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
유 실장은 상품기획 팀원들이 놀랄 거로 생각했다.
그런 그들을 달래면서 이야기를 풀어갈 생각이었는데······.
유 실장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사무실에 도청 장치가 있나? 윤 차장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잠시 생각해 봤는데, 팀장 변경 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백 과장과 인사팀장뿐이었다.
‘인사팀장이 윤 차장에게 말했을 리는 없고······.’
힐끔.
유 실장은 백 과장을 바라보았는데.
도리. 도리.
백 과장은 유 실장의 의심을 예상한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스피커이긴 하지만, 인사명령을 내려지기도 전에 말하고 다닐 정도로 개념 없지는 않았다.
윤 차장은 살며시 웃고는 말했다.
“맞군요? 한번 말씀드려 본 건데. 하하.”
옆에 있던 정 과장과 장 과장은 놀라는 눈치였는데. 그 모습을 보니, 어디선가 듣고서 상품전략실에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진짜 그냥 얘기해본 거라고?’
“자네······ 어떻게 알았나?”
유 실장은 이 질문으로 윤 차장의 말을 인정했고, 윤 차장 외에 나머지 두 팀원은 눈이 커졌다.
- 오지혁이 팀장을 한다고요?
- 와 말도 안 돼······.
윤 차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유 실장의 물음에 대답했다.
“최근 돌아가는 분위기가 긴박해 보여서 팀에 변화가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
“평소 팀원들을 상품전략실로 부르신 적도 잘 없는 데다가, 심 팀장님과 지혁이만 제외하고 부르셨죠.”
“······.”
“그래서 짐작했습니다. 요즘 저희 팀이 좀 시끄러웠잖아요. 실장님께서 드디어 뭔가 정리를 하시려는 거 같다는······.”
유 실장은 처음으로 윤 차장이 좀 달리 보였다.
‘이 친구 눈치가 장난 아닌데? 촉도 빠르고.’
“딱 두 사람만 제외한 팀원들을 상품전략실로 불러서 유 실장님께서 직접 이해를 구할 일이라면······ 뭐가 있겠습니까?”
“우와······.”
옆에서 백 과장이 무심결에 탄성을 질렀고.
유 실장도 놀라서 윤 차장을 바라봤다.
‘회사 말고 여의도에 있었으면 더 성공했을 텐데. 판세를 읽는 게 아주······ 정치인이 따로 없네.’
유 실장은 잠시 생각했다가 말했다.
“팀장 교체는 왜 하려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 같고. 오지혁이를 팀장 자리에 앉히는 건 여러분이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어.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한 일이니까.”
유 실장은 세 사람을 얼굴을 살폈는데,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 쉽지는 않을 거야. 그냥 맡은 임무가 다르다고 생각하며 일해주면 좋겠어. 깊이 생각하지 말고.”
“이제부터 지혁이한테 존댓말 해야 합니까?”
“어?”
정 과장의 물음에 유 실장은 멈칫했다.
“팀장한테 ‘지혁아’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근데 저보다 직위는 낮습니다.”
백 과장은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래서 순리대로 가자고 한건데. 족보가 꼬이잖아. 이런 불편한 것들이 한두 개겠냐고.’
사소한 듯하지만, 가볍지 않은 질문에 유 실장은 당황했다.
“그, 글쎄? 그건 자기들끼리 지혜롭게 정해서 하면 되지 않을까?”
‘지혜롭게.’
윗사람들이 대안이 궁색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대답해 버리면 아랫사람으로서는 더 할 말이 없게 되어 버린다.
다시 또 침묵이 흘렀고.
더 할 얘기는 없어 보였다.
유 실장은 슬슬 마무리를 지으려는데, 한 사람이 신경 쓰였다.
‘윤 차장.’
상품기획 1팀에 팀원으로만 10년을 넘고 있었고. 심 팀장 바로 아래에서 부팀장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아무리 업무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한 일이지만, 미안한 마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
“윤 차장, 미안하게 됐네. 그래도 잘 부탁하네.”
유 실장의 말에 윤 차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이대로가 좋아요.”
***
텅 빈 사무실에 심 팀장과 지혁만 있었다.
외근이나 미팅으로 사무실에 빈자리가 생길 수 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두 사람만 남겨놓고 사무실이 비어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심 팀장은 지혁의 눈치를 한번 보고는 생각했다.
‘이것들이 다들 어디 갔지? 동시에 사라지고······ 좀 이상한데?’
지혁 또한 심 팀장처럼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으나,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띠링!
사내메신저 알림음이 울렸다.
‘메시지 : 백이재 과장’
‘지혁 씨, 지금 상품전략실로 오세요.’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결정됐나 보군.’
지혁은 유 실장이 자신을 선택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심 팀장을 한번 바라봤다.
‘마음이 편치는 않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팀장님, 미팅 좀 갔다 올게요.”
“어, 그래.”
어색한 분위기였기에, 지혁이 일어나자 심 팀장은 반기는 눈치였다.
터벅. 터벅.
복도를 따라 걷는데.
윤 차장, 정 과장, 장 과장이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나란히 어딜 갔다 오는 길이지?’
셋이 몰려다니는 일은 잘 없기에 지혁은 이상하게 바라봤다.
근데······ 그들의 태도가 평소와 좀 달랐는데.
지혁의 옆을 지나갈 때 눈을 깔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무리 사회화 과정을 거쳤어도, 사람 또한 동물이기에 본능적으로 몸에 밴 습성이 있다.
‘이건 복종의 의미인데······.’
특히나 오감이 극도로 훈련된 지혁이기에 이런 미세한 모습도 눈에 잘 띄었다.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가던 길을 갔다.
‘상품전략실.’
똑똑.
“오지혁입니다.”
[들어와~]
***
유 실장은 환한 미소로 지혁을 맞았다.
“어서 와.”
“안녕하세요.”
“어~ 그래. 그래. 거기 앉아.”
이렇게 밝은 표정을 짓는 게 지혁은 좀 의아했다.
“왜 불렀는지 짐작하지?
“네.”
“네? 아, 그래.”
지혁의 단답형 대답이 유 실장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살짝 당황했으나, 말을 이어갔다.
“자네의 제안대로 말이야. 심 팀장을 내보내기로 했거든?”
“전 내보내라고 제안한 적 없는데요?”
“······.”
유 실장은 뭔 소리인가 싶어서 지혁을 멍하니 보다가.
‘아, 그렇지. 같은 팀에 못 있겠다고 했지, 내보내 달라고 한 적은 없었지.’
말 그대로 지혁은 심 팀장을 내보내라는 제안을 한 적은 없다.
심 팀장을 내보내는 건 지혁을 상품기획팀에 붙잡기 위한 유 실장의 결정이었다.
“말씀 똑바로 하셔야 해요. 사람들이 오해해요.”
“아······ 그래, 착각했어.”
옆에 백 과장은 이렇게 쩔쩔매는 유 실장의 모습이 보기 안 좋았다.
‘시작부터 이러시네. 나중에 어떻게 컨트롤하시려고.’
“어쨌든, 심 팀장이 이동하는 거로 결정되었으니, 앞으로 딴 생각 말고 상품기획팀에서 열심히 일하면 돼.”
“알겠어요.”
예상했던 일이라 지혁은 별로 놀라지 않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볼게요.”
백 과장은 그 모습도 못마땅했다.
‘저저······ 가보라는 말도 안 했는데, 제멋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유 실장은 황급히 지혁을 불렀다.
“잠깐! 아직 얘기 안 끝났어.”
“네?”
지혁은 의아했다.
‘더 할 얘기가 있다고?’
유 실장을 바라봤는데.
그때 전혀 상상 못 했던,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유 실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가 상품기획 1팀 팀장이야.”
“······.”
지혁은 앉은 자세로 얼어버렸다.
충격을 받은 것이다.
자기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몰랐다.
“뭐가 어째요?”
“야!”
결국 벼르고 있던 백 과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고 말했다.
“말실수를 했네요. 사과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왜 팀장이야? 이건 의도했던 일이 아닌데. 이래도 되는 건가? 미친 거 아니야?’
유 실장의 표정을 살폈는데, 분명 진심이었다.
‘오 부회장을 빨리 끌어내리려면, 지금 속도를 내야 하는 건 맞아. 하지만······ 이건 과속이야. 그리고 난 윤 차장에게 심 팀장을 조사해보라면서 팀장직을 약속 했었어.’
지혁은 약속을 매우 중시한다. ‘그 세계’에서는 신의를 잃는다는 건 시한부 선고를 받는 것과 같았기에. ‘약속’은 곧 ‘목숨’과 같았다.
“사양하겠습니다.”
“왜?”
“복직한 지 얼마 안 됐고요. 여러모로 봐도 제가 팀장을 하기엔 너무 이릅니다.”
“이른 거 없어. 그건 회사가 판단하는 거야. 상품기획 팀원들도 인사 조치에 다 납득했어.”
지혁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었는지, 유 실장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조직을 좀 우습게 보는 거 같던데.”
“······.”
“표현이 좀 이상했나? 그러니까, 문제의식이 많은 것 같다는 뜻이야.”
“네.”
“자네 때문에 최근 조직이 시끄러웠던 거 인정 못 하진 않겠지?”
“······.”
“문제를 두고 보지만 말고, 자네가 직접 핸들을 잡아 봐.”
유 실장은 지혁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야. 난 자네에게 그 정도 욕심은 있다고 보는데?”
“······.”
“당혹스럽겠지. 생각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난 번복할 생각은 없어.”
지혁은 앉은 채로 묵묵부답이었고, 유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나가 봐.”
***
지혁은 복도를 걸어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서 아까 세 사람 표정이······.’
유 실장과 대화를 하고 나니, 오늘 이상해 보였던 여러가지 일들이 이해되었다.
“어?”
사무실 앞에 윤 차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냐?”
“······.”
“우리 얘기 좀 할까?”
건물 옥상.
윤 차장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 복직한 지 이제 3개월쯤 되지 않았어?”
“그 정도 됐을걸요.”
“3개월이면 짧은 시간은 아닌데, 너랑 이렇게 사적으로 보는 건 처음인 거 같네.”
“왜요. 1층에서 커피 마신 적 있잖아요.”
“······.”
한참 서로 침묵을 지켰고.
윤 차장은 담배를 태우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얘기했다.
“오지혁이······ 곧 있으면 이름도 맘대로 못 부를텐데. 지금이라도 실컷 불러야지.”
그는 지혁이 상품전략실에 갔다왔으며, 무슨 얘기를 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이걸로 둘 사이에 상황 설명은 필요없어졌고.
지혁은 윤 차장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윤 차장님, 전 약속은 지켜요.”
“······.”
“많은 걸 잃게 되더라도, 약속은 지킵니다. 염려 마세요.”
“아니.”
윤 차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 약속 지키지 마.”
“네?”
지혁은 놀란 눈으로 윤 차장을 바라봤다.
‘팀장 되고 싶은 거 아니었어?’
평소의 윤 차장과 달랐다.
비굴한 표정도 없었고,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너 같은 팀원 데리고 팀장 할 생각은 없어.”
“······.”
“이번에 심 팀장 일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여전히 지혁은 놀란 얼굴이었지만, 윤 차장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는 게 내 특기야. 너도 잘 알잖아?”
“······.”
“난 지금은 아니야. 네가 왠지 그 생각 할 거 같아서, 난 팀장 뜻 없다고 말해주려고 부른 거야.”
지혁은 생각했다.
‘약속이······ 깨진 건가? 이렇게 말하면 내가 지킬 의무는 없어지는데.’
“후회 없는 거죠?”
약속은 지혁에게 목숨과 같은 의미. 그냥 한번 뱉고, 상황 바뀌면 말 바꾸는 ‘현대의 약속’이 아니었다.
“응 후회 없어. 다만······.”
윤 차장의 음성이 묵직하게 들렸다.
“팀장 되고 나면 나 잘 챙겨줘야 해. 내 인사권자잖아.”
“······.”
“너 나한테 빚진 거다?”
흠칫!
지혁은 놀라서 윤 차장을 바라봤는데.
“하하, 이제 내려가자~”
그의 얼굴은 평소의 비굴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