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25화 (25/301)

25. 몸이 기억한다 (2)

지혁의 몸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몸을 사선으로 비틀어, 사채업자가 밀치는 힘을 뒤로 흘려보낸 뒤.

곧바로 안쪽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그 세계’에서의 생존의 법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선빵’이었다.

위협을 느낄 때는 재빨리 먼저 치는 게 중요했다. 선제공격은 상대방이 무방비 상태일 때 이뤄지는 공격기술이기에, 즉살 혹은 최소한 전투력의 50%는 반감시킬 수 있다.

물론 오해로 인한 ‘선제공격’은 실제 위협이 아닌 경우에 불상사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착각으로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방심하다가 내가 죽는 것보다는 낫다.

애매하다 싶으면 일단 공격하고 보는 것이다. 그게 생존방식이었다.

더군다나, 이 사채업자는 ‘터치’를 했다.

지혁은 상황을 판단할 새도 없이 오감이 먼저 발동하여 단검에 손이 간 것이다.

사채업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투다다닥!

지혁이 안 주머니에서 칼을 반쯤 뺐을 때쯤.

덥석!

뒤에 서 있던 황 대리가 지혁의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지혁 씨, 괜찮아요?”

순간, 지혁은 정신을 차렸고.

깜짝 놀라서 황 대리를 돌아봤다.

‘안 주머니에서 칼 빼려는 걸 알고 막은 건가? 어떻게 알았지?’

분명 지혁은 황 대리 앞에서 과도를 꺼낸 적이 없었다. 습관적으로 안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과도를 쓰다듬은 적은 있지만······.

‘이상하네. 방금 동작을 알고 막은 거 같았는데.’

하지만, 평범한 회사원인 황 대리가 위협적인 동작임을 알고서 막았을 리가 없다.

그냥 사채업자에게 밀쳐서 넘어지는 줄 알고 뒤에서 꽉 잡은 거였다.

물론 손이 안 주머니로 들어가는 건 봤지만.

“네 괜찮아요.”

지혁은 황 대리의 손을 떼어내고, 사채업자를 쏘아보았다.

꿀꺽.

사채업자는 지혁의 눈을 마주했다.

‘보통 놈이 아니다.’

이 남자 또한 거친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사람이라, 보면 느낄 수 있었다.

지혁이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라는 걸.

‘혹시 경찰인가?’

약간의 몸의 대화를 통해, 사채업자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지혁이 명함을 꺼내려는데.

황 대리가 말렸다.

“지혁 씨, 주지 마세요.”

사채업자에게 인적 정보를 함부로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요. 거래하러 왔으면 깔 건 까야지.”

지혁은 명함을 건네었고, 사채업자는 명함을 보며 중얼거렸다.

“선도물산 상품기획팀? 경찰은 아니시네.”

“네, 회사원이에요.”

사채업자는 안도하는 얼굴로 씹듯이 말했다.

“소싯적에 주먹 좀 쓰셨나?”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주먹은 그냥 그렇고······.”

안 주머니에 한쪽 손을 살짝 넣으며 말했다.

“칼은 좀 쓰죠.”

꿀꺽.

지혁이 손을 집어 넣을 때, 그의 손 등 위의 수많은 흉터를 보았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선도물산이 내가 아는 그 선도그룹의 선도물산 맞나?’

사채업자는 다시 한번 지혁의 눈을 마주한 후, 바로 시선을 돌렸다.

‘정상인이 아닌 건 분명해.’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들어오시죠.”

***

휑한 사무실 안에 커다란 책상 하나와 간이 의자 몇 개만 굴러다닌다.

20년 정도 되어 보이는 컴퓨터 한 대 말고는 사무기기도 하나도 없었다.

“임대료가 아깝다. 이럴 거면 사무실을 왜 쓰는 거지.”

지혁의 이죽거리는 소리는 무시하고, 사채업자가 말했다.

“믹스 한잔 드릴까요?”

“네, 뜨거운 물에 주세요.”

“네?!”

"냉커피 말고 따뜻한 걸로 달라고요."

사채업자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트레이에 믹스 네 잔을 담아왔다.

각자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운을 띄웠다.

“대출은 아니라고 하셨고, 정확히 뭐 때문에 온 거죠?”

지혁은 대뜸 말했다.

“사람 좀 쓸게요.”

“네?”

‘대출 명함’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뿌리는 분들이요.”

“······.”

“설문조사 할 게 있는데, 그분들 도움을 받았으면 해서요.”

사채업자는 할 말을 잃은 듯, 황당한 눈길로 지혁을 바라봤다.

“아, 물론 보수는 드릴 거예요.”

지혁은 사채업자의 눈빛을 살피며 물었다.

“혹시 외주를 주는 건가요? 사무실을 보아하니, 직접 인력을 써서 뿌리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이 물음에 사채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름 영업 기밀이었다.

“물건 좀 봐도 될까요?”

지혁은 사채업자의 요청에 설문지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총 10개 문항이고요. 앞뒤로 한 장이에요. 설문조사 마친 후, 모아서 돌려주시면 돼요.”

어렵거나 복잡해 보이진 않았다. 물론 그냥 뿌리기만 하는 ‘대출 명함’과는 다르게 직접 사람을 대면해야 하기에 좀 더 번거로움은 있을 것이다.

“얼마 주실래요?”

“보아하니 장당 60~ 160원 정도 하는 거 같던데.”

사채업자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검색하면 다 나와요. 뭘 새삼스럽게.”

지혁은 선심 쓰듯 말했다.

“이건 단순히 뿌리는 업무가 아니니까요. 장당 300원으로 할게요.”

“몇 장이나 할건데요?”

“1,000장이요.”

사채업자는 고개를 저었다.

“수량이 너무 적어서, 그 가격에는 못 합니다.”

“그래요? 그럼 얼마면 할 수 있을까요?”

“장당 1,000원으로 하죠.”

옆에서 지켜보던 황 대리가 끼어들었다.

“장당 비싸야 160원 받는 걸 1,000원에 한다고요? 아무리 설문조사라도 그렇지. 지혁씨 딴 데 알아보죠.”

사채업자는 아쉬울 게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외주 주고 커미션 까먹으려면 그 정도는 받아야겠지.’

지혁은 가격을 듣고 나니, 사채업자가 외주에 맡길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지혁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 다리 걸치더라도 소통이 편한 게 좋았고, 다시 알아보는데 시간 허비하기 싫었다.

‘장당 1,000원이어서 봐야, 1천 장이면 고작 백만 원이야.’

“1,000원으로 합시다.”

지혁은 시원하게 대답했고, 사채업자는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단.”

사채업자의 눈을 보며 조건을 말했다.

“만 15세 이상에게만 일 시킬 것, 10~30대에게만 설문조사 할 것. 서울, 경기, 지방 할 거 없이 지역을 폭넓게 할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지혁은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거짓으로 작성했다가는······ 알죠? 이건 길게 얘기 안 할게요.”

“······.”

옆에서 잠자코 듣기만 하던 황 대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 새겨들으셔야 해요. 지혁 씨 앞에서 장난 하시다간 큰일 나요.”

사채업자가 황 대리를 무섭게 바라보자, 시선을 피하고는 중얼거렸다.

“생각해서 해준 말인데.”

사채업자는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언제까지 완료하면 될까요?”

“1,000장은 수량이 적다면서요. 이틀이면 되죠?”

“네? 아, 그건······.”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사채업자가 황급히 말했다.

“가격은 선불입니다.”

지혁은 얼마 전 월급으로 하와이 여행권을 사느라 수중에 30만 원 정도밖에 없었다.

“황 대리님.”

“네?”

“70만 원만 주세요. 이번 달 안에 드릴게요.”

“70만 원이요?”

‘아니, 무슨 로열패밀리가 70만 원이 없어? 아······ 현금을 안 가지고 다니나?’

“아 네 알겠습니다.”

곧 지혁은 사채업자가 알려준 통장으로 100만 원을 송금하며 말했다.

“영수증 주세요. 경비 처리 해야 하니까.”

평소처럼 개인 돈 쓸 줄 알았던 황 대리는 지혁의 이 말이 의외였다.

하지만 지혁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수아한테 또 돈 달라고 했다가는 쫓겨난다······.’

***

설문 조사 방법과 문항 디테일에 대해 이승주 대리가 간단하게 설명해준 후, 세 사람은 길을 나섰다.

“지혁 씨~ 이렇게 원팀이 모였는데, 식사 어때요?”

황 대리는 온종일 설문조사 하느라 뛰어다닐 각오를 하고 나왔는데, 일이 빨리 처리되어 기분이 좋았다.

“원팀이요?”

“네~ 기획, 디자인, 생산 모였잖아요. 뭐, 제품 기획 앞 단계 관련자들 다 모였으니까요. 하하.”

“흠······.”

“지혁씨, 이런 기회는 잘 없습니다. 간단하게 한잔하죠. 이 대리님은 어떠세요?”

이승주는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좋죠~”

지혁은 회식을 좋아하진 않지만, 팀 회식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뭐, 두 분 생각이 그러시다면, 가시죠.”

오후 5시.

여름 초입이라 해가 길어져서, 저녁보다는 낮에 가까운 시간.

세 사람은 치킨집에 자리를 잡았다.

지혁은 여느 때처럼 말이 없었고.

황 대리는 이승주 대리와 신나게 재잘거리며 잔을 기울였다.

지난번에 지혁과 단둘이 저녁 식사 했을 때와는 아주 달랐다.

“말씀 재밌게 잘하시네?”

지혁이 그때를 떠올리고 말하자, 황 대리는 웃으며 말했다.

“아~ 하하.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말 잘합니다.”

“나는 잘 안 받아주니까요?”

“아, 그런 뜻은 아니고요.”

황 대리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농담이에요.”

“네? 아, 네.”

요즘 지혁의 농담이 늘었다.

하지만 황 대리는 그의 농담을 들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헷갈려서.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이승주 대리가 화장실을 간 사이.

지혁은 황 대리에게 물었다.

“혹시 봤어요?”

“네?”

“내 안주머니에 뭐 있는지 봤었냐고요.”

“아······.”

황 대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습관적으로 만지시길래, 저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갔고······ 우연히 봤습니다.”

지혁이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짓자, 황 대리는 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특별한 분이시니까, 뭐 그런 거 가지고 다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신변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하니까요.”

황 대리는 지혁이 특별한 지위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좀 전에 사채업자에게 겁먹지 않고 대할 수 있었던 것도 주변 보이지 않는 곳에 경호원들이 있어서 일 거라 생각했다.

‘아주 철석같이 믿고 있구나. 오 회장 일족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나중에 실망 많이 하겠는데.’

“고마워요.”

“네?”

“실수할 뻔했는데, 황 대리가 막아줬어요.”

“아······.”

황 대리는 얼굴이 붉어졌다.

‘지혁 씨한테 칭찬을 듣다니. 기분 좋네.’

근데 지혁은 정말로 고마웠다.

황 대리가 조금만 늦었다면, 불미스러운 일로 뉴스에 나올 뻔했으니까.

***

사채업자는 약속을 지켰다.

금목걸이에 금니를 한 불량해 보이는 남자가 선도물산 로비에 나타나서 이목을 좀 끌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는 의뢰한 것을 완수하여 지혁에게 전달했다.

“장난질 안 했죠?”

“네, 믿으셔도 돼요.”

그런 남자가 지혁에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자, 지혁은 또다시 유명해졌다.

회사에는 안보는 척 하면서도 보는 눈이 많고, 입도 많다.

어느덧 시간은 지나갔고.

7월이 되었다.

팍스버거 원팀은 유기적으로 잘 움직였다.

상품기획 오지혁 사원을 중심으로, 생산팀 황성준 대리, 디자인실 이승주 대리는 완벽하게 자기 역할을 해냈다.

조금의 불협화음 없이 일은 잘 진행되었고, 제품은 좋은 퀄리티로 생산되어 입고요구일에 맞게 들어왔다.

7월 14일. 제품이 입고된 날.

지혁은 바로 영업팀과 협의 후 물류 팀에 제품 출고 요청을 하였고.

물류 팀의 스타덕 물류 담당자 문규태 대리는 지혁의 진행 스타일을 최우선으로 처리했다.

자주 볼 일이 없는 사이는 한 번의 인연이 중요하다.

지혁이 다정다감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일은 확실하게 했으며, 그런 과정 속에 관계를 담백하게 쌓아왔다. 그가 외톨이 같아 보여도 적재적소에 확실한 지원군이 있는 이유다.

7월 15일. 스타덕 매장에 팍스버거 콜라보 7월 라인 제품은 무사히 진열되었다.

그리고 일주일도 안 되어.

선도물산이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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