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몸이 기억한다 (1)
황 대리는 생산팀에서 콜라보 전임 담당을 맡고 있다.
원래 생산팀은 아이템에 따른 전문성이 강하며, 품목별 담당자를 세운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통의 일원화가 중요하다며, 황 대리에게 콜라보 전담을 시킨것이다.
일단 표면적인 이유는 이렇고, 진짜 이유는 지혁 때문이다.
생산팀장인 하 팀장은 다른 담당들이 지혁을 상대하기에는 버거울 거라고 판단했다.
생산팀은 상품기획팀의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있기에, 지혁의 명성은 생산팀에서도 자자하다.
직속상사인 심 팀장도 지혁에게 꼼짝 못 할정도인데, 웬만한 생산 담당이라면 지혁에게 뼈도 못 추릴것이다.
생산팀 미팅 중에 황 대리가 콜라보 진행 건을 보고하자 하 팀장이 물었다.
“황 대리, 오지혁 사원과 같이 일하기 힘들지는 않아?”
옆에 다른 동료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또라이 한 명 들어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차라리 직급 높은 또라이가 낫지, 직급도 낮은 애가 지랄하면 정말 고역이야.
-어우~ 지나가면서 심 팀장이랑 붙는 거 봤는데, 후덜덜 하더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겼어.
-내 스타일 기획자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지. 황 대리만 불쌍······.
누군가 너무 깊은 속마음을 말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이러다가 황 대리가 콜라보 담당 안 하고 싶다고 하면, 여러 사람이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 대리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오지혁 씨 좋아요. 잘 모르셔서 그래요.”
하 팀장이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어떻게 좋은데?”
황 대리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깔끔하다고 할까요?”
“깔끔?”
“네.”
황 대리는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보통 기획자들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갑자기 컬러나 수량을 변경한다든지. 혹은 요청한 날짜를 바꾼다든지. 뭐······ 기획 일을 하다 보면 변수가 많으니까, 그럴 수 있다는 거 이해는 하는데.”
“······.”
“오지혁 씨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결정이 묵직하고요. 아주 결정적인 이슈가 아니라면 번복하지 않고 ‘GO’ 하거든요. 그러니까, 본인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요.”
하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본을 지킨다는 거네.”
“그렇죠. 이 기본적인 걸 안 지키는 기획자들이 너무 많아요. 뒷단계에서 일하는 사람들 생각 안 하고, 엿가락 뒤집듯 바꿔대고 안 된다고 하면 왜 안 되냐며 지랄하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괜찮네.
-신입이 그렇게 일하기 쉽지 않은데.
-그럼, 일 하면서 힘든 건 없어요?
다들 지혁을 궁금해했다. 그만큼 요즘 상품본부에서는 핫한 인물이기 때문에.
“힘든 것도 있죠~”
사람들은 황 대리의 입만 바라봤다. 이제야 진짜 얘기가 나올 거로 생각했다. 보통 남에 대한 안 좋은 얘기는 조심스러워서 잘 안 하려고 하니까.
“좀 빡세요. 요구하는 기준치가 높다고 해야 할까요? 근데······ 합리적인 사유를 대면 쉽게 넘어가기도 해서······ 그렇게 보면 그다지 빡센 것도 아니네요.”
-뭐야······ 황 대리님 오지혁 씨랑 잘 아는 사이 아니에요?
-안 좋은 얘기는 안 하려고 하네?
-친하긴 해~ 맨날 붙어 다니더라고.
황 대리는 씩 웃으며, 딱히 부인하지는 않았다.
“뭐, 또 하나 안 좋은 거 찝자면······ 얼굴 마주하는 거 자체가 좀 힘들죠. 분위기가 좀 세서, 기 빨리는 느낌이랄까요.”
띠링!
[황 대리님, 외근입니다.]
지혁에게 온 메시지.
황 대리는 식겁해서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어디서 또 지켜보고 있는 거 아니야?’
“황 대리, 왜 그래?”
얘기하다 말고 겁먹은 표정 짓자, 하 팀장이 이상해서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동료들은 더 얘기해달라고 성화였다.
-그래서 기 빨리는 느낌이 뭔데요?
-언제 그러는데요? 말 좀 해줘요. 우리도 언제 같이 일하게 될지 모르잖아. 대비 좀 하게.
지혁의 메시지를 받은 후, 황 대리는 그에 관한 얘기를 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하 팀장님.”
“응?”
“저 외근 좀 다녀오겠습니다.”
“갑자기? 어디 가는데?”
“오지혁 씨 호출입니다.”
지혁의 호출이라는 말에, 하 팀장은 더 묻지 않았다.
“어, 갔다 와.”
***
황 대리는 지혁과 간단히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외근 목적을 확인했다.
혹시나 준비해야 할 게 없는지 확인하려는 거였다.
‘고객조사’ 할거라는 말을 들었고, 그걸 생산팀이 왜 가야 하는 지 이해가 안 되긴 했으나.
‘오지혁’이니까, 군소리 않고 나갈 채비를 했다.
“샘플 컨펌 끝나서 가져왔는데, 황 대리님 어디 가세요?”
막 나가려는데, 이승주 디자이너가 생산팀에 들어왔다.
그녀는 콜라보 전임 디자이너다. 디자인팀 또한 생산팀과 같은 이유로 전임 담당자를 세웠다. 지혁의 명성은 디자인실에도 잘 알려져 있다.
“아~ 네. 저 고객조사 갑니다.”
“고객조사요? 생산팀이?”
“하하. 왜요? 생산은 고객조사 하면 안 됩니까?”
선도물산에서의 생산팀은 받은 오더를 진행하는 수동적인 성향이 강했기에, 고객조사는 이 팀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다.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지혁 씨가 협조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아······ 오지혁 씨요.”
이승주 디자이너는 까칠하며 인접부서에 협조적인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한번 마음 열기가 어렵지, 막상 열리면 고속도로다.
임원 앞에서도 했던 말을 지키겠다며, 자신을 감싸주던 지혁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4년 차 대리인데, 이 삭막한 회사생활에서 그런 모습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마음이 열리는데 그 한 번이면 충분했고, 뭐라도 힘이 된다면 돕고 싶었다.
“고객조사라면 디자이너랑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도 협조해 줄 수 있는데.”
황 대리는 반색하며 물었다.
“어? 정말요? 같이 가실래요?”
“같이 가도 돼요?”
“아······ 잠시만요.”
물어볼 것도 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혹시 모르니 지혁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다.
“네, 네네. 알겠습니다.”
황 대리는 전화를 끊고 말했다.
“대환영이랍니다.”
“호호.”
“그럼 1층에서 뵐게요. 준비하고 나오세요.”
“네.”
***
“어서 오세요.”
지혁은 이승주 디자이너에게 인사했다.
“호호. 안녕하세요.”
“큰 힘이 될 것 같네요. 근데, 나서기로 하신 이상 힘드시더라도 끝까지 해주셔야 해요.”
지혁은 한결같이 건조하다.
의아함은 잠시였고, 곧바로 일 얘기를 시작했는데.
희한하게도 이승주 디자이너는 그런 그의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이죠.”
“이승주 대리님은 고객조사를 많이 해봤겠죠?”
“좀 해봤죠.”
“일단은 제 식대로 갈 거니까.”
“······.”
“미숙한 게 있으면 알려주세요.”
“알겠어요.”
지혁은 문벅스를 바라봤다.
“일단, 차 한잔하면서 작전 설명 좀 할게요.”
계산대 앞에서 또 개인카드를 꺼내는 걸 보며, 황 대리가 말했다.
“지혁 씨, 이런 자리는 법인카드 써도 돼요. 협조부서 미팅이잖아요.”
“괜찮아요. 드세요.”
“아하······ 이거 참. 젊으신 분이 돈을 아껴 써야 하는데.”
커피를 마시며 지혁은 설문지를 보여주었다. 설문지 안에는 아이템별 제품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보시다시피 제품 유형은 같은데, 그래픽 위치와 크기, 컬러만 바꿨어요. 핏은 설문지로 보기 어려우니까요.”
황 대리는 제품 사진을 자세히 보며 물었다.
“샘플이 없는 제품 사진은 어떻게 만든 거예요?”
“포토샵 좀 썼어요.”
“와~ 지혁 씨,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알게 되었죠. 그 정도는 며칠 밤새우면 알게 돼요.”
“······.”
황 대리는 지혁의 눈의 실핏줄이 터져 있는 걸 보았다.
‘요즘 연락이 뜸하다 했더니, 고생하고 있었구나.’
이승주 대리가 말했다.
“지혁 씨, 앞으로는 포토샵 필요한 일 있으면 저한테 요청하셔도 돼요. 제게는 어려운 일 아니니까.”
이 말에 지혁은 이승주 대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한테 뭐 원하는 게 있으신가요?”
“어머.”
황 대리가 황급히 나서서 대변인 역할을 했다.
“지혁 씨 말투가 원래 이래요. 나쁜 뜻은 없습니다.”
이승주 대리는 황당해하다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제가 사원한테 뭘 원하는 게 있겠어요? 그냥 고생하는 거 같아서, 돕고 싶은 거지.”
“······.”
지혁으로서는 이런 말이 선뜻 이해가 안 되었다. ‘기브 앤 테이크’가 기본인 ‘그 세계’에서는 말도 안 되는 논리였으니까.
저의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일단 위협은 느껴지지 않음으로 넘어갔다.
황 대리는 시계를 보고 말했다.
“빨리 시작해야겠는데요. 설문조사는 얼마나 하려고요?”
지혁은 대답 대신 가지고 온 캐리어를 열었고.
덜컹.
캐리어 안에 가득한 설문지를 보고, 황 대리는 기겁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젠장, 저걸 다 한다고?’
이승주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나서기로 한 이상 끝까지 해달라고 못 박은 거였나······.’
황 대리는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이, 이걸 다 한다고요?”
지혁은 이승주 대리를 향해 물었다.
“고객조사는 모수가 많아야, 정확도가 높아지는 거 아닌가요?”
“그렇기는 하지만. 이건 좀 양이 많긴 하네요······.”
못해도 1,000장은 되어 보였다.
황 대리는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어머니께 며칠 집에 못 들어간다고 연락 드려야 하나.’
하지만 지혁은 이런 두 사람의 반응을 도리어 이상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이걸 직접 할 생각은 아니죠?”
“······.”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들 일 욕심이 과하시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외주를 좀 쓸 건데요.”
‘자동차 담보대출 해드립니다. 무직자, 신용불량자, 파산자, 회생자 가능······.’
황 대리는 기괴한 얼굴로 지혁이 꺼낸 명함을 보았다.
“이게······ 뭡니까?”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차에도 꽂혀 있고, 길가여기저기도 놓여 있는 거요. 어디서든 찾기가 쉽더라고요.”
“······.”
“불특정 다수에게 설문 조사시키기에 이 업체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왠지 가격도 저렴할 것 같고.”
황 대리와 이승주 대리는 그저 멍하니 지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래 친절하게 번호도 적혀있잖아요. 010-45XX······.”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시죠.”
하지만 두 사람은 쉽게 엉덩이가 떼어지지 않았다.
***
인천의 어느 골목길.
영화에서나 볼 법한 판잣집이 얽히고 설킨 곳.
대낮인데도 판잣집으로 빽빽한 골목이라, 저녁처럼 어두웠고.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인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혁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고, 황 대리와 이승주 대리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아갔다.
반투명 미닫이문 앞에 서서,
지혁은 전화를 걸었다.
♩♬♪♩♬♪♩♬♩♬
[네~]
“지금 앞에 도착했습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목에는 금목걸이, 활짝 웃는 앞니는 금으로 되어 있다.
한 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모습에 황 대리와 이승주 대리는 겁먹었지만.
지혁은 아무렇지 않았다.
“전화 주신 분이구나? 그냥 계좌번호만 불러줘도 된다니깐. 뭐 얼마나 해드릴까?”
“얼마나? 저희는 대출 때문이 아니라, 전단지 뿌리는 것 좀 문의하려고 왔는데.”
“뭐요?”
남자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혁을 바라봤다.
“돈 필요하다며?”
“돈이라는 얘기는 안 했는데.”
“당신 지금 장난해?”
지혁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일단 안에서 얘기하죠.”
“어딜 들어와!”
탁!
남자는 지혁을 거칠게 밀쳤고.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지혁의 손이 안 주머니로 향했다.
오랜 기간 숙련된 능숙한 몸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