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혼돈의 시간 (2)
상품전략실.
유 실장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했다.
“안녕하십니까.”
먼저 와 있던 백 과장의 인사에 가볍게 손만 들어 화답한 후, 중앙 접견용 소파에 앉았다.
“백 과장! 이리 앉아 봐.”
“네, 실장님.”
어제 잠을 못 잔 듯, 유 실장의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실장님, 피곤해 보이시네요. 커피 한잔 드릴까요?”
“응? 어, 먼저 얘기 좀 하고.”
유 실장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백 과장, 생각 좀 해봤어?”
“뭘 말씀입니까?”
“뭐긴 뭐야! 상품기획 1팀 차기 팀장이지.”
“아······.”
백 과장은 유 실장을 보며 생각했다.
‘그 고민 탓에 밤잠 설치셨나보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이왕 바꾸는 거 신중하게 잘 교체해야 하는데.”
상품전략실 산하에는 총 4개의 팀이 있다.
그중 상품기획 1팀은 국내 최고의 토종 스포츠 브랜드 ‘스타덕’의 의류 총괄 기획을 담당한다.
상품전략실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 뿐만 아니라, 선도물산 패션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 부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상품기획 1팀에서 4년간 팀장직을 유지한 심 팀장을 교체하는 건이다.
유 실장 입장에서는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실장님, 제 생각에는 순리대로 가는 게 좋습니다. 윤 차장으로 하시는 게······.”
“그 친구는 안 된다니까. 최초에 콜라보 테스트 오더 담당하라니까 몸 사리는 거 못 봤어?”
윗사람은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알고 있다.
“조금만 귀찮아질 것 같으면 몸 사리는 사람한테, 어떻게 리더 자리를 맡기나?”
“하지만 조직 안정성을 위해서는······ 윤 차장 말고 딱히 대안이 없지 않습니까.”
“······.”
유 실장은 아무 대꾸 없이 고심에 잠겼다.
‘뭔가 생각하고 오신 것 같은데······ 왜 말씀을 안 하시지? 내가 먼저 얘기해주길 바라시는 건가?’
백 과장은 유 실장 옆에서 2년을 있었다. 그의 태도를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음······ 그래. 일단 던져보자.’
“그럼 정성재 과장은 어떠십니까? 과장이고 나이가 좀 젊긴 하지만, 상품기획 1팀에 오래 있었고요. 일도 잘하는 편입니다.”
“아니야. 그 친구는 임무 완수 능력은 좋은데, 윗 사람 말에 너무 쉽게 휘둘려. 팀장은 줏대가 있어야 하거든. 리더십을 더 키워야 해.”
백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 게 확실하네. 이렇게 바로 대답하는 거 보면. 그럼, 혹시 장 과장을?’
이제 상품기획 1팀에서 장 과장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 장 과장입니까? 그 친구는 너무 젊은데. 이제 삼십 대 중반인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때 유 실장이 놀라운 말을 했다.
“나이가 뭐 중요한가?”
“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장 과장은 너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자기 일만 잘하는 스타일이라, 팀원들을 아우르지 못할 거 같아.”
백 과장은 대화할수록 오리무중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상품기획 1팀에 있는 인원들은 다 거론된 거 같은데······ 그럼 외부에서 데려올 생각입니까?”
“외부? 그게 가능할까?”
“마땅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네요. 상품기획 1팀은 워낙 특수성이 강해서······ 선도물산의 유일한 스포츠 브랜드 기획팀이라.”
“그렇지. 외부 인사는 어울리지 않지.”
백 과장은 슬슬 짜증이 났다.
‘아오, 진짜.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말씀하시지. 아침부터 진짜.’
백 과장은 더 말하지 않았다.
“······.”
잠시 침묵이 이어진 가운데.
유 실장이 천천히 입을 뗐다.
“근데, 자네 말이야······ 한가지 잘못 얘기한 게 있어.”
“제가요?”
“상품기획 1팀 인원들 다 거론되었다고 했잖아. 아직 거론 안 된 사람 있는 것 같거든?”
백 과장 뭔 소리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이 번쩍 떠졌다.
“네에?!”
“······.”
‘뭐야, 설마?! 미치신 거 아니야?’
백 과장이 눈이 빠질 듯 크게 뜨고 유 실장을 바라봤다.
***
백 과장은 소리치듯 말했다.
“설마······ 오지혁 말씀입니까?!”
“그렇게 크게 말 안 해도 잘 들려.”
‘진짠가 보네? 염두에 둔 기색을 보이더니······ 이거였어?’
유 실장은 백 과장 눈치를 살짝 보고는 말했다.
“너무······ 급진적인가?”
“당연하죠! 어떻게 오지혁을 팀장 자리에 앉힙니까? 아직 사원인 데다가 복직한 지 3개월 됐는데.”
“곧 대리 되잖아.”
“대리 직급이 팀장 자리에 앉는 사례가 선도물산에 있었습니까?”
“······.”
유 실장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근데, 좀 생각을 해보자고.”
“······.”
“오지혁이 3개월 만에 팀 장악하는 거 봤지?”
“······.”
“자네도 걔 이번에 일하는 거 봤잖아. 주도면밀함, 결단력, 실행력······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나? 선수끼리 딱 보면 알지.”
회사 일 한두 번 해본 사람들이 아니다. 게다가 팍스버거 콜라보 건은 상품전략실에서 직접 챙겼었기 때문에 지혁이 일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봤다.
“직급과 나이 떼고 생각해보자고. 걔를 팀장 자리에 앉히지 못할 이유가 있나?”
틀리지 않은 소리였으나, 백 과장은 다른 생각을 했다.
‘완전 오지혁이한테 홀리셨구먼. 팍스버거 콜라보 성과가 크긴 했지만······ 이건 아니지.’
하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유 실장의 생각은 확고해 보였다.
“그리고 상품기획 1팀의 자율성을 좀 줄이고, 상품전략실이 좀 더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어. 이번 일 통해서 내가 실무에 좀 욕심이 생겼거든. 대리급을 팀장 자리에 앉혀 놓으면, 관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잖아. 다른 실장들이 이상하게 보면 인큐베이팅 중이라고 하면 되니까.”
이 얘기를 들으니, 백 과장은 조금 이해가 되었다.
‘이미 주판알을 튕겨 보셨구먼.’
백 과장은 지금 자신의 의견은 중요치 않다고 판단했다. 유 실장 태도를 보니 어차피 결정은 된 듯했다.
“인사상 문제가 안 될까요? 우리 회사에서 대리급이 팀장이 된 적은 없으니까요.”
선도물산에서는 보통 차, 부장급들이 팀장을 한다.
아주 간혹, 과장이 팀장을 맡기도 하는데, 그건 갑자기 공석이 생겼다든지 등의 특수한 경우였다.
“그래서 10시에 인사팀장이랑 미팅하기로 했어.”
백 과장은 어이가 없었다.
‘뭐야, 나한테 왜 물어본 거였어?’
유 실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이제 커피 한잔할까?”
***
오전 10시.
인사팀.
유 실장이 환히 웃으며 인사팀 안으로 들어왔고, 그의 등장에 일하고 있던 인사팀 직원들이 일어났다.
“아유~ 앉아요. 앉아. 나 인사팀장님 보러 온 거니까.”
인사팀장은 유 실장을 발견하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하하. 오랜만에 보네요?”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했고.
“10시 오신다더니.”
10분 전. 좀 빨리 도착했다.
“빨리 만나고 싶어서 왔죠~ 하하.”
인사팀장은 환하게 웃으며 미팅 실로 안내했다.
“하하. 유 실장님은 언제나 환영이죠.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넵~”
미팅 실로 들어온 후.
“조용히 얘기할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인사팀장은 대답 후, 밖에서 보이지 않게 블라인드를 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른 오전부터 호출을 다 주시고.”
“제가 인사명령을 앞두고 있는데, 문제 될 소지가 있을지 문의 드리고 싶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상품기획 1팀에 오지혁 사원이라고 있거든요.”
‘오지혁’이라는 이름에 인사팀장의 눈썹이 꿈틀댔다.
“아, 네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복직한 사원이죠.”
“네, 이번에 대리 승진시키면서 팀장직을 맡기려고 하는데.”
“네?!”
인사팀장은 놀란 눈으로 유 실장을 바라봤다.
유 실장은 그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다음 인사팀장의 말이 좀 이상했다.
“실장님도 아세요?!”
“네? 뭘요?”
유 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지혁이 승진시킨다는데, 알다니? 갑자기 뭔 소리야?’
인사팀장은 그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 실장님도 오지혁 님 출신성분을 눈치챘나? 혹시 지혁 님이 말했나?’
두 남자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 한참을 서로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일단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자.’
인사팀장은 시선을 피한 후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시죠.”
“흠! 네.”
유 실장은 상품기획 1팀의 일련의 상황과 오지혁을 팀장으로 세우려는 사유를 얘기했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인사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알고 그러는 건 아니시구나. 지혁 님이 워낙 일을 잘하셔서······ 역시 낭중지추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괜찮을까요? 전례가 없는 일인데.”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직급에 직위 제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그리고 인사팀장은 더 전례가 없는 일을 제안 했다.
“근데 만약 신경 쓰이신다면 차라리 이번에 대리 말고 과장으로 승진시키시는 건 어떠십니까?”
“과장이요?!”
유 실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웬 미친 소리야?’
“복직한 지 3개월 된 사원을 과장으로 두 계급 특진 시키라고요?! 대리 승진도 파격인데?”
“입사한 지 반년도 안 되어 부장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 그런 경우가 있어요? 금시초문인데요.”
“오 회장님 자제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네?!”
유 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양반이 아침에 뭘 잘 못 먹었나. 비유해도 뭔 말도 안 되는 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가, 유 실장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오지혁이는 오 회장님 아들이 아니잖아요. 일단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문제 될 건 없다는 얘기시잖아요.”
인사팀장은 유 실장의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지혁 님에 대해서 모르시는 게 확실하네. 그냥 출신 얘기해서 과장 승진시키게 할까.’
인사팀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을 접었다.
‘흠······ 아니야. 오너가문에게는 승진 시기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출신을 알리지 않은 건 이유가 있겠지. 오버하지 말자.’
“네,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볼게요. 아, 제가 공식적으로 상신 올리기 전까지는 이 일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래 안 걸릴 거예요.”
“알겠습니다.”
***
덜컹.
유 실장이 들어오자, 백 과장이 바로 달려 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문제없대.”
“그럼 바로 인사명령 상신할까요.”
현재 시각 오전 11시.
유 실장은 결정하고 나면, 실행이 빠른 사람이었고. 이 모든 일이 오전 중에 일어나고 있었다.
“일단 작성만 해놓고, 내가 말하면 올려.”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품기획 1팀 전원 상품전략실로 지금 올라오라 그래. 심 팀장이랑 오지혁이는 빼고.”
“네?! 왜요?”
“인사명령은 내리면 그만이지만, 이번 경우는 팀원들에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어.”
“아······ 오지혁 씨 배려를 해주시네요.”
“배려? 훗. 그렇다고 해두지.”
유 실장은 자신의 조직이 흔들리길 원치 않았다.
선배들 제치고 막내가 팀장이 되는 것이다. 이런 조치가 내려지면 어느 정도 혼란은 어쩔 수 없겠지만, 최소한의 단도리는 하고 싶었다.
“심 팀장과 오지혁이 모르게 조심해서 올라오라 해!”
“알겠습니다.”
잠시 후.
윤현성 차장, 정성재 과장, 장신지 과장.
상품기획 1팀 팀원들이 상품전략실에 들어왔다.
“어서 와. 거기 앉아.”
세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멀뚱멀뚱 실장실 가운데 소파에 앉았다.
“갑자기 오라고 해서 놀랐어?”
가장 선임인 윤 차장이 대표해서 말했다.
“하하. 네. 저희가 여기 올 일은 잘 없으니까요.”
“그래, 다름이 아니라 상품기획 1팀의 인사명령이 곧 있을 건데. 자네들 이해를 먼저 구하고 싶어서 불렀어.”
세 사람은 긴장한 채 앉아 있었고, 유 실장은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왜 불렀는지 궁금하지? 윤 차장. 내가 무슨 얘기할 거 같아?”
윤 차장은 눈을 멀뚱거리며 말했다.
“혹시 오지혁이 팀장 된다는 얘기입니까?”
유 실장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