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지금이 중요하다 (2)
쉘터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
한창 전투는 과열되고 있었다.
에이원 캠프는 어느덧 인원수가 많아져 쉘터를 옮겨야 했고.
씨에이치 캠프가 사용하고 있는 종합상가 B동.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에이원 캠프는 이곳을 뺏기로 했다.
“지혁아! 나 지금 진입한다! 엄호해!”
최후에 에이원 캠프의 캡틴이 된 인물, ‘장건’이 건물 뒤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총알이 있을 때는 총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얼마 전 수색 중에 총알을 발견하였고, 이 때문에 우리는 오늘 씨에치캠프를 습격하기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전투 중에 총기를 사용하게 되면, 항상 내가 맡았다.
난 군에서 정식으로 사격술을 배웠던 예비역 병장이고, 특등사수였으며,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 예비군이었다. 몸이 기억한다.
“뛰어!”
탕! 탕! 탕!
아직 췌장암 통증이 있던 시절이었고, 난 등을 구부정하게 말고서는 사정없이 총을 갈겼다.
사람들이 쓰러진다. 이곳에 온 후 맞는 두 번째 겨울. 난 어느덧 ‘죽고 죽이는’ 것에 대한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별 감정 없다. 살기 위해 죽인다. 상대방도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을 뿐. 동정 따위는 이 세계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한동안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씨에이치 캠프는 결국 건물을 비우고 도주했다.
“다친 데 없냐?”
영감님이 다가왔다.
“네 없어요.”
“하여간 명사수라니까. 총질 하나는 기가 막혀.”
날 칭찬하는 이 노인은 에이원 캠프의 최초 캡틴이다. 우리는 그를 영감님이라 부른다.
나이는 모르지만, 외관상 봤을 때는 70세는 넘어 보인다. 이 세계의 특징 중 하나는 대부분 본인의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
그저 노인, 청년, 아이로 구분될 뿐이다.
“지혁이 덕분에 우리 캠프 피해가 거의 없었어.”
“총 덕분이죠.”
장건은 팔에 긁힌 상처를 지혈하며 가까이 다가왔고, 난 그에게 물었다.
“몇 명이나 죽었어?”
“두, 세 명 정도 다치기만 했고. 죽은 사람은 없어.”
대승리. 우리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때도 난 캠프에서 이인자였다.
영감님이 죽은 후 서열 3위였던 장건을 내가 리더로 세운 거였다.
“아오~ 힘들다. 좀 쉬자.”
장건이 옆으로 다가와 앉으려 하기에, 난 그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캠프원들 자리 배치 먼저 시킨 다음에 쉬어.”
“나 지금 건물 진입하느라 겁나 뛰어다녔거든. 그건 네가 좀······.”
난 가만히 장건을 노려보았다. 여긴 계급사회는 아니지만, 위계질서는 아주 확실하다. 이런 세계에서 위계질서가 서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진다.
“알았어, 인마.”
장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밤.
겨울을 보낼 곳을 마련했다는 안도감에 우리는 오랜만에 술 한잔했다.
그래 봐야 당연히 난방시설 따위는 없고, 북서풍의 차가운 바람을 막아줄 탄탄한 벽과 문이 있는 정도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술기운이 오르자, 영감님은 여느때처럼 옛날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신혼여행을 하와이에 갔었거든? 와이키키 해변이 진짜 멋졌었지. 술 한잔하니까 그때 생각나네. 참 행복했었는데.”
하와이는 그와 술 마시면 종종 나오는 단골메뉴다.
“신혼여행이 뭐예요?”
장건의 물음에 영감님은 측은한 눈길로 바라봤다. 장건은 세상이 멸망한 뒤에 태어났고, 지금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모른다.
“결혼 기념으로 함께 여행 가는 걸 신혼여행이라고 해.”
“기념으로 여행을 가? 죽으려고?”
설명하자면 길어질 것 같아서 난 더 대꾸하지 않았다.
영감님은 날 바라봤다.
“지혁이는 과거에서 왔다고 했잖아. 아내도 있다고 했었고.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었니?”
“못 갔어요.”
“왜?”
“상황이 맞지 않아서요.”
난 취업하자마자 결혼을 했었고, 금전적인 문제에 시기상 이런저런 눈치가 보여서 짧게 국내 여행을 갔었다.
그걸 신혼여행이라고 하기는 좀 뭐 했다.
“저 때만 해도 비행기 삯이 아주 비쌌거든요.”
“그래?”
영감님은 평화의 시대를 잠깐 경험했는데, 그가 살던 시대에는 비행기 삯이 말도 안 되게 저렴했다고 들었다.
“하긴, 당시 우리 할아버지가 요즘은 해외여행 다니기 좋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었지.”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지만, 내가 그보다 더 과거의 세계를 살았었다.
“와이키키 해변에서 포케(회무침요리)와 함께 금빛 석양을 볼 수 있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아마도 이번 생에는 힘들겠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알고 있다.
바로 다음날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막막한 현실과 고령인 그의 나이를 생각할 때······.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면 더 신나게 놀았을 텐데. 여러 여자와 연애도 실컷 하고, 결혼 후에는 아내랑 멋진 곳 많이 다니고. 맛있는 음식, 좋은 물건······.”
“······.”
“쥐 새끼나 들락거리는 저런 흉물 사겠다고 허리띠 졸라맸던 시기가 너무 아깝다.”
영감님은 멀리 보이는 회색빛의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았다.
“더 놀았어야 했는데. 그게 제일 아쉬워.”
***
지혁은 오늘 수아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감정이 격해져 있을 때는 말이 안 통하기에 가만히 있었지만.
침대에 누워 ‘그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영감님 말이 맞아.’
지혁은 미래를 위해 현실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수아가 침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내 카드 누가 그렇게 막 쓰고 다니래? 너 원래 착실했었잖아? 왜 이렇게 씀씀이가 헤퍼진 거야?”
“······.”
“그리고 업무에 쓰는 건 경비 카드를 써야지. 왜 개인카드를 쓰냐고. 갑부야?”
세 번 정도 들은 얘기였으나, 지혁은 묵묵히 또 들었다.
약간 시끄러울 뿐, 조금도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 세계’에 살면서 몸만 강해진 게 아니다. 멘탈도 엄청나게 세졌다.
한동안 잔소리 2차전을 듣다가 잠잠해지자, 지혁이 말했다.
“수아야.”
“왜?”
“돈 아껴서 뭐 하게?”
“뭐하긴? 언제까지 월세 살 거야? 계속 남의 집에 얹혀살고 싶어?”
“내 집 가지면 뭐 달라져?”
“뭐?”
“내가 ‘그 세계’에 대해 얘기했었지. 이거 다 쓸모없다니까.”
“······.”
“꼭 세상이 멸망할 거라서 하는 소리만은 아니야. 지금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지. 왜 쓸려고 번 돈을 쟁여 놓냐고. 둘이 맞벌이까지 해가며 거지같이 살아야 해?”
두 사람 다 어릴 적부터 착실하게만 살았다. 열심히 공부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수아는 혼란스러웠다.
돈 모으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혁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는 게······.
‘간혹 말했던 그 세계 얘기가 설마 진짜일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사람 가치관이 이렇게 확 뒤바뀔 수가 있겠어.’
지혁은 계속 이야기했다.
“그리고 음······ 이건 좀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그 세계’에서 죽으려는 자는 살고, 살려는 자는 죽었었다. 그리고 에이원 캠프에서 명성을 쌓으니 자연스럽게 늘어갔던 동료들을 떠올렸다.
“원하는 건 죽자고 쫓는다고 오는 게 아니더라고.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거지.”
“돈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따라붙어? 죽자고 쫓아도 도망가는 게 돈이던데.”
“······.”
지혁은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생각을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수아를 살살 달래었다.
“어쨌든 하와이 여행은 가기로 하자. 여름휴가는 가야지.”
“······.”
“나 병간호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었잖아. 그동안 고생한 우리를 위한 선물이라 생각하고.”
수아의 표정은 좀 누그러졌다.
“번 건 지금 즐겁게 쓰자.”
지금 말은 고맙긴 했지만, 수아 입장에서는 이런 남편이 좀 걱정되었다.
“그래, 여행은 가기로 해. 근데, 앞으로도 이럴거야? 이런 식으로 살면······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 어쩌려고?”
지혁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젊음이 다 사라진 후에 돈만 남는 게 과연 좋을까?”
“몰라. 난 나이 들어서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이야기.
‘그 세계’를 수아가 봤다면 이해가 빠를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지혁은 이제 그만하기로 했다.
“그래, 당신 말도 맞어. 이제 자자.”
지혁은 수아를 꼭 안아주었다.
***
아내와 평화롭지만 심심한 주말을 보내고.
행복한 월요일.
지혁은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회사생활 참 재밌어.’
만원 전철엔 월요병에 걸린 좀비 몰골의 사람들. 하지만 지혁의 얼굴엔 생기가 넘쳤다.
지혁은 회사에 올 때면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1층 로비에 발을 딛는 순간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이 긴장감이 너무 좋아.’
앞으로의 계획과 그에 따른 반응들이 너무 기대되었다.
그리고 오늘, 그동안 구상했던 걸 본격적으로 움직여 볼 생각이라 더 기대되었다.
‘밑 작업은 끝났다.’
저벅. 저벅.
‘8시 55분’
지혁의 걸음 소리가 들리자, 사무실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아······ 팀 변경하고 싶어.
-쟤 다시 휴직 좀 들어가면 안 되나.
-중앙현관 앞에 기다렸다가 들어오나 봐. 어떻게 된 게 항상 ‘8시 55분’이야.
“안녕하세요.”
지혁은 들뜬 기분 탓에, 약간 높은 톤으로 팀원들에게 인사했다.
모두 반 억지로 화답했다.
-지혁 씨, 왔어?
-굿모닝.
지혁은 자리에 서류 가방을 놓고는 바로 윤 차장에게 다가갔다.
윤 차장은 곁눈질로 지혁이 오는 걸 바라보았는데.
‘젠장, 아침부터 왜 나야. 오지 마. 오지 마.’
하지만 지혁은 방향을 틀지 않았고, 윤 차장 앞으로 직진했다.
“윤 차장님?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으응~ 잘 보냈지. 지혁 씨도?”
“그럼요.”
어느 때보다 지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고, 윤 차장은 그래서 더 불안했다.
‘무슨 꿍꿍이야. 왜 이래.’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커피 드셨어요?”
“응? 어어. 먹었는데.”
윤 차장의 책상 위 머그잔이 덮어져 있었다. 그걸 보고 지혁이 말했다.
“안 드신 거 같은데?”
“아, 그렇네. 착각했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저랑 모닝커피 한잔하시죠.”
“······.”
윤 차장은 옆에 서 있는 지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해야겠어?”
“네.”
“그래······.”
지혁이 먼저 일어났고, 윤 차장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
선도물산 1층. ‘문벅스’ 카페.
지혁은 벽을 뒤에 두고 앉을 수 있는 카페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뭐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아니야. 무슨 차장이 사원한테 얻어먹어. 내가 살게.”
“제가 먹자고 했으니, 제가 살게요.”
“그럼 난 아아.”
“네.”
잠시 후, 지혁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트레이에 담아서 가져왔다.
“드시죠.”
“그래, 잘 마실게.”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커피만 마셨다.
윤 차장은 지혁 앞에선 섣불리 뭔가 말을 꺼내는 게 두려웠다.
그렇다고 이렇게 마주 보고 아무 말 없으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진짜 커피만 마시려고 보자고 한 거야?’
날씨 얘기라도 해볼까 고민 중이었는데.
“윤 차장님.”
“어?”
“차장님께서는 회사생활 얼마나 하셨죠?”
“글쎄······ 한 15년 정도 됐나?”
“꽤 오래 하셨네. 계속 팀원으로만 있던 거죠?”
“그렇지. 상품기획에만 있었으니까.”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럼······ 이제 팀장 하실 때쯤 되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