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당신을 부른 이유
지혁이 말하는 수준을 봤을 때, 사돈의 팔촌까지 가족사가 다 나올 것 같았다.
‘뭐 하는 놈이지? 이건 잘 아는 정도가 아니잖아.’
3팀장은 본인의 재혼 이력까지 알고 있는 지혁이 놀라웠다.
회사에 재혼 사실은 알리지 않았으며, 친구 중에도 아는 사람은 몇 명 없다.
“다, 당신 뭐야? 내 뒷조사 한 거야?!”
“글쎄요······ 그걸 뒷조사라고 해야하나.”
지혁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저와 함께 일할 분들에 대해 좀 알아봤을 뿐이에요. 불법적인 방법은 없었으니까. 염려 말고요.”
여전히 태연자약한 지혁을 보며, 3팀장은 질린 표정이었고.
다른 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약간의 행동에서 느껴지는 게 있었다.
‘보통 놈이 아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이십 대의 팀장이어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유 실장은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려고 웃으며 말했다.
“자자. 우리 3팀장은 염려 말아. 여기 있는 사람 아무도 못 들었어. 그렇지?”
그 말에 다른 팀장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유 실장은 웃으며 말했다.
“요즘 한번 정도는 갔다 온 것도 아니래. 두 번은 갔다 와야······.”
분위기를 풀려고 한 말이었으나, 3팀장은 계속 재혼 얘기가 거론 되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럼······.”
각자 소개를 하자며 주도했던 백 과장이 입을 열었다.
“소개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서로 잘 알고 계신 거 같으니까.”
“······.”
나머지 두 팀장도 지혁이 어디까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을지 궁금했으나.
그걸 여러 사람 앞에서 확인받고 싶지는 않았기에 입 다물고 있었다.
“흠! 그럼 회의 시작할까?”
유 실장이 운을 떼자, 백 과장이 말했다.
“오늘 오 팀장이 팀장미팅 처음이니까요. 주간 보고는 4팀장부터 해서 역순으로 가는 거로 할게요. 4팀장님? 주간보고 시작하세요.”
***
“······전주 대비 판매율 10% 감소하였습니다. 폐업된 매장은 정리가 진행되고 있으며, 지난주에 상가 보증금 반납 완료했습니다. 금주에는 명동점 폐업이 예정되어 있으며······.”
주간보고는 4팀장에 이어 3팀장이 진행 중이었다.
상품기획 3팀은 SPA브랜드를 기획하는데, 온갖 암울한 소식뿐이었다.
한때는 SPA가 가장 핫했는데, 현재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유 실장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시장 상황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해도 너무 하네.”
“······.”
“그 정도로 손님이 없나?”
“네. 일부 매장을 빼면 대부분 마이너스입니다.”
“심각하네······.”
“네.”
“그럼 상황이 안 좋으니, 이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건가?”
유 실장의 목소리가 올라갔고. 그와 동시에 3팀장의 고개가 잘 익은 벼처럼 숙어졌다.
“SPA브랜드 중에서 성과를 내는 경쟁사도 분명 있을 텐데? 아닌가?”
“······.”
“왜 대답을 안 해. 내 말이 틀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결론은 ‘죄송합니다’.
이 말은 심 팀장만 잘하는 말이 아니었다.
3팀장이 이 말을 좀 더 많이 했으나, 먼저 보고를 시작한 4팀장 역시 마지막은 ‘죄송합니다’였다.
“상품기획 2팀 보고 드리겠습니다.”
2팀장인 조원석 팀장은 달랐다.
보고 내용은 깔끔했고, 죄송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좀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유 실장이 그를 약간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일 좀 하는 사람 인가 보군.’
지혁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느 세계든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일 잘하는 사람은 함부로 못 대한다.
즉, 자기 분야에 탁월한 사람은 그 누구도 낮게 보지 못한다.
회사라면 업무 능력이 될 것이고, 전장에서는 전투력이 될 것이다.
“자, 다음. 막내 오 팀장.”
유 실장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보았고.
다른 팀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지혁이 뱉은 말은.
“주간보고 드릴 게 없어요.”
“······.”
잠시 사무실 안에 정적이 흘렀고.
백 과장이 눈치를 주며 말했다.
“이봐, 없어도 뭐라도 말해야지.”
“없는 걸 얘기하면 허위보고 아닌가요?
일부 팀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유 실장의 표정이 구겨졌고, 백 과장이 다시 말했다.
“흠! 오 팀장. 아무리 오늘 팀장으로 첫 출근이라도 다른 팀으로 옮긴 것도 아닌데, 주간보고를 못 한다는 건 좀······.”
“수치적인 내용 말고는 없어요. 전주 금요일에 전달 드린 주간보고서에 다 있는 내용이잖아요. 전주 대비 매출상황, 콜라보 진행 상황 다 아시잖아요? 모르세요?”
“아, 알기야 하지.”
“네, 이상입니다.”
찬바람이 느껴질 정도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
팀장들은 고개를 저었고, 조 팀장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보통 놈이 아니야.’
하지만 유 실장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팀 운영 계획 같은 거 세운 건 없어?”
“없어요.”
“없어?! 없다고?”
유 실장의 눈이 커졌다.
‘뭐 이딴 게 다 있지?’
지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아, 너무 짧게 말해서, 오해 살만했네요. 다시 말씀드리죠.”
지혁은 또박또박 말했다.
“아직은 없어요.”
'그래, 처음이니까. 그만하자.'
유 실장은 월요일 아침부터 지치는 기분이 들어서 회의 종료를 선언해버렸다.
“오늘 주간 회의는 여기까지만 합시다.”
***
생산팀.
저벅. 저벅.
왠지 모를 음침한 기운에 생산팀원들은 걸음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는데.
“엇~ 오 팀장님~”
황 대리는 반가워서 곧장 일어났고. 다른 팀원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중에 지혁보다 어린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생산팀의 상위부서라고 할 수 있는 상품기획 1팀의 팀장이다.
다들 고개를 숙였고, 생산팀장 하재웅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지혁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하 팀장도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팀장 되시고 첫 방문이네요.”
하 팀장은 원래 지혁에게 반말을 했었다.
하지만 협조부서 팀장에게 예전처럼 후배 대하듯 편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지혁 또한 자연스럽게 이 태도를 받아들였다. 그게 순리니까.
“팀장 되고서라······ 네 뭐 그렇긴 하네요. 그냥 볼 일이 있어서 온 거긴 한데.”
생산팀 옆의 기술연구실, 캐드실 등 주변의 다른 팀 사람들도 힐끔거리며 지혁을 보았다.
만인 앞에서 특진과 포상을 받은데다가, 핵심부서의 최연소 대리 팀장. 시선을 받을만 했다.
지혁과 얘기 나누는 하 팀장도 시선 때문에 괜히 부담이 느껴졌고, 용건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황 대리님이랑 차 한잔하고 싶어서 왔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 대리에게 향했고.
그는 어깨가 절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저평가 우량주에 줄을 섰던 건가.
-황 대리 그렇게 안 봤는데······ 똑똑하네.
-황 대리와 친하게 지내야지.
주변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지혁은 신경쓰지 않고 할 말을 했다.
“그리고 하 팀장님.”
“네.”
“제가 좀 구상하고 하는 게 있어서 그런데, 황 대리님 저희 팀으로 파견 근무 좀 시켜주시면 안 될까요?
“파견이요?”
“네, 하루에 반나절 정도만요.”
하 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황 대리마저도 갑작스러운 요청이 당혹스러웠다.
‘아니, 다른 회사도 아니고,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데······.’
“같은 층에 근무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당분간 제가 수시로 생산 지식을 문의해야 하거든요.”
“······.”
“나중에 잘 되면 팀장님께 감사 표시 할게요. 협조해 주세요.”
하 팀장은 지난주 강단 위에서 포상을 받던 황 대리와 이 대리를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한다면 해줄 것 같은 지혁의 이미지 덕분에, 이런 부담스러운 제안을 하 팀장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황 대리에게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올까요?”
***
“와~ 뭐에요? 저한테 말도 안 해주시고? 깜짝 놀랐어요.”
아지트에서 황 대리는 담배를 태우며 말했다.
“왜요? 싫어요?”
“네?”
황 대리는 순간 멈칫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오 팀장 옆에 있으면 부담스럽긴 하지.’
“에이~ 아니요. 왜 싫겠어요. 하하.”
지혁은 황 대리의 마음을 읽고 있기에, 피식 웃고는 말했다.
“걱정 마세요. 부담 많이 안 줄 테니까.”
“네? 아, 네.”
지혁은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그건 알아봤어요?”
“아······ 네, 아직 접촉 중인데, 입질을 안 하네요.”
지난주 금요일, 보직 이동 발표가 난 직후, 아지트에서 황 대리를 만나 지혁은 요청한 게 있었다.
‘너튜버 화가. 홍썬에게 접촉해 보세요.’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디자인 관련 건이라고만 얘기했었다.
상품기획 1팀의 히트 상품을 만들기 위한 단기 계획은 구상되어 있었으나.
주간보고에서 일부러 아무 계획 없는 듯 얘기했던 거였다.
현재 지혁은 많은 관심을 받는 상황이기에.
팀장이 다 모인 자리에서, 패를 까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유 실장도 뭔가 꿍꿍이 중인 거 같고.
“근데······ 설명 안 해주실 거예요?”
“······.”
“이 프로젝트 때문에 저 상품기획팀으로 파견 요청한 건가요?”
지혁은 대꾸 없이 캔 커피만 마셨다.
“궁금한데······.”
“때가 되면 알려줄게요. 지금은 홍썬과 접촉만 해보세요. 말씀드렸던 대로 이건 극비인 거 잊지 마시고.”
“알겠습니다.”
그래도 황 대리가 회사생활 5년 차다. 눈치가 있었다.
‘아무래도 디자인 외주를 하려는 거 같은데.’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지혁이 기다리라고 하니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우려되는 부분은 얘기해주는 게 좋겠다 싶었다.
“오 팀장님.”
“네.”
“접촉을 시도한다는 건, 프로젝트를 이미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
“디자인과 관련된 건이라면요. 저희 회사에 디자인팀이 있잖아요. 사전에 협의를 구하고 진행하는 게 뒤탈이 없지 않을까요?”
지혁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아니면 유 실장님께라도 사전 컨펌을 받던지······.”
“제가 팀원인가요?”
“네?”
“저 팀장이에요. 팀의 장.”
“······.”
“팀장이 프로젝트 하나 진행하는데, 여기저기 컨펌받고 해야 하나요?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요?”
“아니······ 저······.”
황 대리는 일반 회사원의 상식으로 말하는 거였고, 지혁은 보편적인 상식에서 얘기하는 거였다.
“결과로 보여주면 되는 거지. 불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이것저것 신경쓰나요? 과정 따지다가 아무것도 못 하겠네.”
“아······ 네.”
황 대리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말했다. 오 팀장님은 특별한 분이지. 근데······ 조만간 또 시끄러워질 것 같네.’
지혁은 약간 언성이 올라갔다는 걸 인지하고는 헛기침을 했다.
“흠! 이상하게 황 대리님과 얘기만 하면 속내를 비치게 되네. 편해져서 그런 거예요. 오해는 마시고. 갑시다.”
“네.”
두 남자는 나란히 인도를 따라 회사건물을 향해 걸어갔고.
황 대리는 문득 떠올라서 물었다.
“근데, 오 팀장님.”
“네.”
“아래 팀원들 많잖아요. 굳이 이런 일을 저한테 시키시는 이유가 뭔가요?”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저 사람 쉽게 안 믿어요.”
“······.”
“현재로서는 황 대리님만이 내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니까.”
‘엇······.’
황 대리의 심장이 콩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