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누군지 알고 있다
퇴근 후 집에 가는 내내, 인사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 회장님도 본관이 연일이시거든요.’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연봉계약서와 직급 수당 때문에 잠시 정신이 나갔었다.
‘분명 뭔가 있는 눈치였는데, 조만간 인사팀장 좀 불러내 봐야겠네.’
이번 주는 정말 전쟁 같았다.
승진하고, 팀장이 되고.
심 팀장도 보내고. 장 과장도 보내고.
격렬한 전투 뒤에 휴식은 더 달콤한 법.
금요일 저녁. 집에 가는 길이 참 포근하게 느껴졌다.
‘이틀간 전열을 가다듬어야지.’
집에 가는 길이지만, 벌써 다음 주 월요일이 기대되었다.
집 도착.
덜컹-
“어?”
현관문 앞에서 어머니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어머니?”
“아이고~ 우리 오 팀장님~”
어머니는 지혁을 끌어안고 발을 동동 굴렀다.
지혁은 몹시 당혹스러웠다.
“아이고~ 장하다! 잘해~”
“······.”
“이게 웬일이니~ 정말~”
지혁은 칭찬 받는게 좀 민망했다.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긴! 우리나라 최고 대기업 선도그룹의 팀장님인데!”
“수많은 팀장 중에 한 명일 뿐이에요.”
“아냐. 아냐. 엄마 주변엔 한 명도 못 봤어.”
어머니는 신나서 얘기했다.
“선도그룹 팀장이면, 대한민국 상위 0.5%는 되지 않을까?”
어떤 기준에서 상위 0.5%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혁은 지금 월세로 살고 있다.
“어머니, 월세 사는 사람이 무슨 상위 0.5%에요.”
“암~ 그 정도는 충분히 되고 말지. 잘난 아들~ 우리 잘난 아들~”
어머니는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했고, 연신 지혁을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혁은 어머니를 본 후, 궁금해하는 얼굴로 수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내가 승진 축하 파티하려고 연락 드렸어.”
“아······.”
“어서 들어와. 오늘은 한우 등심이야.”
***
지글. 지글.
소고기가 노릇노릇 익어가는데.
“자, 모두 잔 드세요!”
수아는 잔을 들고일어났다.
“오지혁 팀장님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수아의 선창에 어머니는 큰 소리로 따라 외쳤고.
지혁은 민망함에 고개를 숙이고, 잔만 부딪쳤다.
‘아······ 쉽지 않아.’
“오 팀장님! 쭉 들이켜~ 쭉~”
“수아야, 그냥 자기라고 부르면 안 돼?”
“안돼. 오늘은 공식행사니까.”
어머니도 지혁을 팀장이라 불렀고, 심지어 존댓말까지 했다.
“오 팀장님, 뭐 받고 싶은 선물 없어요?”
“어머니······.”
“뭐든 얘기해 봐요. 우리 오 팀장님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근사한 거 하나 해드리고 싶으니까. 우리 오 팀장님.”
지혁은 어머니를 보다가.
문득 말끝마다 ‘우리 오 팀장’을 붙이는 게 재밌어서, 웃음이 터졌다.
“하하. 참나.”
“뭐가 웃기죠? 우리 오 팀장님? 엄마는 진지한데.”
지혁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렇게 기뻐하시는 것만으로도 저한텐 선물이에요.”
“······.”
“몇 년간 걱정만 끼쳐드렸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깐 너무 좋아요.”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지려 해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이 좋은 날 눈물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우리 오 팀장님, 심성도 좋으셔. 선물은 엄마가 주고 싶은 거 할게요.”
“하하. 네. 알았으니까. 인제 그만 좀 하세요~ 어색해요.”
“우리 오 팀장······.”
식사하는 내내 두 여자의 ‘오 팀장’ 타령은 계속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거실에 앉았다.
어머니는 지혁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지혁이가 표정이 좀 돌아왔구나.”
“그래요?”
“그래~ 저번에 봤을 때는 저승사자 같더니만.”
“······.”
“이제 웃기도 하고. 저녁 먹을 때 보니 잘 웃더라.”
자신의 변한 모습은 스스로가 잘 알 수 없다. 보통 변화는 주변 사람들이 캐치한다.
“그래 보인다니 다행이네요. 거기서 적응했던 것처럼, 이제 현실 세계에 적응해야죠.”
아리송한 말이었지만,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정신이상일지, 혹은 어떤 특별한 일을 겪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나간 일. 이제 잘 적응해 가는 사람에게 과거 일 꺼내어 물어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오늘 주무시고 가실 거죠?”
“에이~ 집에 가야지. 너희들 불편하잖아.”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혀 안 불편해요. 주무시고 가세요. 내일 회사도 안 가는데요.”
어머니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럴까?”
***
수아는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고.
거실에 지혁과 어머니만 남았다.
TV를 보고 있었는데.
“어머니.”
“응?”
“제 본관이 연일이잖아요.”
“본관?”
“네. 저 연일 오 씨 맞죠?”
어머니는 곁눈질로 지혁을 바라봤다.
“맞지. 그건 왜?”
“인터넷 검색해보니까, 굉장히 희귀한 성씨더라고요? 저야 뭐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살았지만.”
“그러게. 왜 지금 신경을 쓰니?”
지혁의 오감은 극도로 발달되어 있다.
지금 어머니의 말투가 약간 달라진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얘기할까 하다가······.
“선도그룹 오종건 회장 아세요?”
“그 양반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사람인데.”
20년 넘게 국내 최고 대기업 그룹의 총수를 맡고 있는 사람. 대한민국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분도 연일 오 씨더라고요?”
흠칫.
어머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떻게 알았니?”
‘어떻게 알았냐고? 질문이 좀 이상한데.’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인사팀장이랑 미팅하다가, 우연히 들었어요. 그리고 인터넷 치면 나와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그래?”
지혁은 본인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 때문에 일부 사람들로부터 오 회장 일가라는 오해를 받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이용할 생각만 했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사실이 아니니까. 근데······.
‘뭔가 이상한데?’
어머니 태도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고.
‘근데, 이걸 뭐라고 물어봐야 해. 물어보는 거 자체가 이상한데.’
의구심을 해소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질문을 찾기가 어려웠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고······ 친척은 없고.
지혁이 고민하는 사이.
“자기야~ 어서 씻어. 빨리 씻어야 어머님도 씻으시지.”
마침, 수아가 나왔다.
어머니는 살짝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지혁은 그것도 캐치했다.
“늦었다.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어서 씻으렴.”
지혁은 잠시 고민했으나,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내가 어떻게 오 회장이랑······ 요즘 주말 드라마를 많이 봤더니.’
불필요하게 예민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네 어머니, 저 먼저 씻을게요.”
***
월요일 아침.
지혁은 여느 때와 같은 시각에 출근했다.
“팀장님, 오셨습니까.”
지혁이 들어오자마자, 문 대리가 가장 먼저 일어나 인사했고.
지혁은 손짓을 하며 말했다.
“앉으세요. 그리고 ‘님’은 빼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호칭 정리를 해서 그런지, 지난주 금요일처럼 어색하진 않았다.
지혁이 자리에 앉자, 윤 차장이 다가왔다.
“오 팀장.”
“네.”
“이거 마셔.”
따뜻한 캔커피였다.
“뭡니까?”
“그냥~ 출근하고 담배 피우러 나갔다가 오 팀장 생각나서 사 왔지.”
“뭘 생각을 하고 그러세요. 남자끼리.”
“엇······ 지금 농담?”
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농담으로 들릴 수가 있구나.’
“그렇다 치죠.”
“오늘 하루도 화이팅~”
윤 차장은 자리로 돌아갔다.
‘저 양반이 접근하면 뭔가 꺼림칙 하단 말이야.’
‘그 세계’였다면 이 캔커피 버렸을 것이다. 독이라도 탔을지 모르니까.
딸깍!
지혁은 캔커피를 따서 마시고 있는데.
띠링!
‘사내 메신저 : 백 과장.’
[오 팀장! 여태까지 안 오고 뭐 해?!]
[네?]
[팀장 미팅!]
[팀장 미팅이요? 난 들은 게 없는데.]
[고정 스케줄을 얘기해 줘야 하나? 빨리 와! 다들 기다리고 있어.]
[아, 네.]
지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상품전략실.
유 실장을 중심으로 바로 왼쪽 자리는 비어있고, 오른쪽에 상품기획 2팀장 조원준 부장이 앉아있었다.
그 뒤로 상품기획 3팀장과 4팀장이 앉아 있다.
“유 실장님.”
3팀장이 유 실장을 불렀다.
“네.”
“외압이 있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니면 1회성 본보기용 인사라든지.”
옆에 있던 4팀장도 맞장구를 쳤다.
“요즘 그룹 인사팀에서 뉴프런티어 프로젝트 한다던데? 일부러 젊은 직원에게 높은 직급 일을 시키는······.”
유 실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3팀장과 4팀장은 추측성 발언들을 계속 쏟아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상품기획 2팀의 조 팀장이 말했다.
“두 팀장님은 D 구역에 계시잖아요?”
“······.”
“10층 A 구역이 근 석 달 간 어땠는지······ 소문만 들으셨죠?”
조 팀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난 옆에서 봤거든요. 오지혁이······ 아니지, 오 팀장이 어떻게 회사생활 했는지를.”
-소문이 진짜예요?
-오 팀장이 그렇게 빡세요?
-나이도 어리다던데?
조 팀장은 한마디 했다.
“결론이 말해주잖아요. 심 팀장이 갔어요.”
“······.”
“그걸로 이유는 충분할 것 같은데.”
상품기획 1팀과 2팀은 상품전략실의 메인 부서이며, 매출 규모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유 실장의 오른팔이 조 팀장이라면, 왼팔은 심 팀장이었다.
그런 그가 복직한 지 3개월 된 28살 먹은 팀원에 의해 이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두 분 입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오 팀장은 벽에도 귀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벽에 뭐요?”
똑똑.
[오지혁입니다.]
때맞춰 들려온 지혁의 목소리에 3팀장과 4팀장은 깜짝 놀랐다.
조 팀장은 피식 웃었다.
덜컹.
지혁은 문 열고 들어온 뒤, 고개를 숙였다.
“늦었네요. 팀장 미팅이 있는 줄 몰랐어요.”
유 실장은 바로 왼편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거기 앉게.”
“네.”
지혁이 앉은 뒤.
“······.”
회의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새로운 사람이 있으니 어색했다.
통상 이런 자리에서는 막내가 살갑게 먼저 인사하며 다가가기 마련인데.
지혁은 그런 막내가 아니었다.
보다 못한 백 과장이 나섰다.
“오늘 새로운 팀장님이 오셨죠?”
그제야 모두 고개를 들었다.
“얼굴 아는 분도 있고, 모르는 분도 있을 텐데. 우리 간단히 소개하는 게 어떻습니까? 뉴페이스 오 팀장님부터.”
유 실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럽시다. 하하. 회의는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되니까.”
그제야 팀장님들은 등받이에 어깨를 기대고 긴장을 좀 풀었고.
지혁이 소개를 시작했다.
“오지혁이라고 합니다. 나이 28세. 직급은 대리. 상품기획 1팀장입니다.”
“······.”
그리고 더 말이 없었다.
또 정적이 흘렀고.
백 과장이 다시 나섰다.
“하하. 하여간 말 참 짧아. 그럼 다음 2팀장 님부터 소개를······.”
지혁이 말을 잘랐다.
“세분은 서로 잘 아실 거고, 저 또한 세분을 잘 알고 있으니, 소개는 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바로 회의하시죠.”
3팀장이 웃으며 물었다.
“날 잘 안다고요? 어떻게? 난 오 팀장님 처음 보는데.”
지혁은 피식 웃고는 보험광고 보장설명의 빠르기로 말했다.
“유희원 부장. 나이 45세. 공채 31기. 상품기획 3팀장. 현재 상품기획 3팀은 SPA브랜드를 맡고 있는데, 실적 부진으로 올해만 2개 브랜드를 접었죠. 유 팀장님은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으며. 현재 와이프는 두 번째 결혼으로······.”
“그만! 그만!”
3팀장은 식겁한 얼굴로 지혁이 더 말을 못하게 막았고.
꿀꺽.
어디선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