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너가 왜 여기서
거울에 비친 지혁의 모습.
심 팀장은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서 몸이 굳어버렸다.
“뭐, 뭐야······.”
“뭐긴요. 얘기하는 거 들었다니깐.”
쏴-
지혁은 수도꼭지를 틀어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저에 대한 애정이 넘치시네요. 인사팀장님 오랜만에 만난 거 같던데, 제 얘기만 하실 정도면······.”
꿀꺽.
심 팀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 젠장. 방심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얘기 하면 안 됐었는데.’
인사팀장과 대화 나누는 중에 아무도 화장실에 안 들어왔었으니, 지혁은 그 전부터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을 것이다.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왜 여기 있지.’
상품기획팀의 위치는 10층 A 구역. 지금 지혁을 만난 화장실은 10층 C 구역이다.
‘설마······.’
지혁이 복직한 이후로 이상한 기분을 여러 번 느꼈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거나, 얘기를 엿듣고 있는 듯한 기분.
그 실체를 목격하지는 못 하여서,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며칠 전에 딱 한 번, 기묘한 타이밍에 지혁과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8층에서 무역팀장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고, 지혁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겠지. 무슨 첩보 질 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왜 화장실을 여기까지 왔어?”
“A 구역 화장실에 자리가 없어서요.”
“······.”
합리적인 이유였다. 간혹, 화장실 이용자가 많은 아침 시간대에는 자리를 찾아서 층 이동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니까.
“그래? 타이밍 기가 막히네.”
심 팀장은 더 할 말도 없고,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혁은 쉽게 보내지 않았다.
“저 보내려고 안달이 나셨군요?”
“······.”
그리고 심 팀장은 이 말에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분명 지혁이 다 들었을 텐데 그런 말 한 적 없다며 잡아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팀장이 협조부서에 팀원 뒷담화한 걸 인정하는 것도 우스웠다.
“뭐, 이해는 합니다. 그럴 수 있죠.”
“······.”
“저도 비슷한 심정이니까.”
지혁은 심 팀장을 바라보았고.
심 팀장은 지혁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이쯤 되면, 우리 서로 솔직해져도 될 것 같아요. 어때요? 팀장님? 이제 화장실에 진짜 아무도 없거든요.”
불끈.
심 팀장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쫄지마. 어차피 내 팀원이야. 회사 곳곳에 CCTV가 있고,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거야.’
“난 네가 싫다.”
심 팀장은 주먹 쥔 손을 미세하게 떨며 말했다.
“네가 요청해서 팀을 나갔으면 좋겠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제가 싫다면 팀장님이 딴 데 가시면 간단해질 일인데.”
심 팀장은 얼굴이 붉어져서는 소리를 높였다.
“팀원이 싫다고 팀장이 떠나는 게 말이 돼?”
“팀장이 팀원 보내려고 뒷담화 까고 다니는 건 말이 되고요?”
“······.”
‘공존할 수 없는 사이’
서로 상극이더라도 평화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둘 중에 누구 하나 다치더라도. 혹은 죽더라도. 싸울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있다.
평화가 있어도 잠시뿐이며, 결국엔 깨질 수밖에 없다.
야생에서 수컷 호랑이의 영역 싸움과 비슷하다. 그냥 한 놈이 딴 데 가거나, 혹은 꼬리를 내리면 될 일인데. 굳이 한 마리가 죽을 때까지 싸운다. 그래야 끝이 나니까.
비정하고 잔인할지라도, 그게 자연의 법칙이다. 동물이라는 게 그렇게 생겨먹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만간 결말이 나겠네요.”
심 팀장은 지혁의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가도 되겠지?”
이제 완벽히 명확해졌다. 두 남자는 앞으로 서로를 찍어내기 위해 각자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네.”
“수고해라.”
“네, 수고하세요.”
***
지혁이 사무실에 오자, 윤 차장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다가왔다.
“지혁아.”
최근 상품기획 1팀은 심 팀장과 정 과장. 오지혁과 윤 차장으로 세가 갈렸다. 장 과장은 중립이다.
“네.”
“좀 전에 상품전략실 백 과장님 왔었어. 너 찾더라. 콜라보 건 주간보고 안 하냐고.”
“아직 뭐 별거 없는데. 그냥 윤 차장님이 대신 보고 하지 그러셨어요.”
“응?”
윤 차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에이~ 내가 지혁이 공을 가로채서는 안 되지~ 하하.”
윤 차장은 복잡한 일에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혁은 그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그래, 그냥 이런 인간이니까.’
“갔다 올게요.”
상품전략실.
똑똑.
유 실장과 백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
유 실장의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다. 항상 앞머리를 내리고 있더니, 오늘은 가르마를 타서 옆으로 넘겼다. 그래서 이마가 훤히 드러났고.
지혁은 인사도 잊은 채, 들어온 자세 그대로 유 실장의 이마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
유 실장은 이런 지혁이 이상해 보여서, 덩달아 멍하니 지혁을 바라보았다.
‘얘가 왜 이러지?’
두 사람은 서로 얼어붙은 듯 서로를 바라보다가.
유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왜 그러나?”
“······ 헤어스타일을 바꾸셨네요.”
지혁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살짝 고개를 털고는 말했다.
“응? 어 바꿨지. 하하, 참나. 우리 아내도 못 알아본 걸, 오지혁이가 알아봐 주네.”
“······.”
유 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먼.”
그는 소파를 가리켰다.
“앉게. 진행 상황 보고해 봐.”
“네. 잠시만요.”
지혁은 보고하기 전에 잠깐 시간을 가졌다. 보고 준비를 위한 시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유 실장에게서 본 색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남색이거나 푸른색 계열일 줄 알았는데.’
유 실장이 권위적이고 냉정해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빨간색.’
열정적이며 성과욕이 강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색깔이다. 삼원색 중 하나이며, 이 색을 띤 사람들 또한 리더 중에 많이 나타난다.
‘하긴······ 내가 유 실장을 이제 한 세 번 봤나? 제대로 못 봤을 수도 있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지혁은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만큼 본인의 ‘세 번째 눈’에 대한 신뢰가 강했다.
‘빨간색이라면······ 차라리 잘 됐어. 오히려 쉬울 수 있겠어.’
심 팀장을 이동시키려면 유 실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이 남자를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생각 중이었는데, 색깔을 보고 나니 그림이 곧바로 그려졌다.
지혁은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자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보고 드릴게요.”
“그래. 보기보다 신중한 친구고만?”
유 실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들을 자세를 취했고.
지혁은 그 어느 때보다 각 잡고 성심성의껏 보고를 했다.
***
유 실장의 색깔을 본 이상, 목표는 명확해졌다.
‘압도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
‘빨간색’을 보이는 사람들은 성과욕과 소유욕이 매우 강하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 사람’이라는 게 없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사람이라면 하루아침에 ‘내 사람’이 된다.
즉, 유 실장에게 본인이 매력적인 카드로 보인다면, 계획한 일들을 순조롭게 풀어갈 수 있다.
깔끔하게 심 팀장을 보내고, 팀을 장악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성과’에 달렸다.
“정 과장님.”
니트 기획 담당 정성재 과장.
지혁의 물음에 그는 깜짝 놀라서 대꾸했다.
“응? 어어. 지혁아.”
“뭣 좀 여쭐게요.”
“나한테?”
복직한 지혁을 처음 만난 날, 또라이인 줄 모르고 함부로 대했었다.
지혁이 심 팀장에게 하는 걸 보며, 언젠가 본인 차례가 오지 않을지 조마조마했었다.
그래서 지혁을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뭐, 뭘 물어볼 건데?”
“별건 아니고요. 업무 관련해서요.”
정 과장은 턱으로 윤 차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옆자리에 앉은 베테랑 놔두고 왜 나한테 물어봐?”
지혁은 가만히 정 과장을 보다가 물었다.
“물어보면 안돼요?”
“아, 아니. 안된다기보단······.”
“그럼 딴소리는 마시고, 질문 듣고 대답해주세요.”
지혁은 말을 끊었고, 정 과장은 그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팍스버거 콜라보 7월 구성 건 중, 핵심이 라운드 티거든요.”
“······.”
“정 과장님이 니트 기획 담당이시잖아요. 히트 상품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히트 상품 많이 만들어 본 능력자시잖아요.”
‘능력자’라는 말에 정 과장은 금세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정 과장은 띄워주는 걸 엄청나게 좋아하며, 지혁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 그거 때문에 그랬구나.”
정 과장은 책상에 팔 한쪽을 걸치고, 편안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히트 상품 만드는 요소는 너무 복합적이라 딱 집어서 말하기는 어려워. 일단은 작년에 베스트와 워스트 제품을 분석해 봐. 뭐 때문에 잘 되고, 뭐 때문에 안 됐는지.”
지혁은 정 과장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지혁의 진지한 태도를 보며, 정 과장은 신나서 얘기했다.
“분석을 통해 여러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될 거야. 소재, 그래픽, 핏, 가격 등······ 일단 마케팅이나 세일즈는 제외하고, 이런 제품 자체에만 집중하라고. 그러니까 너의 영역에만.”
“네.”
“그럼 네가 찾아낸 ‘히트 포인트’대로 제품을 설계하면 끝일까?”
지혁은 정 과장의 질문에 상식적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겠죠. 올해도 작년과 똑같으란 법 없으니까.”
정 과장은 약간 놀랐다.
‘보통 신입들과 다르게 시야가 넓네. 그냥 미친놈만은 아니구나.’
“그렇지. 작년에 잘 된게 올해 망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일 수도 있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점집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지혁은 그냥 한 말이었는데, 정 과장은 움찔했다.
‘하여간 말을 참 뾰족하게 해.’
“흠! 그건 아니고. 고객조사를 해야겠지.”
“고객조사?”
“그래. 어차피 제품을 고객에게 팔 거잖아. 구매하실 고객님들께 물어보는 거지. 이런 제품이 있다면 사실 건지.”
“오······.”
단순하지만 굉장히 설득력 있는 얘기였고, 지혁은 좀 놀랐다.
‘괜히 전문가는 아니네.’
“제품의 구체화를 상세히 할수록, 그리고 고객조사 모수가 클수록 성공 확률은 높아지겠지?”
“그렇겠네요.”
이때 문득 지혁은 궁금증이 들었다.
“근데, 이렇게 잘 아시면서 왜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거예요? 고객조사 안 하시고?”
이유는 간단하다. 업무에 의욕을 내봐야 크게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승진시기도, 인사평가 기간도 아니니까.
“필요할 때 해.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서.”
하지만 정 과장은 속마음 그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흠. 그렇군요. 고객조사 방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지혁의 눈빛은 진지했고.
정 과장은 지혁이 좀 어렵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후배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 이쪽으로 가까이 앉아 봐.”
“네.”
정 과장은 30분가량 짧고 굵게 알려주었고, 지혁은 내내 열심히 필기하며 집중해서 들었다.
“오케이······.”
“세부적인 내용은 내가 알려준 사이트와 작년에 마케팅팀에서 만든 프로젝트 보고서가 있거든? 그거 참고하면 돼.”
“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 과장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습니다.”
“어?”
정 과장은 놀랐다.
‘얘가 이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정 과장 기억에 복직한 후 지혁으로부터 처음 들어본 거였다.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도 지혁이 감사 표현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응······ 어어. 그래.”
정 과장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으면 그 효과는 배가 된다.
지혁은 한마디 더 했다.
“기억할게요.”
지금 이 말이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게 될지, 정 과장은 짐작 못 할 것이다.
“기억? 그래. 하하. 수고해.”
지혁은 자리로 돌아가 곧바로 전년도 제품 분석에 돌입했고.
며칠 지나 분석이 완료되었을 때쯤.
황 대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황 대리님, 외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