 기분이 상했다.
“죄송합니다.”
지혁은 앞장서서 회사를 나가며 말했다.
“동일한 실수를 하시면 안 돼요.”
***
다음 날 아침.
황 대리의 자가용으로 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선도물산 물류센터로 향했다.
지혁은 습관적으로 안 주머니의 칼자루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운전 중에 황 대리는 그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뭐 만지시는 거예요?”
“별거 아닙니다.”
방해하지 말라는 거다.
황 대리는 실수했다는 생각에 바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묵묵히 운전만 했고, 고속도로를 나와 지방도로로 진입한 지 얼마 안 되어 지혁이 말했다.
“저기 마트에 차 좀 세우죠.”
“네? 아, 네.”
지혁은 마트에 있는 음료 세트를 거의 다 샀는데, 거의 20만 원 상당의 금액이었다.
그리고 그걸 지혁은 개인카드로 긁었다.
“뭐 하세요?”
“전투에 나서는데 맨손으로 갈 수 있나요.”
“근데 왜 법인카드 두고······.”
“경비처리 어려울 것 같아서요. 귀찮기도 하고.”
“······.”
황 대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씀씀이가 달라. 저번에 횟집에서도 그렇고······ 한번 쓰면 무조건 크구나.’
하지만 지혁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그 세계’가 오면 쓰레기가 될 돈. 쓰는 거야 아깝지 않았지만.
‘수아한테 또 한 소리 듣겠네.’
아내의 잔소리 듣는 건 좀 신경 쓰였다.
“뭐 하세요? 어서 가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물류센터에 도착했다.
황 대리는 트렁크 자리도 모자라, 뒷좌석까지 가득 채운 음료를 보며 물었다.
“다 내릴까요?”
“잠시만 기다려요.”
재혁은 차에서 내린 뒤, 재빨리 물류센터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일단 어떤 놈인지 봐야지.’
일용직 직원들에게 물어서, ‘스타덕’ 물류 담당자를 찾았다. 얼굴을 확인 후, 다가가지 않고 멀찍이서 바라만 봤다.
몸이 두꺼운 짧은 머리 모양의 남자가 현장을 돌고 있었는데.
지혁은 그의 이마를 주시했다.
‘남색.’
지혁의 기억에 ‘남색’을 띄는 사람은 룰을 중시하며 권위적이다.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사람에게는 호의적으로 대한다. 직속 상사 외의 사람이 권위로 누르려 하면 부작용이 일어난다.
‘황 대리 얘기 듣고 짐작은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네. 이 남자와 관계 정리는 급한게 아니니까. 지금은 필요한 것만 얻자.’
지혁이 물류센터에서 돌아오자, 황 대리가 물었다.
“화장실 갔다 오신 거예요?”
지혁은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지금부터 사 온 음료수 여기 일용직 포함하여 보이는 사람 모두에게 다 뿌리는 거예요. 친절한 인사말과 함께.”
“친절한 인사말? 저희 오늘 싸우러 온 줄 알았는데.”
평소 지혁의 모습을 생각했을 때, 난리를 친후 달래줄 목적으로 음료수를 산 줄 알았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게 오늘 싸움 방식입니다. 서두르세요.”
황 대리는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일단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혁과 황 대리는 물류센터를 돌며 선거 인사 하듯 음료를 돌렸다. 수고한다고 고맙다며 친절하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침부터 기분 좋아진 직원들 덕분에 물류센터는 활기를 더해갔고.
수군거림에 이끌려 물류 담당자는 자연스럽게 지혁과 황 대리를 찾아왔다.
그 옆에는 부사수로 보이는 젊은 남자도 있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지혁은 물류 담당자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음료수를 건넸다.
“스타덕 물류 담당자님 되시죠?”
“그렇습니다만.”
해맑은 미소와 함께 건네는 굿모닝 음료수.
물류 담당자는 표정이 누그러지며 지혁이 건네는 걸 받았다.
“현장에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저희는 본사에서 왔어요~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마실 것을 좀 사 왔습니다. 하하.”
평소의 지혁과 완전 달랐다.
안면을 싹 바꾸고 사람 좋게 웃고 있었는데.
황 대리는 기괴한 무언가를 본 것 마냥 지혁을 바라봤다.
‘뭐지, 이게 더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