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끝을 보다 (2)
선도물산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 세 사람.
팍스버거 콜라보 원팀.
모두 한쪽 팔에는 임명장을 들고 있었으며, 가장 앞서 걷는 남자는 다른 한 손에 꽃다발도 들고 있었다.
조금 전에 전 직원 앞에 수상을 받았기에, 주변 직원들은 그들을 알아봤다.
-부럽다······.
-그러게 우린 언제 저런 거 받아볼까?
-포상금을 얼마나 줬을지 궁금하네.
-특진은 어떻고. 나 회사 다니면서 특진하는 거 처음 봐.
직원들의 시선 강탈을 받으며, 세 사람은 문벅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알아본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길을 비켜주었다.
지혁은 이런 모습이 재밌었다.
‘고작 앞에 한 번 섰다고.’
여느 때처럼 지혁이 카드를 꺼내려는데.
“에헤이~ 잠깐!”
황 대리가 막아섰다.
“오늘은 제가 쏠게요. 덕분에 포상금도 받았는데, 얻어먹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이승주 대리가 웃으며 말했다.
“호호. 그럼 황 대리님이 음료 쏘세요. 제가 케이크 살게요.”
“굿!”
지혁은 그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냥 한 명이 다 쏘면 간단할 텐데. 그걸 또 나누네. 참 알뜰하기도 하다.’
“뭐, 그렇게 하시죠.”
“하하. 네! 지혁 씨······ 아니, 오지혁 대리님은 먼저 들어가 계세요.”
“네.”
잠시 후.
황 대리와 이 대리가 음료와 케이크를 들고 왔다.
‘오······ 꽤 푸짐하게 샀네?’
케이크가 다섯 조각 놓여 있었다.
“뭐 이렇게 많이 샀어요?”
“저번에 보니까, 지혁······ 아니, 자꾸 헷갈리네. 호호. 오 대리님이 단 거 좋아하시는 거 같길래.”
지혁은 이 대리가 디자이너라 그런지 확실히 눈썰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세계’에서 단 음식은 매우 귀했다.
그 생각이 박혀 있어서, 습관적으로 많이 찾게 된다.
“호호. 많이 드세요~”
지혁은 눈을 까뒤집고 케이크를 입에 쑤셔 넣었다.
한참을 그렇게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오 대리님.”
황 대리가 지혁을 불렀다.
“네.”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뭐가요?”
“오늘 포상이요. 대리님이 힘 써준 거 알아요.”
“······.”
“사실, 이런 단기 성과 건으로 포상을 받기가 쉽지 않은데.”
“고맙다고요? 정말요?’
지혁의 물음에 황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저 선도물산 온 지 이제 3개월 됐는데. 포상이라니. 하하.”
“포상금 얼마 받았어요?”
“100만 원 들어있던데요? 우리 다 같지 않나요?”
지혁은 200만 원 받았다.
“그렇게 고마우면 저 반 주세요.”
“네?!”
황 대리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고.
이 대리 또한 마시고 있던 커피잔이 멈췄다.
세 사람 사이에 순간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고.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농담이에요.”
“······.”
황 대리는 그런 지혁을 잠시 보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우, 깜짝이야. 오 대리님은 농담을 너무 진지하게 하신다니까.”
“호호. 그러니까요.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으셔.”
사실, 농담이 아니었다. 말을 뱉은 후에 여긴 ‘그 세계’와 다르다는 점을 생각했다.
‘그 세계’에서는 말로만 고맙다고 하지 않는다.
지혁은 커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말했다.
“두 분······ 오늘 오후에 좀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될 거예요.”
황 대리가 반문했다.
“놀라운 소식이요? 그게 뭔데요?”
지혁은 말해줄까 하다가, 어차피 곧 알게 될 거 회사 룰을 따르기로 했다.
“인사명령과 관련된 거라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오 대리님과 관련된 건가요?”
“네.”
황 대리와 이 대리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혁을 바라보았고.
지혁을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앞으로 두 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적어도 제가 선도물산 패션 영역에 있는 동안은요.”
이 대리가 물었다.
“오 대리님 어디 가요?!”
“언젠가는 가겠죠. 선도그룹이 이렇게 큰데, 선도물산에만 있겠어요?”
이 대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생각했다.
‘대부분은 그렇게 다니다가 은퇴하는데. 계열사 이동은 들어본 적이 없어. 근데 뭐······ 오 대리님은 특별한 사람이니까. 모르지.’
이 대리도 이제 황 대리처럼, 지혁을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지혁은 황 대리와 이 대리를 향해 다짐을 받듯이 말했다.
“두 분의 활약 기대할게요. 잘 도와주셔야 해요.”
두 사람은 어금니를 깨물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
지혁이 예고했던 ‘놀라운 소식’.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후 4시경.
전 직원 수신으로 인사명령 메일이 왔다.
[인사명령]
1) 심원석 부장
이동 전 : 상품기획 1팀 팀장
이동 후 : 개발팀 팀원
2) 오지혁 대리
이동 전 : 상품기획 1팀 팀원
이동 후 : 상품기획 1팀 팀장
메일을 본 직원들은 경악은 금치 못했으나, 표현은 하지 못했다.
특히, 10층은 이 충격적인 소식에도 쥐죽은 듯 조용했다.
무엇보다도······ 심 팀장.
그는 메일을 확인한 그대로 얼어버렸다.
이동 전 : 상품기획 1팀 팀장
이동 후 : 개발팀 팀원
마우스를 잡은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팀장직에서 내려오게 될 줄은 생각 못 했었다.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은 들긴했지만, 이렇게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통보’였다.
“허······ 참나.”
심 팀장은 화낼 정신도 없었고.
그저 허탈한 듯 한숨만 쉬었다.
하지만 그에게 어색할 만한 일은 아니다. 경험이 많으니까.
심 팀장이 이런 식으로 보내버린 직원이 열 손가락으로 부족하다.
하지만 본인이 이런 일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다.
정적만 흐르는 사무실.
마치 이 인사명령 메일을 아무도 못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히 이 인사명령 메일은 전 직원에게 발송됐다.
‘띠링’
심 팀장과 가까이 지내는 정 과장이 사내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심 팀장님······.]
[어, 정 과장.]
[······.]
[자네, 알고 있었나?]
[하아······ 죄송합니다.]
그 메시지에서 심 팀장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버림당했다는 걸.
이 일련의 상황이 의도된 것이라는 걸 말이다.
‘인사명령을 따를 거면 따르고, 싫으면 나가라는 말이지.’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어. 어쩔 수 없었겠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심 팀장은 내심 궁금함이 들었다.
‘보통 이런 경우의 다음 수순은 물류 팀 발령인데······.’
[근데, 내가 왜 개발팀이지? 그것도 아나?]
[확실하진 않지만, 오지혁이 건의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 보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챙겨준 거야?’
[걔가 왜?]
[그건 저도 잘······.]
정 과장이 메시지를 보냈다.
[팀장님, 이대로 계실 겁니까?]
[그럼 이대로 있지 않고, 뭘 어떡해?]
[유 실장에게 찾아가서 따지기라도 해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상의도 없이······ 이건 아니죠.]
[따지면······ 뭐 달라지나?]
정 과장은 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어. 그리고 인사명령을 낸 거면, 이미 끝난 거야.]
[······.]
[이미 심장에 칼이 꽂힌 건데, 뭘 더 해.]
지금 상황에서는 심 팀장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받아들여야 했다.
[짐 정리나 해야지 뭐.]
보직 변경일은 내일부터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야. 나 혼자 하고 싶어. 고맙네.]
그 후로 퇴근 시간까지.
아무도 심 팀장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의 상품기획 1팀 마지막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
저녁 8시.
직원들이 모두 사무실을 나간 뒤 자리 정리를 시작했는데, 아직 끝내지 못했다.
5년간 유지해온 팀장 자리.
짐이 산더미 같았다.
“꽤 오래 걸리시네?”
“어이쿠! 깜짝이야!”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갑자기 사람 소리가 들리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혁이었으니······.
“퇴근 안 했어?”
“요즘 공부할 게 많아서요.”
“공부?”
“경력이 짧잖아요.”
심 팀장은 지혁이 퇴근 후 남아서 업무 숙지를 하는 줄은 몰랐었다.
“의외네?”
“먹고 살려면 해야죠. 그리고 은근 재밌네요.”
심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야근이 재밌다고? 하여간 이상한 놈이야.’
“그냥 모르는 거 배우는 게 재밌다는 뜻이에요.”
움찔.
심 팀장은 속마음을 읽은 듯 뱉어내는 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 하여간 얘랑은.’
“이런 건 버리시지. 뒀다. 뭐하게요?”
지혁은 물어보지도 않고, 옆에 다가와서 짐 정리를 도왔다.
“뭐냐? 손대지 마.”
“팀장 자리가 빨리 정리되어야, 제가 이사를 하죠.”
“······.”
“둘까 말까 애매한 건 그냥 버려요. 몇 달이 지나도 안 보는 걸 왜 챙기나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팀장님 관찰하고 있는 거 몰랐어요? 아셨을 거 같은데.”
심 팀장은 질려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혁이 나선 지 30분도 안 되어 자리는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얼추 다 끝났네요. 아, 배고프다.”
“······.”
“일 도왔는데, 밥 좀 사주시죠?”
“뭐 이딴 게 다 있어? 나 놀리냐?”
“왜요. 자기 자리 뺏은 사람과는 밥 못 먹겠어요?”
“······.”
심 팀장은 황당해서 지혁을 바라보았고.
지혁은 옷을 챙기며, 말했다.
“가시죠. 싫으면 제가 사드릴 테니까.”
***
선도물산 길 건너의 24시간 순댓국집.
9시가 거의 다 된 시간.
강남역 먹자골목과 가까운 이곳은, 술 취한 사람들이 2차로 많이 오는 곳이다.
그들 틈에 늦은 시각까지 일한 두 남자가 마주 하고 앉았다.
팀장과 팀원으로 3년 전에 만났으나, 이렇게 단둘이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심 팀장이 본인 잔을 채운 후 술병을 내려놓자, 지혁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너 술 안 먹잖아.”
“회식 때 안 먹는다고 했죠.”
“······.”
“왜요? 술 아까워요? 아까부터 보니까 은근 속 좁으시네.”
“까불래? 자! 받아!”
두 남자는 각자의 순댓국을 안주 삼아서 주거니 받거니.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 4개가 쌓였다.
심 팀장은 알코올이 들어가니, 그나마 참담했던 기분이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팀장 돼서 좋냐?”
“······.”
“또라이 새끼.”
심 팀장은 약간 혀가 꼬였으나, 정신은 멀쩡했다.
“제가······ 갈 때 되니까, 심 팀장님을 좀 이해하게 되네요.”
“뭐?”
“손에 쥔 걸 놓기가 싫었을 뿐, 그다지 나쁜 분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협력사와의 관계도 깔끔하고.”
“협력사? 갑자기 뭔 소리야?”
지혁은 피식 웃고는 심 팀장의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저 밉죠?”
“······.”
“괜찮아요.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이 말씀은 드리고 싶네요.”
지혁은 심 팀장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심 팀장은 이 말에 약간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냥······ 이렇게 결론이 나버린 거예요. 가서 잘 지내시길 바래요.”
“얄미운 자식······.”
심 팀장은 술잔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많이 먹었다.”
“네.”
지혁이 먼저 일어나 술값을 계산하려 하자, 심 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멈춰! 어디 건방지게! 나 아직 네 팀장이야. 자정 안 지났어!”
“······.”
심 팀장은 지혁을 밀치고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