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결단의 시간 (1)
‘스타덕, 스포티함에 재미를 덧입힌다.’
『글로벌 브랜드와 경쟁하는 토종 스포츠 브랜드 ‘스타덕’은 7월 여름, ‘스타덕×팍스버거’ 콜라보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스타덕의 트렌디함에 ‘재미’ 요소를 추가한 해당 상품은 10대와 20대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출시된 지 일주일 만에 전량 판매를······.』
인사팀장은 고려일보 경제면에 실린 ‘팍스버거 콜라보’ 기사를 읽고 있었다.
패션 전문잡지가 아닌, 종합일간지에 패션 제품의 기획 기사로 실리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대박인데······ 상품기획팀 확 뜨겠어.’
인사팀장은 계속해서 기사를 읽어갔다.
『최근 스포츠 브랜드들의 콜라보 경쟁이 치열한데요. 같은 의류 브랜드 끼리가 아닌, 프랜차이즈와 협업하여 콜라보 제품을 출시한 건 굉장히 이례적입니다.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들도 스타덕의 행보에 영향을 받아 콜라보 협의가 활발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또한 생활 전반에 따른 크로스오버 현상과 관련있는 것으로······.』
‘사회 현상까지 얘기가 나와? 뭘, 이렇게까지······.’
인사팀장은 기자가 좀 과장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계속 읽었다.
『그런데, 단순히 콜라보를 한다고 해서 다 잘되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콜라보 제품이 스타덕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스타덕에서 해당 상품을 기획한 담당자가 입사 3년 차 사원이라고 하는데요. 이제 경력과 전문성보다는 통통 튀는 아이디어가 중시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입사 3년 차 사원? 혹시 오지혁 님······.’
인사팀장은 고려일보 기사를 보다가, ‘3년 차 사원’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배 대리!”
“네!”
인사팀장의 호출에 배 대리는 곧바로 다가왔다.
“오지혁 님 관찰 잘하고 있나?”
“네, 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분이 팍스버거 콜라보 담당이야? 테스트 오더만 한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메인 오더도 담당했습니다.”
인사팀장은 도끼 눈을 뜨고 바라봤다.
“왜 얘기 안 했어?”
“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아니라서 말씀 안 드렸는데······.”
인사팀장의 언성이 올라갔다.
“이 친구야. 콜라보는 유 실장님이 직접 챙기는 건인 거 몰라?”
“압니다······.”
“그럼 임원이 챙기는 사안을 일개 사원이 담당을 맡는데. 그게 특기할 만한 사항이 아닌가?”
“······.”
인사팀이라고 해서 실무자들의 업무 플로우까지 알지는 못한다.
인사팀장 정도 짬밥이니까 업무적 중요성을 짐작하지만, 인사팀 대리급은 인사 업무만 제대로 하기도 벅차다.
“이것 봐봐. 이 기사 주인공이 오지혁 님이잖아.”
“아······.”
배 대리는 기사도 지금 처음 보는 거였다. 곧바로 빠르게 읽어본 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 대박.”
“······.”
“오지혁 님 진짜 대단하네요.”
인사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사만 봐도 느껴지지 않아? 일치고 나가는 주도성이.”
“네, 확실히 다르네요. 그냥 한방에 업계에 차이를 만들어냈네요.”
인사팀장은 뭔가를 생각하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역시. 확실히 닮았어.”
“뭐가요?”
“오 부회장님이랑.”
“······.”
“오 부회장님 이십 대 때 보는 것 같아. 역시 핏줄은 못 속인다니까.”
인사팀장은 오 부회장과 나이대가 비슷하다. 그가 대리일 때 오 부회장이 선도물산에 입사했었다.
선도그룹에서 가장 큰 규모의 관계사는 선도전자이지만, 선도그룹의 지주회사이자 뿌리는 선도물산이다.
오 회장 일가의 회사생활 첫 시작은 항상 선도물산에서였다.
연일 오 씨, 선도물산 사원 입사, 일하는 스타일.
이런 여러 정황이 인사팀장의 확신을 뒷받침해 주었다.
하지만, 배 대리는 이런 인사팀장이 좀 이상했다.
‘너무 확신하는 거 아니야? 만약, 아니면 어쩌려고.’
“가슴이 뛴다.”
인사팀장은 격양된 표정이었다.
“오지혁 님이······ 사람 두근거리게 만드는 뭔가가 있네.”
그리고 조금의 의심도 없는 표정으로 배 대리에게 말했다.
“배 대리, 우린 지원사격 확실히 하자고.”
“네? 아, 네.”
***
디자인실.
이승주 대리는 팍스버거 콜라보 9월 구성 건 디자인 중이었다.
원래 7, 8, 9월 제품은 같은 시기에 설계를 마치는데, 이번 건은 급하게 오더가 추가된 것이다.
불과 3주 전만 해도 요주의 인물과 일한다고 불쌍하다는 취급을 받던 이승주 대리.
이젠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좀 까칠해도 일 잘하는 담당이 좋더라.
-그러니까. 근데, 이 대리님 보면 스트레스도 별로 안 받는 거 같던데.
-오지혁 씨가 같이 일하는 사람한텐 친절한가 봐.
-맞아~ 이 대리님 만나러 올 때마다 항상 손에 뭐 들고 오잖아.
이승주 대리는 일에 집중하는 척하면서, 얘기들을 다 듣고 있었다.
본인이 디자인한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주변에서 인정받고. 부러워하고.
최근 이승주 대리는 정말 일할 맛이 났다.
“이 대리.”
디자인팀장이 불렀다.
“네, 팀장님.”
“요즘 바쁘지?”
“조금요~ 근데 괜찮습니다.”
디자인팀장이 슬슬 운을 띄우는데, 딱 봐도 숟가락 얹으려는 모습이었다.
“아니야. 자기 요즘 힘들어 보여.”
“괜찮아요~ 어차피 추가된 스타일 몇 개 없어서요.”
디자인팀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팍스버거 추가 오더 건은 나한테 넘겨. 내가 직접 할 테니까.”
“······.”
“팀원이 바쁠 때면 팀장이 실무를 돕기도 해야지.”
다른 팀원들은 숨죽인 채 디자인팀장의 강도질을 못 본체 했고.
이승주 대리는 짜증이 났지만, 팀장의 지시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럼 F/W 메인 오더를 좀 도와주실래요. 팍스버거 건은 이미 시작을 해서요. 하던 거는 제가 마저 하는 게······.”
“이승주 대리.”
“······.”
“넘기라고.”
디자인팀장은 뾰족하게 말했다.
“그냥 팀장 말에 따라. 뭐 문제 있어?”
이승주 대리는 꽉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팍스버거 콜라보 건은 욕심이 났다.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었다.
‘나도 지혁 씨처럼 해볼까?’
지혁의 무모한 행동은 사내에서 유명했다.
힐끔.
이승주 대리는 디자인팀장의 눈을 마주했다가 곧바로 다시 눈을 깔았다.
‘아, 심장 떨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디자인 의뢰서를 챙겨서 디자인팀장에게 넘기려는데.
“안녕하세요.”
뜬금없이 지혁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빈손이 아니었다. 커피 여러 잔이 든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말과 표정은 하나도 안 친절한데, 이런 건 친절했다.
“자, 받으세요.”
지혁은 캐리어를 막내 디자이너에게 넘겼고.
“어머~ 감사합니다.”
막내 디자이너는 좋다고 커피를 받았다.
지혁은 디자인팀장에게 묵례만 살짝 한 후 곧바로 이승주에게 다가왔다.
“디자인 잘 돼 가요?”
“지혁 씨······.”
지혁의 얼굴을 보자, 이승주 대리는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옆에 디자인팀장이 있으니 뭐라고 말은 못 하지만······ 억울한 마음과 든든한 마음이 혼합 되어 괜히 뭉클해졌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일만 잘하면 돼요.”
“네?”
이승주 대리는 깜짝 놀라서, 지혁을 바라봤고.
지혁은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지혁씨이~”
디자인팀장이 웃으며 다가왔다.
“안 그래도 연락 드리려고 했는데, 팍스버거 추가 오더 건은 제가 직접 디자인을······.”
“안 돼요.”
지혁은 단칼에 거절했다.
“네?”
디자인팀장은 순간 당황했다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말했다.
“팀원 업무량을 보고, 팀장인 제가 조율을 하거든요. 이건 디자인팀 영역이니까요. 허락을 구하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지혁은 입씨름하기 싫었다.
“알겠으니까, 그럼 유 실장님이랑 얘기하세요.”
“······.”
“유 실장님께 원팀 보고했고, 난 원팀 깨지면 콜라보에서 손 떼겠다고 말씀드려놨으니까.”
디자인팀장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유 실장은 임원이며, 대부분의 직원이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찾아가서 담당 바꾸겠다고 말할 자신은 없었다.
“디자인팀장님.”
“네.”
지혁은 그녀만 들리게 귀 가까이에서 말했다.
“우리 양아치 짓은 하지 맙시다. 장사 한 두 번 해봐요?”
디자인팀장은 얼굴이 새파래졌다.
‘뭐야, 본 건가? 언제?'
놀란 눈으로 지혁을 보다가, 침을 꿀꺽 삼키고 시선을 돌리며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말 하는게······ 소문이 사실이구나. 또라이네.’
“이 대리님 수고하세요. 뭐 문제 생기면 말씀 주시고.”
‘내 세력은 확실히 챙긴다.’
지혁은 곧바로 디자인실을 나갔다.
-근데 지혁 씨 왜 온 거야?
-커피 주려고 온 건가?
팀원들은 지혁이 나간 뒤 수군거렸고.
이 한 번의 부딪힘으로 디자인팀장은 다시는 지혁과 엮이고 싶지 않아졌다.
디자인실을 나온 뒤.
지혁은 복도를 걷다가 진동음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지혁 씨, 유 실장님이 찾으세요. 지금 상품전략실로 오세요.’
백 과장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드디어······ 때가 왔군.’
지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상품전략실로 향했다.
***
“지혁아~”
상품전략실.
지혁을 부르는 유 실장의 말투가 달라졌다.
“어서 와~ 이리 앉아.”
약간 거북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앉았다.
“밥은 먹었니?”
“지금 오후 2시인데요.”
“그래, 먹었겠구나.”
지혁은 유 실장을 보며 생각했다.
‘빨간색도 아주 시뻘건 색이더니. 성과 때문에 태도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정도가 심하네.’
유 실장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마치 막냇동생이나 조카를 대하는 것 같았다.
지혁이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고 백 과장이 말했다.
“실장님이 기분이 많이 좋으셔. 오늘 임원회의가 있었는데, 상품본부가 완전히 떴거든.”
“아, 그래요?”
유 실장은 임원들 앞에서 박수 세례받던 걸 떠올리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진짜 뭐라도 다 해주고 싶다.”
“그래요?”
“그래~”
“그럼 일단 승진은······.”
“그야 당연히 시켜주지! 상품본부장님께 특진 건의 드렸고, 흔쾌히 승낙하셨어.”
“잘됐네요.”
유 실장은 지혁의 눈치를 봤다.
“곧 정기 승진식 있거든? 그때 같이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알겠어요.”
그 이후 유 실장의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정판율이 어떻고, 리오더가 입고된 후 일주일 만에 완판된 얘기. 예약판매가 진행되어 고객들이 줄을 선 얘기. 종합일간지에 기사가 게재된 얘기.
유 실장은 계속 말했고, 백 과장도 옆에서 신나서 맞장구를 쳤다.
지혁은 한참을 잠자코 듣다가.
“그래서······ 저 왜 부른 거죠?”
“응? 자네 격려해주려고 불렀지. 약속했던 거 지킬 거라는 말도하고.”
“아······ 그 얘기 하려고.”
지혁은 눈빛을 빛냈다.
다시 한번 베팅을 해야 할 순간.
상품기획 1팀을 장악하고, 더 큰 일을 벌이기 위해서는 해야하는 일이었다.
만약 먹히지 않는다면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리고 약간 빠른 감도 있었지만.
오 부회장에게서 봤던 ‘보라색’을 떠올리면,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혁은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그럼 제가 말씀 좀 드릴게요.”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 있었어? 어서 해봐, 지혁아.”
그의 다정한 말투에 약간 닭살이 돋았지만, 지혁은 꾹 참고 말했다.
“팀 이동을 했으면 합니다.”
“그래? 내가 지혁이 말이라면······ 뭐?!”
유 실장은 동공이 커졌고, 백 과장도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팀 이동이요.”
“······.”
“상품기획팀을 떠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