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끝을 보다 (1)
‘내일 아침까지는 확실하게 의사를 밝히시랍니다. -백 과장-’
퇴근길에 백 과장에게 온 메시지.
지혁은 오늘 유 실장에게 ‘팀장직’에 대한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졌을 때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상황에 몰려서 결정을 할 때, 실수하기 쉽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주도권’
상대방에 의해 만들어진 판에서도 주도권을 가져가야 한다.
‘확실히 유 실장은 심 팀장과는 다르네.’
유 실장이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만든 답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끔 주변을 다 조직해 놓은 후, 지혁을 부른 것이다.
판을 엎지 않는 한, 유 실장이 만든 판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
어떻게 주도권을 가져와야 할지, 고민하다가 집에 도착했고.
수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오늘 좋은 일 있었어?”
“응?”
“내가 아침에 얘기했잖아. 자기 오늘 멋지다고, 좋은 일 있을 것 같다고.”
지혁은 그제야 아침에 수아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팀장직을 제안받았으니, 객관적으로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여자의 촉이라는 게 있는 건가?’
아무 말 없이 몇 숟가락 더 뜨다가,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천천히 말했다.
“나 이번에 대리로 특진해.”
“어머~ 진짜?! 축하해! 대박이다! 호호. 뭐야~ 휴직도 안 하고 다닌 나는 사원인데~”
말은 이러면서도 수아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다음 지혁의 말에.
“그리고 팀장 하래.”
“푸흡! 뭐?!”
입안에 있는 밥알을 뿜어냈다.
지혁은 옷에 튄 밥알을 못마땅한 얼굴로 떼어내었지만, 수아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농담하는 거지?”
“내 스타일 알잖아.”
“그럼 이 미친 소리가 진짜라고?”
“그러니까. 나도 좀 놀랐어.”
“······.”
수아는 숟가락을 놓고, 지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팀장님은?”
“어디든 가겠지.”
“팀장님 직급이 어떻게 되시지?”
“부장.”
“자기는 사원······.”
“아니, 이제 대리지.”
“대리라도! 어떻게 부장이 하던 일을 대리가 해?!”
지혁은 수아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말했다.
“그러게. 왜 대리가 대신해도 될 정도로 부장씩이나 되는 분이 일을 그렇게 했을까.”
“아니, 그 뜻이 아니잖아!”
“······.”
수아의 표정이 심각했다.
“너 입사하자마자, 너무 달리는 거 아니야? 완치판정을 받긴 했지만, 나 아직 완전히 안심 못 했단 말이야.”
“괜찮아. 몸은 이상 없어.”
“그리고 너도 회사생활 해봐서 알잖아. 빨리 올라가는 사람이 빨리 내려오더라.”
“······.”
“대리 직급을 팀장 시킨다는 거. 그런 급진적인 결정을 하는 데는 위에서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거로 보거든?”
“일리 있는 말이야.”
“팀장은 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근데······ 나 잘려도 돼.”
“그러니까······ 뭐?!”
수아는 황당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혹여 잘못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회사 다니고 싶진 않아. 토사구팽 될것 것 같으면, 제 발로 나가지 뭐.”
“······.”
“난 회사생활에 목표가 있어. 지금은 그걸 위해 달리고 싶을 뿐이야.”
수아와 대화를 하면서, 지혁은 마음이 다잡아지는 기분이었다.
약간 급하긴 해도, 목표를 생각하면 망설일 이유가 없는 일이다.
“넌 도대체가······.”
수아는 지혁이 좀 이해가 안 되었다.
태도를 봐서는 회사에 올인한 것 같은데, 말하는 건 언제든 잘려도 상관없다고 하고.
“너 진짜 괜찮은 거지?”
지혁이 돌아온 후 수아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하하. 이제 그 말 좀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자꾸 하게 만드네······.”
지혁은 환하게 웃으며 숟가락을 수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수아는 아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해줄게.”
“갑자기 뭐래······.”
“밥 먹자~”
***
아침 10시.
‘판 엎어 버리면 어떡하지?’
어제까지만 해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혁은 팀장직을 결국엔 수락할 거로 생각했다.
근데, 출근 시간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똑. 똑.
[오지혁입니다.]
“휴우-”
이 목소리에 유 실장은 바로 느낌이 왔다.
‘다행이군. 결심 했나 보네.’
유 실장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게~”
덜컹.
지혁은 들어와서 가볍게 목례 했고, 유 실장은 소파를 가리켰다.
“그쪽으로 앉게.”
“네.”
“백 과장! 자네도 일로 와!”
“알겠습니다.”
소파에 앉자마자, 유 실장은 물었다.
“팀장 하는 거지?”
“네.”
“그래, 잘 생각했어. 내가 뒤에서 잘 봐줄 테니까. 열심히 한번 해 봐. 으하하!”
유 실장은 뜻대로 되어서 기분이 좋은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백 과장도 덩달아 웃었는데.
지혁은 웃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하하······.”
유 실장과 백 과장은 차츰 웃음을 거뒀고, 기다렸던 지혁은 대뜸 물었다.
“심 팀장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심 팀장?”
유 실장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나이도 있고, 회사생활도 꽤 했으니······ 우리 회사에서는 이 시기에 보통 가는 곳이 있지.”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물류 팀이다.
“개발팀 보내시죠.”
“어?”
개발팀은 상품지원실 산하에 있는데, 제품의 초기 단계에서 원단과 부자재의 트렌드분석 및 개발을 담당한다.
인접부서로 생산팀과 고객지원팀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개발팀은 경기도 이천이 아닌, 강남 선도물산 본사 안에 있다.
“상품기획 경험이 많으시니까, 능력 발휘를 잘 하실 거로 생각해요.”
“······.”
“물류는 심 팀장님과 전혀 상관관계가 없잖아요.”
유 실장은 생각했다.
‘얘가 사람 찍어내더니, 막상 보내려니 안되어 보이는 건가?’
하지만, 지혁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 심 팀장은 아직은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왜? 심 팀장 가족 생각이라도 한 건가? 하긴 중학생 딸이 있긴 하지. 거기다 맞벌이까지 하는데, 집에서 이천까지 출퇴근하기는······.”
유 실장은 심 팀장의 동기며 친분도 있기에,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어서 말했는데.
지혁은 그의 말을 잘랐다.
“아니요. 거기까진 생각 안 했고요. 제가 할 이유도 없고.”
“······.”
“상식적인 판단 하에 말씀드린 거예요.”
“그래? 그럼 방금 제안은 못 들은 거로 해도 상관없는 거지?”
“못 들은 거로?”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럴거면 얘기를 안 했죠.”
흠칫. 묵직한 말투에 유 실장은 살짝 놀랐다.
‘뭐야, 진짜 심 팀장을 챙기는 건가? 말하는 거로 봐서는 아닌데.’
“흠! 그래, 일리는 있으니 검토 해볼게.”
“네.”
유 실장은 밝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얘기 끝난 거지? 우리도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두 개 남았어요.”
“두 개나? 음······ 뭔데?”
“하나는 포상에 관해서고요. 하나는 인사명령에 관한 건이에요.”
유 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포상은 합당하면 주면 되는 거고, 인사명령은 뭐지?”
“상품기획 1팀에 결원 발생하잖아요.”
“아~ 그건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지혁은 고개를 살며시 저었고.
유 실장은 지혁의 차가운 눈빛에 흠칫 놀라서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내 팀원을 왜 유 실장님이 생각해두나요? 나와 상의도 없이?”
“뭐?!”
두 사람의 신경전을 백 과장은 옆에서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샤우팅이 10층 A 구역이 아니라, 상품전략실에 들리겠네. 전조가 보여.’
임원 앞에서도 눈도 깜빡 않는 지혁을 보며 백 과장은 고개를 저었다.
‘호랑이 새끼를 들여놓은 게 아닐까 싶다.’
유 실장은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흠! 누구를 데려오고 싶은데? 일단 얘기해 봐. 들어보고 나서 결정할 거니까.”
***
일주일 뒤.
승진식.
승진자의 사기 진작 및 동기부여를 위해, 전 직원이 강당에 모여 함께 축하하는 자리를 갖는다. 선도물산의 전통이다.
뚜벅. 뚜벅.
요즘 가장 핫한 팀.
상품기획 1팀이 강당 안으로 들어오자, 시끌벅적하던 강당이 조용해졌다.
특히, 맨 뒤에 따라오는 오지혁 사원이 시선을 끌었다.
-요즘 10층이 저 팀 때문에 조용한 날이 없다며.
-심 팀장님이야 원래 유명했고, 저 오지혁 사원이 진짜 대단하지.
-어떻게 심 팀장과 맞설 생각을 했을까?
-그래도 이번에 성과 크게 냈잖아.
-상품기획 1팀이?
-팍스버거 콜라보 몰라? 이번에 매출 기네스 세운 거.
여러모로 이슈를 몰고 다니기에, 상품기획 1팀은 많은 직원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동물원 원숭이 된 거 같네.”
장 과장은 시선이 따가운 듯 중얼거렸고. 정 과장이 대꾸했다.
“그래도 팀장 얘기는 없는데?”
그때, 윤 차장이 툭 치고 말했다.
“그건 입 밖에도 내지 마. 특히 사람들 많은 데서는.”
회사에서는 소문이 잘 돌지만, 심 팀장 교체 건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건 여파가 너무 크기에 팀원들도 어디 가서 얘기하기 부담스러웠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윤 차장이 수시로 단도리시키기도 했다.
[이것으로 정기승진을 마치고요. 이어서 특별승진 발표가 있겠습니다.]
-특진?!
-우리 회사에 특진이 있었어?
선도물산은 업무 성과를 내어도 성과급이나 포상을 주지, 특진은 잘 시켜주지 않았다.
[신문에도 낫었죠?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팍스버거 콜라보 신드롬이요.]
사회자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 히트상품의 주역이 사원이라는 게 믿겨 지십니까? 그래서 이번에 특별승진이 결정되었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상품기획 1팀! 오지혁 사원 앞으로 나와주세요!]
-우와······ 대박.
-저 사람이었어?
-사원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진짜 대단하다. 그걸 사원이 담당했다니.
지혁은 앞으로 나와 선도물산 대표 앞에 섰다.
대표는 지혁에게 임명장과 꽃다발을 건네며 말했다.
“축하하네.”
“고마워요.”
지혁의 짧고 당당한 인사말에 약간 당황했지만, 웃으며 말했다.
“자네 얼굴 기억할 거야. 앞으로 잘 성장해주게.”
“곧 보게 될 거예요.”
“······.”
대표는 고개를 갸웃하고 자리로 돌아갔고, 사회자가 소리쳤다.
[다시 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아주 크진 않았다.
진심으로 박수칠 수가 있겠는가. 배 아픈 사람이 더 많을 텐데. 당연한 거다.
[오지혁 대리님. 승진 소감 한마디 하시죠.]
“네.”
오지혁은 마이크를 잡았다.
“상품기획 1팀 오지혁입니다. 박수 주셔서 감사하고요. 다음엔 여러분도 잘하셔서 승진하시죠. 이상.”
-뭐야······.
-누구 놀려?
-푸하핫. 왜? 난 담백하고 좋은데. 입바른 소리 안 하고.
지혁은 마이크를 내리려다가, 다시 들었다.
“아, 그리고. 황성준 대리님, 이승주 대리님은 올라올 준비 하세요.”
편안한 자세로 승진식을 지켜보던 황 대리와 이승주 대리는 갑작스러운 지명에 화들짝 놀랐다.
지혁은 피식 웃었다.
‘약간 티는 내줘야 해. 그래야 챙겨준 걸 알지.’
사회자는 당황한 목소리로 다음 순서를 발표했다.
[아······ 음, 다음 특별포상이 있겠습니다. 대상자는 팍스버거 콜라보 원팀. 오지혁 대리, 황성준 대리, 이승주 대리 이상 3명입니다.]
-오지혁 대리가 챙겨줬다는거야?
-호명되기 전에 말하는 거 봐서는 그런 거 같은데?
-저 사람 보통 아니구나.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져서 강단으로 올라온 이승주 대리.
지혁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정말.”
“내가 일 시작할 때 얘기했죠. 잘 되면 모른 척 하지 않을 거라고.”
이승주 대리는 고마움에 목례로 화답했다.
이렇게 지혁의 선도물산 데뷔 무대는 화려하게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