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그래봐야 거기까지 (2)
‘오지혁 사원에게는 경고장을 날릴 수 없다고?’
유 실장은 방금 백 과장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사유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도 아니고, 그렇게 콕 집어서 오지혁에게 경고장 못 준다고······ 그렇게 말을 해?”
“네, 분명히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뉘앙스가 좀 이상하긴 하죠."
‘뭐지······ 병가 휴가 다녀온 직원이라 그런 건가. 아직 적응 기간이라?’
유 실장은 인사팀의 저의를 곰곰이 생각했다.
‘하긴, 복직한 지 2주 지났으니까. 업무 미숙 때문에 경고장을 날린다는 게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
유 실장은 평소에 협조부서가 자기 뜻대로 안 움직이면 바로 찾아갔었다.
하지만 인사팀은 다르다.
인사팀장은 유 실장보다 직급이 낮지만,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다.
유 실장의 인사권자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인사팀에서 명확하게 입장을 밝혔는데.”
“······.”
그렇다고 해서 이유도 모르고 물러나기엔 유 실장은 자존심이 상했다.
‘건방진 자식. 그래도 상급자한테 전화해서 사유는 얘기하면서 거절해야 하는 거 아니야?’
“가만있어 봐. 통화 좀 해보고.”
“네······.”
유 실장은 곧바로 인사팀장에게 전화했고, 백 과장은 화장실 간다며 자리를 비켰다.
[네, 실장님 안녕하세요.]
[어~ 인사팀장님. 나 유 실장이에요. 통화 오랜만에 하네?]
[하하. 네.]
[요즘엔 왜 실장실에 안 들려요? 차도 한잔하러 오고 그러지. 회사 돌아가는 얘기도 좀 듣게.]
[저도 가고 싶죠~ 근데 최근 신입, 경력 입사 철이라서 정신없었어요.]
[아~ 그래요?]
[네네.]
[바쁜 시기 지나면 저녁이나 같이 한번 하자고요.]
[네~ 저야 유 실장님과 함께라면 언제든 좋죠.]
별 쓰잘데기 하나 없고, 알맹이 없는 빈말 대잔치를 한동안 벌이다가.
유 실장이 슬금슬금 본론을 꺼냈다.
[아, 그리고 말이에요. 내가 인사팀에 경고장 발부 요청한 건이 있는데~]
주어는 빼고 말했다. 인사팀장은 당연히 유 실장이 뭘 말하려 알고 있었지만, 지나가듯 생각난 것처럼 대꾸했다.
[아······ 아아~ 좀 전에 배 대리한테 보고 받았어요. 거······ 누구더라? 오 사원? 맞나? 오지혁 사원 건 말씀 하시는 거죠?]
[맞아요. 오지혁 사원이 맞는 거 같네. 그 친구에게 경고장 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나야~ 인사팀 가이드 라인 칼같이 따르지만~ 궁금해서 그래요~]
[아~ 네~]
두 남자는 메시지를 하나 던질 때마다 말을 돌리고 돌렸다.
[음~ 우리 인사팀 배 대리가 반려하자고 하길래. 저도 궁금해서 내용을 살펴봤거든요. 그 친구가 복직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사원이잖아요. 이번 일은 유 실장님께서 너그럽게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
[그리고 좀 애매한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미숙한 부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어려운 건을 해결한 건데······ 팍스버거 담당자가 그렇게 비협조적이었다면서요.]
[그걸 인사팀장이 어떻게 알죠?]
유 실장은 통화 내내 좀 이상했다.
지금 인사팀장이 말한 반려 사유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상품전략실 내부 사항을 인사팀장이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잘 모릅니다. 인사팀에 있다 보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얘기가 많다 보니까요. 뭐 그냥 대충······.]
인사팀장이 명확하게 말은 안 하지만, 유 실장은 느꼈다.
‘뭔가 있다.’
회사 짬밥 몇 년인데, 이 정도 눈치도 없겠는가.
마지막으로 한번 살짝 떠봤다.
[인사팀장님. 지금 얘기하신 반려 사유가 다인가요? 우리끼리니까. 혹시 더 해줄 얘기는 없으신지? 저 지금 사무실 혼자 있어요.]
[네?! 하하. 무슨 이유가 더 있겠습니까. 그게 다입니다.]
그때 마침 백 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래요. 그럼 수고하시고. 인사팀 지침 따를게요.]
[하하. 역시 유 실장님 마음이 넓으십니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십시오~]
뚝.
유 실장은 전화를 끊은 후 생각했다.
‘조만간 인사팀장이랑 자리 한번 가져야겠어. 하여간 이 능구렁이.’
“저, 실장님?”
백 과장은 유 실장이 전화를 끊은 걸 보고 다가왔다.
“어, 왜?”
“그럼 오지혁 사원 건은 어떻게 합니까?”
“뭘 어떻게 해! 넘어가야지.”
“네, 그럼 그렇게 심 팀장님께 전달하겠습니다.”
백 과장이 전화기를 들려는데, 유 실장이 한마디 했다.
“팍스버거 콜라보 담당자는 교체하라고 해!”
“네.”
***
퇴근 시간 직전에 상품전략실에 모두 불려가서 까였지만.
계획대로 회식은 진행되었다.
심 팀장의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하. 오랜만에 다 함께 자리 가지니 좋구만.”
유 실장에게 불려갈 때만 해도 똥 씹은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그 이유가 지혁이 문책받은 것 때문이란 건 팀원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진짜 속 보인다. 하여간 진짜 밉상이라니까.
-아무리 싫어하는 팀원이라도, 팀장이라는 사람이······.
심 팀장을 뒤따라가며 팀원들은 수군거렸고, 지혁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삼겹살집으로 들어갔고, 지혁은 고기를 좋아하진 않지만 여럿이 있는 자리이기에 취향을 따지진 않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심 팀장은 폭탄주부터 돌렸다.
“자~ 모두 한 잔씩 쭉 해~”
지혁은 술잔을 밀면서 말했다.
“전 술을 못 해서요. 물로 대신할게요.”
“어? 자네 술 잘 마셨었잖아?”
원래 지혁은 술을 즐기기도 하며, 주량도 센 편이었다.
“지금은 안 마셔요.”
“그러니까,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신다는 거지?”
“······.”
“마셔~ 괜찮아~ 다 같이 마시는 자리에서 안 마시는 사람 있으면 술맛 떨어져.”
“감당할 수 있으세요?”
“뭐?”
지혁의 짧은 물음에 심 팀장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아······ 젠장. 내가 왜 이렇게 새 가슴이 됐지.’
“감당?! 하하. 할 수 있지! 집에 잘 보내줄 테니, 걱정 말고~”
심 팀장은 두려움을 없애려고 일부러 호기롭게 말했는데, 지혁은 피식 웃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
“술 마시면 제가 좀 거칠어지거든요. 오늘 기분이 더러워서······ 조심하고 싶은데.”
꿀꺽.
심 팀장의 목울대가 움직였고.
다른 팀원들도 식겁했다. 지난 2주간 지혁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봐왔기에.
정 과장이 나섰다.
“하하. 팀장님~ 요즘은 술 권하는 분위기 아니에요. 지혁이는 물 마시라고 하죠.”
“으응? 그래? 요즘은 그런 분위기 아니야? 아~ 맞다! 아니지?! 하하!”
그렇게 지혁은 물을 마시며, 회식은 시작되었다.
처음엔 회식 자리를 싫어하던 팀원들도 술 한잔 들어가니, 다들 밝게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도 지혁은 외딴 섬 같았다.
같이 앉아는 있지만, 칸막이로 구분된 느낌.
어느덧 2시간여가 흘렀고.
지혁만 빼고 다들 취기가 올랐다.
“오지혁이는 술 아예 끊은 건가?”
심 팀장의 물음에 지혁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술은 집에서만 마셔요.”
“왜?”
“······.”
술 한잔하다 보면 빠르게 친해진다. 근데 술로 연결된 친밀도는 신속하게 사라진다. 특히 비즈니스 관계에 있어서는.
‘그 세계’에 살아갈 때, 운 좋게 술이 발견되면 밤새 즐겁게 마시고, 다음날 뒤통수를 맞은 경우가 많았다. 골아떨어진 사이 가진 걸 털리거나, 이유없는 개죽음 당하거나.
그런 일을 겪으며 ‘술’만큼은 혼자서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지금 분위기 아주 좋은데, 내일 회사에서도 이렇게 지낼 건가요?”
지혁은 심 팀장과 팀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는데.
그 누구도 대답 하지 않았다. 좋았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하여간······ 맘에 안 들어.”
심 팀장은 이죽거리며 술잔을 비었고.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 잔을 비웠다.
“너 이럴 거면 도대체 회식을 왜 하자고 한 거냐?”
“팀장님 좀 보고 싶어서요.”
“날? 날 봐?”
지혁은 이제 심 팀장의 처우를 결정해야 했다. 허니문 기간은 끝났다. 앞으로 함께 할지······ 아니면 보내버릴지.
처음 복직했을 때만 해도 심 팀장을 이용하다가 적절한 시기에 보낸다고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즘 심 팀장이 얌전히 지내기도 했고, 위협만 되지 않는다면 그대로 둬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종 판단을 위해, 술도 좀 먹여보고 업무 외적인 자리에서 팀원들과 어떻게 관계를 쌓는지 보려고 했던건데.
회식 자리에 오기 전에 결정이 되어버렸다. 유 실장과의 미팅에서 말이다.
“나를 왜 봐?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요.”
“장난해?”
“······.”
“하아~ 이 자식은 하여간, 말을 꼭 묘하게······.”
옆에서 얼굴이 불콰해진 정 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졌나 보죠~”
“에이~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심 팀장은 내일 지혁에게 어떤 처우가 내려질지 기대가 되었다.
‘감봉, 정직까지는 안 가겠지만······ 어쨌든 유 실장의 기분을 건드렸으니까. 그냥 넘어가진 않겠지.’
지혁의 옆 모습을 힐끗 보았다.
‘인마, 내가 회사 경력 20년이다. 사람 잘 못 건드렸어.’
“자~ 한잔해!”
상품기획 1팀은 다 함께 잔을 부딪쳤다.
***
다음 날.
지혁은 출근 시간 5분 전에 정확히 도착했고, 팀원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
사무실이 고요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고요했다.
어젯밤 왁자지껄했던 분위기가 무색하게 말이다.
‘컴다운 하려고 회식을 하는 거 같아.’
지혁은 막 입사했을 때부터 이런 모습이 참 기괴했었다. 대학생 때는 술자리 갖고 나면 다음 날 더 친하게 지냈는데.
회사는 그 반대다. 회식하고 나면 더 서먹해지는 느낌.
“안녕하세요.”
심 팀장은 어색하게 지혁의 인사를 받았다.
“어, 왔어?”
“저 어떻게 됐습니까?”
“······.”
“유 실장님이 뭐 하실 거 같던데.”
“콜라보 담당자 교체하래.”
“그리고요?”
“그리고는 뭐. 그게 끝이지.”
“네?!”
지혁은 정말 의외였다.
‘그렇게 어영부영 넘어갈 인사로 보이지 않던데.’
결정적인 잘못을 한 것은 없지만, 최소한 경고장이라도 받을 줄 알았다.
“진짜 그게 다예요?”
“왜 아쉬워?”
지혁은 찬찬히 심 팀장의 얼굴을 봤다.
‘그래서 아침부터 죽상이었구나. 어제는 신나 죽을 것 같더니.’
“아쉬운 사람은 저 말고 다른 사람 같은데.”
“······.”
뭐라고 대꾸할 용기는 없고, 심 팀장은 어금니 근육만 불끈불끈했다.
지혁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윤 차장에게 딱히 인수인계할 건 없었다. 테스트 오더는 이미 끝났고, F/W는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전 11시쯤.
윤 차장이 심 팀장 가까이 다가갔다.
지혁은 귀를 쫑긋 세웠다.
“심 팀장님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어, 얘기해.”
“아침에 팍스버거 콜라보 상품 구성 건으로 대성실업 담당자에게 연락했거든요.”
“어.”
“미팅 날짜 조율하면서 담당자 교체되었다고 얘기를 했더니.”
심상치 않은 느낌에 심 팀장은 하던 일을 멈추었고.
다른 팀원들도 귀를 기울였다.
윤 차장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기존 담당자만 상대하고 싶답니다.”
“기존 담당자?”
“네, 오지혁 사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