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1화 (21/301)

21. 공존할 수 없는 사이 (1)

윤 차장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팀장 할 때쯤 되지 않았냐고?’

이 정도 경력쯤 되면 주변에서 흔히 들을만한 얘기였으나, 상대가 지혁이라서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지혁이 복직한 후에 함께 지낸 지 이제 막 한 달이 되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데.

지혁이란 남자한테 질리는데, 한 달이면 아주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가 절대로 의미 없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윤 차장은 잘 알고 있었다.

꿀꺽.

침을 삼켰다.

‘무슨 꿍꿍이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윤 차장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하······ 경력이 뭐가 중요해. 할만한 사람이 하는 거지.”

“······.”

지혁은 가만히 윤 차장을 바라보다가 더 정확하게 말했다.

“팀장 하고 싶지 않으세요?”

“······.”

윤 차장은 동공이 흔들렸다.

‘미치겠네. 이 새끼가 아침부터 왜 이러지.’

잠시 고민하다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에이~ 싫어~ 팀장 해서 뭐하게. 괜히 부담스럽기만 하지. 책임질 일도 많아지고.”

“우리 팀은 팀장이나 팀원이나 책임지는 양은 비슷하지 않나요?”

심 팀장을 살짝 돌려 까는 말이었고, 윤 차장은 곧바로 맞장구 쳤다.

“그렇긴 하지. 때로는 팀장이 없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지혁은 피식 웃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팀장 한번 해보실래요?”

“에이······ 뭐, 뭐?!”

윤 차장은 뭔가 잘 못 들었나 싶었다.

‘얘가 미쳤나? 돌았나? 이번엔 좀 심각하게 느껴지네.’

윤 차장은 비웃으며 물었다.

“왜? 내가 한다고 하면 너가 시켜주게?”

“네.”

“푸웁!”

마시려던 커피를 앞 탁자 약간 뿜었다.

윤 차장은 지혁을 바라봤는데, 분명히······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무슨 오너가 낙하산 꼽듯이 말을 하네? 얘가 진짜.’

“오지혁. 너 농담이 좀 심해.”

“농담처럼 보여요?”

‘아니, 그렇게 안 보여. 그래서 돌 것 같아. 제기랄, 아침부터 기 빨리게.’

윤 차장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실없는 소리 계속할 거면, 인제 그만 일어나자.”

“······.”

윤 차장은 일어났지만, 지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뭐해? 가자니까.”

지혁은 앉은 채로 눈을 위로 치켜떠서 윤 차장을 쏘아보았다.

“아직 얘기 안 끝났어요.”

“······.”

“앉으세요.”

꿀꺽.

윤 차장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앉았다.

***

“다시 한번 묻습니다. 팀장 해볼래요. 말래요.”

지혁은 윤 차장이 양아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이스 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기에, 적어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다.

무엇보다도 팀원 중에 가장 새가슴이었으며, 연차도 적당하다.

심 팀장을 대신에 꼭두각시 팀장으로 세우기에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해보고야 싶지.”

역시. 최근 윤 차장이 심 팀장에게 뻗대는 걸 보며, 불만과 욕심이 좀 있을 거로 생각했었는데.

예상이 적중했다.

“그렇다면······.”

지혁은 윤 차장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고.

그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지혁은 얼굴을 가까이하고, 윤 차장에게만 들릴 정도의 소리로 말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팀장 만들어 드릴 테니까.”

“······.”

“기회가 왔을 때는 의심하면 안 돼요.”

윤 차장은 혼란스러웠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동안 지혁에게 봐온 모습을 생각해 봤을 때, 미친놈이라고 치부하며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흠! 어떻게 하면 되는데?”

윤 차장도 지혁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심 팀장님 주변 조사 좀 해보세요. 특히 거래처와의 관계에 대해서요.”

윤 차장은 눈을 부릅떴다.

“심 팀장이 비리라도 저질렀다는 거야?”

“그야 모르죠. 차장님은 심 팀장님과 오랜 시간 근무했잖아요.”

“······.”

“예전엔 생산팀 권한이 한정적이었다면서요?”

“흠······ 그랬지. 5년 전만 해도 웬만한 건 기획팀에서 직접 생산까지 했으니까.”

윤 차장은 미심쩍은 눈길로 바라봤다.

“근데, 심증만으로 이런 걸 해도 되는 거야?”

“심 팀장님도 제 주변 캐고 다니시는 거 같던데. 뭐, 피차 마찬가지 아니에요?"

이 말에 윤 차장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니까.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원. 털어봐야 나올것도 없는데도 탈탈 털고 있었다. 지혁에 대한 질문과 뒷담화가 얼마나 집요한 지, 윤 차장이 심 팀장을 피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언제든 의심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지금 없는 걸 만들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뭔가 발견되면 그걸로 심 팀장을 내치려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

“일단 패를 다 펼쳐놓은 후에 판단하려는 거예요. 여러 생각 마시고. 제가 요청한 것만 해주세요.”

“······.”

“팀장 만들어 드릴 테니까.”

윤 차장은 더 반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고, 지혁은 감정 없이 말했다.

“일주일 드릴게요.”

***

[외근이요. 1층으로 오세요.]

황 대리는 지혁의 메시지를 받고, 바로 외근 준비를 했다.

생산팀 하 팀장은 지혁으로부터 외근요청이 있다고 하니, 더 묻지도 않고 어서 갔다 오라고 했다.

지혁의 출신에 대한 얘기를 나눈 이후, 하 팀장은 지혁에 대해 극도로 조심 했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올라오니, 지혁은 1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혁 씨~ 타세요~”

철컥.

지혁이 타자마자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대성실업이요.”

“혹시 팍스버거 콜라보?”

“네.”

“근데 왜 제가 거기에 같이······.”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시간 낭비하기 싫고, 설계를 좀 빡세게 하려고요.”

“······.”

“상대가 원하는 건 들어주면서, 가격은 저렴하게요.”

아직은 제품 구상단계다. 생산이 참여할 영역은 아니었지만, 원가까지 고려한 설계를 하고 싶었다.

“이번에 황 대리님이 실력 발휘 해주시면 돼요. 전문가라면서요.”

뜨금.

일전에 회식 자리에서 했던 말을 지혁이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부담이 확 느껴졌지만.

“네, 최선을 다할게요.”

강남에 위치한 대성실업에 도착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층 로비에서 김진아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뵙네요.”

지혁이 건조하게 인사했고.

김진아 과장은 살짝 미소지으며 화답했다.

“그러게요. 저번엔 불쑥 찾아와서 놀라게 하시더니, 약속 잡을 줄 아시는 분이었군요?”

지혁은 쓰잘데기 없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고, 바로 황 대리를 소개했다.

“우리 회사 생산팀 황성준 대리님입니다. 미팅에 도움을 주실 것 같아서 함께 왔어요.”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김진아 과장은 황 대리에게 악수를 청했고, 황 대리는 손을 잡으며 얼굴이 빨개졌다.

‘이쁜데?’

지혁은 두 사람은 번갈아 본 뒤, 말했다.

“미팅은 어디서 하나요?”

“네, 미팅룸을 잡아놨습니다. 저 따라서 오시죠.”

두 남자는 김진아 과장을 따라서 로비 안쪽으로 들어갔다.

***

지혁은 커피를 들고 오는 김진아 과장의 이마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앞머리로 가리고 있어서 ‘색깔’을 못 봤는데, 오늘은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고 있었다.

‘갈색’

김진아 과장의 이마 주변에서 갈색이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괜히 철벽녀가 아니었군.’

갈색은 주황과 검정의 중간색이다. 망나니 기질을 보이는 주황. 그리고 장악력과 카리스마를 보이는 검정.

그 중간색인 갈색을 띠는 사람은 고지식하고 앞만 보는 사람이다.

주변을 살피지 않으니, 실수가 잦은 편이고. 길을 잘못 들더라도 다른 사람 말 안 듣고 앞으로만 간다.

그래서 갈색을 띠는 사람은 길잡이가 매우 중요하다. 한번 잘 못 되면 골로 가기 쉬운 스타일.

그래서 갈색의 사람들은 가능한 회사생활을 오래 하는 게 좋다.

은퇴 후 치킨집 차렸다가 망한 사람 중에는 갈색을 띠는 사람이 많다.

“뭘 그렇게 보세요?”

김진아 과장은 볼이 약간 붉어져서는 물었다. 색깔을 보려면 얼굴을 집중해서 봐야 하고, 그래서 오해를 받기 쉽다.

“아 죄송합니다. 우선 상품구성부터 협의해 볼까요? 저희는 일단 7월에는 5부 팬츠, 라운드 티, 바람막이 점퍼를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라운드 티에 SKU(컬러웨이) 수를 집중시키려고 하거든요.”

“그래요. 그게 좋겠죠. 여름에는 라운드 티니까.”

김진아 과장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바람막이는 테스트 오더처럼 오가닉으로 할 수 있나요?”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스타덕 바람막이 판매가 기준에 오가닉으로 하면 마진이 안 남아요.”

“그럼 미세먼지 방지 코팅은 가능한가요?”

“그게 말만 그렇지 따로 필요가 없어요. 겉감이 PU(폴리우레탄) 코팅되면 기본적인 생활 방수, 황사 방지 기능은 가능한 거예요. 왜냐하면······.”

지혁은 섬유 관련 지식을 술술 말했고, 김진아 과장은 좀 놀랐다.

‘뭐야? 불과 2주 전만 해도 재귀반사도 모르던 사람이?’

황 대리는 옆에서 살짝 미소지었고, 지혁이 끊임없이 늘어놓는 전문지식에 김 진아 과장은 무슨 소리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이런······ 사원 앞에서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고.’

지식에서 달리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해하셨죠? 따로 기능 추가하지 않아도 되겠죠?”

“흐흠. 그렇겠네요. 아, 내가 그 부분을 깜빡했네요. 그렇네요. 어차피 PU 코팅 하니까 쓸모가 없지.”

김진아 과장은 모르지만 아는 척했고, 지혁은 속으로 웃었다.

약 30분 정도.

지혁은 준비했던 7월 상품 구성라인을 설명했고, 생산 전문 지식이 필요할 때 옆에서 황대리가 도왔다.

김진아 과장은 별 이견이 없었다.

“태클 안 거셔서 다행이네요.”

“태클 걸 게 있어야 걸죠.”

“팍스버거 로고 사이즈 줄이는 거에 반대할 줄 알았거든요.”

이 말에 김진아 과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이번엔 스타덕 매장에 깔릴 옷이잖아요. 테스트는 팍스버거 매장 사은품이었고요. 다르죠. 그 정도 개념은 있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엔 8월 구성 건으로 뵐게요. 그 전에 뭐 특별히 변경사항 없으면 뵐 일은 없겠네요.”

지혁이 일어나자, 김진아 과장은 그를 배웅하며 내심 궁금했던 걸 물었다.

“공부 많이 하시나 봐요?”

“사원이잖아요. 많이 해야죠.”

김진아 과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정말 궁금했던 걸 물었다.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없으면 제가 소개해줄 수도 있고 하니까······.”

이유를 묻지 않았는데도, 김진아 과장은 변명하듯 사유를 얘기했다.

일반인이 아니라, ‘그 세계’에서 오감이 극도로 훈련된 지혁이다. 눈빛, 호흡을 보며 그녀의 속마음을 읽고 있었다.

지금 질문의 속뜻이 무엇인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얼마 전 황 대리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여자친구는 없고, 아내는 있어요.”

“어머······ 아······.”

김진아 과장의 실망스러운 기색을 뒤로하고 지혁은 대성실업을 나섰다.

***

조금씩 더워지고 있는 5월의 오후.

‘띵!’

사내메신저 알림이 떳다.

‘메시지 : 윤현성 차장.’

지혁은 날짜를 봤다.

‘정확히 일주일 지났네.’

윤 차장은 지혁과 모닝커피를 한 이후부터 평소 그답지 않게 분주했었다.

온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고, 외근도 자주 다니고.

팀원들은 인사평가 철도 아닌데, 왜 난리인가 의아해할 정도였다.

‘할 얘기가 있어. 언제 볼까?’

지혁은 윤 차장의 메시지를 읽은 후, 바로 답장을 보냈다.

‘지금. 1층 문벅스 그때 그 자리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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