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생각보다 쉽다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별거 아닌 이 말 한마디에 물류 담당자는 경계심이 풀렸다. 통상 본사에서는 물류를 하청 취급 하듯 대했었기 때문이다.
물류 직원 대부분은 일용직 근로자이며, 정직원은 몇 되지 않는다.
정직원 또한 대부분 계약직이며, 정규직은 은퇴할 시기가 되어 본사에 갈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온다.
즉, 선도물산에서의 물류 팀은 귀양 보내는 외딴 섬 같은 부서였다.
간혹 본사 직원들이 오면 그걸 의식해서인지 고압적인 자세로 물류 직원들을 대했었다. 그마저도 아쉬울 때나 찾아왔었고.
지혁처럼 예의를 갖추어 처음부터 숙이고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아니 없었다.
“생산팀에서 오셨습니까?”
물류에 오는 대부분의 본사 직원들은 생산팀이다. 물류 담당자의 물음에는 황 대리가 대답했다.
“아, 네. 저는 이번에 경력 입사한 생산팀의 황성준 대리라고 합니다. 옆에 계신 분은 생산팀은 아니시고요······.”
황 대리가 소개하려는데, 지혁은 손을 들어 제지하고는 말했다.
“저는 상품기획 1팀에 있는 오지혁이라고 합니다.”
“상품기획 1팀이요?!”
물류 담당자는 놀랐다.
‘핵심 부서잖아? 거기서 왜 물류까지······.’
지혁은 그의 표정을 살핀 후, 곧바로 악수를 청했다.
"처음 뵙네요."
“아, 네······ 전 스타덕 물류 담당 문규태 대리라고 합니다.”
“네. 문 대리님. 잘 부탁드려요.”
문 대리는 지혁의 손이 무겁기라도 한 듯, 공손하게 잡았다.
“아침에 바쁘실 텐데, 방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너무 불쑥 찾아왔습니다.”
“아닙니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타이밍.
지혁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생각해 두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진정성 있게, 간절하게 접근한다.’
“스타덕에서 이번에 팍스버거와 콜라보 테스트 오더를 진행합니다.”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상품전략실에서도 물류에 제품 입고되었는지 확인 연락이 와서요.”
예상치 못한 정보에 지혁은 약간 움찔했다.
‘날 통하지 않고, 따로 확인도 하고 있었던 거야?’
약간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지만, 본인 직급이 ‘사원’이며 점퍼 아이템 기획은 처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긴 못 미더울 만 하지.’
지혁은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저희 생산 담당님이 아까 소개할 때 말씀드렸지만, 경력 입사한 지 이제 2주 차시거든요. 물류 입고 예정 시스템에 대해 잘 모르셨더라고요.”
“아······.”
“뒤늦게 입고 예정 통보를 했던데, 중요한 건이라 이번만은 좀 예외처리를 해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부탁 드리려 찾아왔습니다.”
“음······.”
물류 담당자는 잠시 생각했고, 그 옆에 있던 다른 담당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문 대리님이 예외처리 해줄 리가 없지. 항상 저렇게 고민하는 척하다가 어렵다고 하잖아. 먼 걸음 하셨는데 안 됐네.’
“그런 일 때문이면 이렇게 멀리까지 찾아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
지혁과 황 대리는 문 대리의 대답을 기다렸고, 옆에 다른 물류 담당자는 괜스레 본인이 미안해서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바로 예외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옆에 있던 부사수가 놀랐다.
‘대리님이 왜 이러시지?’
좀 급한 결정이지 않나 싶은 생각에, 부사수는 문 대리에게 말했다.
“대리님, 팀장님께 먼저 보고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협조부서 앞에서, 내부적인 얘기 꺼내지 마라.”
“아······.”
“필요할 때는 담당이 판단해서 선조치 후보고도 할 줄도 알아야지. 들어보니 급한 일이잖아.”
지혁은 살짝 미소를 띠며 생각했다.
‘내 스타일인데? 기억해 둬야겠군.’
황 대리는 얼떨떨했다.
‘이게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문 대리는 무표정했지만, 지혁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지금 바로 처리할 테니, 아무 염려 마시고 복귀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협조 요청 안 해주셔도 되니까. 다음에도 혹시 이런 일 생기면 전화 주십시오.”
“······.”
“납득 할 만한 일이라면 바로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지혁은 싱긋 웃고는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문 대리님 얘기가 잘 통하네요.”
“그냥 필요한 일을 할 뿐이죠.”
지혁은 생각했다.
‘군더더기가 없군. 현실 세계로 복귀한 이후로 제일 괜찮은 남자를 본 것 같네.’
지혁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더 일 방해되지 않도록 지금 바로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휙-
지혁은 몸을 돌림과 동시에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황 대리는 그 모습을 보며 기겁했다.
‘혹시나 했는데, 진짜 연기였어? 이 남자는 도대체가······.’
“황 대리님. 가죠.”
“아, 네. 알겠습니다.”
***
차 안.
운전한 지 30분째.
두 남자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황 대리는 침묵이 불편한 사람이었지만, 지혁의 눈치를 보며 잠자코 있었다.
“그냥 필요한 일을 할 뿐이라는 말.”
“네?”
갑작스러운 지혁의 말에 황 대리는 반문했다.
“아까 헤어지기 전에 문 대리님이 한 말이요.”
“아······ 네.”
“그 말이 참 마음에 드네요.”
“······.”
황 대리는 옆 눈으로 지혁을 힐끗 보고는 생각했다.
‘자극받으라고 한 말인가? 로열패밀리와 일하고 싶으면 이런 마인드를 가지라고?’
황 대리는 잠시 고민했다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뭘, 알아요?”
“아, 네. 그냥요.”
말이 터진 김에 황 대리는 궁금했던 걸 물었다.
“지혁 씨는 문 대리님이 이렇게 나올 걸 예상했던 거죠? 평소와 완전 다르게 행동하신 걸 보면······.”
“······.”
예상대로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고, 황 대리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까 웃으실 때, 정말 해맑았어요. 진짜, 20대 청년 같아 보이던데. 하하.”
같은 게 아니라, 지혁은 진짜 20대 청년이다.
지혁이 말을 못 하게 할 줄 알았는데 가만히 있자, 황 대리는 신나서 더 떠들었다.
“제가 음료수를 이 정도로 한 번에 많이 사본 건 처음이네요. 와~ 마트에 비타민 500이 많았기에 망정이지, 주스 세트밖에 없었다면 돈이 얼마나 깨질 뻔했어요? 으하하.”
“조용히 갈까요.”
“아, 네.”
황 대리는 다시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본사에 도착해보니, 물류 입고 예외 처리는 완료되어 있었고.
‘스타덕×팍스버거’ 콜라보 테스트 오더는 무사히 완료됐다.
***
상품전략실.
선도물산 패션 영역의 상품기획 전체를 총괄하는 본부다.
모든 상품기획 팀장들은 상품전략실장으로부터 통제받으며, 상품전략실은 실장과 두 명의 전략팀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략팀원은 과장급이며, 실무적으로는 팀장들이 이들로부터 컨트롤을 받는다.
실장은 큰 그림만 제시하고, 전략팀원으로부터 보고받고 컨펌만 한다.
하지만 간혹 관심 있어 하는 일에는 직접 관여를 하기도 하는데······.
“오호~ 그래?!”
“네! 실장님. 팍스버거에서 제품에 대만족했다며, 그쪽 마케팅 팀장님께서 직접 메일 보내셨습니다.”
“오케이~ 좋아.”
‘상품전략실 유남혁 실장’
그는 자신 책상 위에 놓인 명패를 만지며 물었다.
“그럼, 올해 F/W 콜라보 건은 어떻게 됐나? 분위기 좋을 때 말 꺼내야 하거든. 우리 계획에 대해 확실히 승인받았나?”
스타덕은 F/W 시즌에 팍스버거 콜라보 라인 설계 중이며, 점퍼부터 니트까지 전 복종을 아울러 10만 장 정도의 수량을 기획하고 있다.
“네, 실장님. 안 그래도 메일 받자마자 바로 통화했고요. 그쪽에서 흔쾌히 협의해줬습니다. 원안대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굿!”
유 실장은 이 콜라보 건이 마켓을 흔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여러 스포츠 브랜드 중에, 스타덕이 유독 콜라보 라인이 약했었다.
누구나 뻔하게 생각하는 것 말고, SNS에서 핫한 프랜차이즈와의 콜라보를 그렸다.
원하는 결과는 확인됐고, 과정이 궁금해졌다.
의심 많고, 까칠하게 굴던 팍스버거였다. 협의가 끝난 마당에 테스트 오더까지 요청할 정도였으니까.
“갑자기 왜 그렇게 협조적으로 바뀐 거야?”
“네, 저도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팍스버거 마케팅 담당자가 제품 자체에 만족한 게 컸다고 합니다.”
“그래? 뭐 특별한 게 있었나?”
“아닙니다. 그냥 일반 바람막이 점퍼에 앞 여밈도 지퍼가 아니라 썬그립으로 했습니다.”
“응? 썬그립?”
“네, 확인해보니 납기 맞추기 위해 그렇게 협의해서 진행했다고 하네요.”
유 실장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옷 가지고 있나?”
“네.”
“가지고 와봐.”
잠시 후, 전략 팀원 백이재 과장이 콜라보 바람막이 점퍼를 가지고 왔고.
옷을 보고 유 실장은 기겁했다.
“뭐야, 이게.”
“······.”
점퍼 앞 여밈은 선그립으로 되어 있고, 앞가슴에는 대문짝만하게 ‘팍스버거’로고가 붙어 있다.
등판에는 더 큰 팍스버거 로고가······.
이건 콜라보가 아니라, 팍스버거 알바생들이 입는 근무복에 가까웠다.
스타덕 제품이란 걸 알아볼 수 있는 건 라벨뿐이었다.
“완전 개판이잖아.”
이런 수준의 옷에 ‘스타덕 라벨’이 붙어 있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근데, 팍스버거 측에서는 만족한다고?”
“네······ 너무 좋아합니다.”
유 실장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미친······.’
얼굴이 시뻘게져서 물었다.
“이 스타일 기획자가 누구야?”
“그게······.”
“왜 뜸을 들이나? 묻는 말에 대꾸만 하면 되지.”
“오지혁 사원이라고 합니다.”
“오지혁? 그게 누구야? 윤현성 차장이 한 거 아니야?”
스타덕의 점퍼 담당자는 윤 차장이다. 유 실장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병가 휴가 갔다가 이번에 복직한 직원인데요······.”
“복직?!”
생각해 보니, 들은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직원들 전입 보고를 받기 때문에.
“근데 왜 걔가 콜라보를······.”
“모르겠습니다. 심 팀장님 지시가 있었겠죠?”
“심 팀장? 이 인간이 진짜. 내가 중요한 거라고 했는데!”
백 과장은 이런 유 실장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잘 진행됐는데, 왜 난리지.’
“진행이 잘 되도 이러면 결과 보고를 못 하잖아. 이런 옷을 어떻게 윗분들에게 보고하냐고!”
백 과장은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럼 그렇지. 유 실장답다.’
“당장 심 팀장 튀어오라 해!”
“네, 알겠습니다.”
***
오후 5시 30분.
지혁은 심 팀장 책상에 걸터앉아있었다.
“진작 팀장님이랑 친하게 지낼 걸 그랬네요. 이렇게 편한 분인 줄 몰랐어요.”
“으응······ 그래.”
“콜라보 테스트 오더 건도 끝났는데. 오늘 회식하나요?”
심 팀장은 속으로 짜증이 났다.
‘이 새끼는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자꾸 회식 타령이지.’
“오늘?”
“쇠뿔도 단김에 빼죠.”
“······.”
심 팀장은 지혁의 얼굴을 힐끔 봤다.
‘이 얘기 때문에 자꾸 찾아오는 것도 짜증 나네. 얘랑 자꾸 마주치기 싫어. 빨리하고 끝내자.’
“그러지 뭐! 하하. 모두 주목해. 오늘 저녁에 팀 회식한다. 열외 없음!”
“······.”
회식한다는 말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꼰대 팀장, 무시무시한 막내와 함께 회식 자리를 갖고 싶지는 않았다.
위이잉-
심 팀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상품전략실 백이재 과장.’
수신자를 확인 후, 심 팀장은 지혁에게 말했다.
“자 됐지? 이제 자리로 가주면 안 될까?”
“그러죠.”
지혁이 자리로 돌아간 뒤, 심 팀장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 실장님 호출입니다.]
“지금요?”
[네, 바로 올라오시랍니다.]
“알겠습니다.”
뚝. 전화를 끊은 후.
평소 팀원들이 앞에서는 못 하지만, 뒤에서 심 팀장을 향해 종종 했던 말을 똑같이 했다.
“제기랄, 퇴근 30분 남았는데. 매너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