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만남을 기다렸다 (1)
황 대리는 지혁이 무심하게 툭툭 던지듯 챙겨주는 말이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런 것 좀 배워야 하는데. 김진아 과장한테 써먹게.’
황 대리는 지혁이 연결해준 팍스버거 김진아 과장과 요즘 연락 중이다.
김진아 과장 생각이 나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오 팀장님.”
“네.”
“팍스버거와는 내년에도 하실 거죠?”
올해 FW를 함께 진행 중이다.
김진아 과장은 내년도 콜라보 기대 중이라는 말을 황 대리에게 종종 했었다.
“팍스버거 측은 굉장히 기대하고 있던데. 의류 콜라보 때문에 팍스버거 브랜드 인지도도 오르고, 매장 매출도 크게 상승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잘됐네요.”
하지만 지혁은 황 대리의 물음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황 대리는 지혁의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그 계획에 대해서는 말해주기 껄끄러운 건가요?”
“껄끄럽다기보다는······ 팍스버거와는 내년 계획이 없어서요.”
“네?!”
황 대리는 지혁의 대답이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잘 되고 있는데. 내년에 안 한다고?’
“경쟁사들이 분명 같은 방식으로 따라할 거고요. 내년에도 똑같이 하면 차이를 만들어내기는커녕,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어요.”
“······.”
“팍스버거 콜라보는 놀라운 성과를 낸 걸로 아름답게 끝맺어야죠. 단물 다 빼먹은 후 버려지는 결말이 아니라.”
“아······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한 번 정도는 더 하셔도 괜찮을 텐데. 경쟁사들이 아무리 따라 한다 해도 고객들은 한 번 정도는 오리지널을 더 원해요. 제가 생산 전문이지만, 전 회사에서 영업 경험이 있어서 좀 알거든요.”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이득을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상징성이라는 것도 생각해야죠.”
“······.”
“팍스버거 콜라보는 선도물산에서 우리의 첫 성과거든요. 폭발적인 성공. 그 상태로 끝맺어야 해요.”
얘기를 들어보니 황 대리는 지혁이 왜 안 하겠다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 또한 타당한 이유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김진아 과장이 실망 많이 할 텐데.”
“······.”
“우리 좋은 관계 갖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지혁은 피식 웃었다.
“비즈니스에 그런 게 어딨나요. 각자 살길 찾는 거죠. 뒤통수만 안 쳐도 감지덕지지. 김진아 과장님께는 제가 직접 말씀 드릴 거예요.”
“아······ 네.”
황 대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며칠 전에 서로 축하하며 성과를 나눴는데, 벌써 이별을 얘기하다니.’
“빨리 얘기해서 준비할 시간을 주면 돼요. 그분도 우리와 이별 후에 더 좋은 짝을 만날지 모를 일이죠.”
황 대리는 지혁을 바라봤다.
‘멋있는 듯하다가도. 이럴 때 보면 정나미가 뚝뚝 떨어진다니까.’
***
다음날부터 황 대리는 오후에 3시간 정도는 상품기획 1팀에서 근무했다.
팀원들은 처음엔 의아했지만, 지혁과 황 대리가 가깝게 지내는 걸 알기에 그러려니 했다.
황 대리가 일 하러 오는 것 보다도, 둘이 대화하는 게 이상했는데.
두 남자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면 안 되는 것처럼, 비밀 얘기 하듯이 업무 대화를 했다.
지혁은 그렇다 치고, 황 대리까지도 그 모습이 익숙해 보이는 게 신기했다.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갔다.
든 사람 자리는 몰라도 난 사람 자리는 안 다는 말. 회사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5년 간 팀장으로 있던 사람이 떠났지만, 아무도 심 팀장을 기억하지 않았다.
각자의 일들을 쳐내고, 바쁜 하루를 살아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지혁 또한 마찬가지였고.
‘뭔 놈의 회의가 이렇게 많아?’
하루 중 자리에 앉아 있는 시간이 반도 안 됐다.
팀장 미팅, 22년도 봄 상품 기획 미팅, 본부장 미팅, 디자인실 미팅 등등······.
하루에만 미팅 일정이 최소 두 개 이상이었다.
‘심 팀장이 자리에 잘 없던 게 이유가 있었구나.’
물론 그는 과하게 자리를 오래 비우긴 했지만, 무조건 농땡이 부린 이유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미팅 참석 좀 안 할 수 있을까.’
상급자 미팅을 가보면 내용 전달받는 게 주였고, 협조부서 미팅에서는 하소연 듣다가 오는 게 태반이었다.
지혁의 의사결정을 필요로 하는 미팅은 잘 없었다.
‘시간이 아깝다. 이놈의 미팅.’
팀장으로서 일주일을 보낸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미팅 전담이라도 세워야지, 안 되겠어.’
“윤 차장님!”
“응? 어?”
지혁이 팀원을 부르는 경우는 잘 없기에 윤 차장은 눈을 끔뻑거리면서 다가왔다.
“왜 불렀어?”
“차장님께 특별 임무를 부여하려고요.”
“어. 얘기해.”
“앞으로 팀장 대행으로 미팅 참석하세요.”
“뭐?!”
윤 차장은 기겁했다.
“아우~ 싫어~ 나 미팅 진짜 싫어해.”
윤 차장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회사원은 미팅을 싫어한다.
“왜 하필 나야~ 여기 사람 많잖아~”
윤 차장은 진심으로 싫어했고, 다른 팀원들은 불똥이 튈까 봐 두 사람의 대화를 일부러 못 들은 척 했다.
“우리 팀에서 가장 직급이 높으시고, 연장자시잖아요.”
“······.”
“상품기획 1팀을 대표하는 얼굴로 윤 차장님만 한 분은 없죠.”
지혁은 일부러 좀 띄워 주었다.
“하아~ 오 팀장~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나보다는 협력부서와 관계가 좋은 정 과장 같은 사람이······.”
윤 차장은 다른 사람을 대며 빠져나가려 했으나.
지혁은 윤 차장 귀 가까이 다가와서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냥 팀장이 시키면 하세요.”
“······.”
“빚진 거 받으시려면.”
이 말에 윤 차장은 눈을 번쩍 떴고.
지혁은 피식 웃었다.
윤 차장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미팅은 팀장이 가는 거지. 왜 팀원한테······.”
지혁이 말했다.
“상급자 미팅은 제가 갈게요.”
“······.”
“협조부서 미팅만 윤 차장님이 가주세요. 어차피 들어주러 가는 거니까. 미팅하다가 팀장의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는 연락주시고.”
“에휴. 알았어.”
그때, 문 대리가 말했다.
“오 팀장, 영업부에서 연락 왔습니다. 미팅 요청입니다.”
윤 차장은 눈치를 봤고.
지혁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지나갔다.
“오늘은 제가 갈게요. 다음 주부터 협조부서 미팅은 윤 차장님이 가시는 거예요.”
윤 차장은 방금 못 볼 걸 본 것마냥 고개를 갸웃하고 중얼거렸다.
“오지혁이······ 방금 웃은 거야?”
***
영업부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기대된다.
-오지혁 팀장님. 난 이런 분이 제일 멋져.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일 잘하면 형이지.
-어떻게 팍스버거와 콜라보 할 생각을 했을까?
-그보다도 입고된 첫날 리오더 때린 게 더 충격이야. 기획하는 사람들은 다 새가슴이던데.
영업부의 분위기는 여타 부서와는 좀 달랐다.
활발한 상남자 스타일의 부서.
특히, 영업부만큼 매출에 민감한 곳은 없다.
오로지 매출로만 평가받는 곳.
반칙만 하지 않았다면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매출만 잘 나오면 된다.
그런 영업부이기에 매출이라는 선물을 안겨준 지혁이라는 남자의 인상은 정말 강했다.
영업부 내에서는 ‘오지혁’이라는 이름은 굉장히 유명했으며, 지난주 특진 시에 전직원 앞에서 보여준 시원시원함에 한 번 더 매료되었다.
모두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똑똑.
[오지혁입니다.]
-왔다. 왔다.
-모두 준비해.
영업팀장이 소리쳤다.
“네~ 들어오세요~”
덜컹.
지혁은 회의실에 들어온 후 깜짝 놀랐다.
‘헛······ 뭐야?’
짝짝짝.
회의실에 모인 8명의 스타덕 영업부는 일제히 일어나서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환영합니다! 오 팀장님!
-진짜 멋져요~
-휘이익~
지혁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환대는 당연히 생각 못 했었다.
속알머리가 듬성듬성한 남자가 다가와 두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스타덕 영업부 팀장 김종식이라고 합니다.”
“아, 네 처음 뵙습니다. 오지혁입니다.”
김 팀장은 스무 살은 어려 보이는 지혁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악수를 잡았다.
지혁은 한 손만 내밀었다가, 재빨리 왼손으로 받쳐 잡았다.
“오 팀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가 작년 4분기에 이어 올해 1분기까지 연달아 매출이 떨어져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오 팀장님 덕분에 2분기에 매출 기네스 기록을 세웠습니다.”
김 팀장의 말이 끝나자, 다른 팀원들도 일제히 한마디씩 했다.
-오 팀장님 고맙습니다!
-스타덕 영업부를 살려주셨어요! 하하.
웬만하면 당황하지 않는 지혁이지만, 너무 띄워주니 좀 얼떨떨했다.
“뭐, 그렇게까지. 그냥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이 쿨함 어쩔 거야.
-미쳤어. 미쳤어. 너무 멋지다.
-혹시 여친 있으세요?
특히 영업부 여직원들은 더 난리였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만 선발하는 건지, 영업부는 다들 활발하고 말하는 것도 거침이 없었다.
“남친도 있는 것들이 그런 건 왜 궁금해?”
김 팀장이 핀잔을 주자.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 남친이죠~
-오 팀장님~ 우리 저녁 한번 먹어요~
김 팀장이 지혁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팀장님, 쟤네들 만나지 마세요. 별로예요. 별로.”
“큭.”
김 팀장의 너무 솔직한 조언에 지혁은 웃음이 터졌고,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저 결혼했습니다.”
김 팀장은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오 팀장님 결혼하셨댄다~ 꿈 깨라~”
-에이······.
-좋다 말았네.
김 팀장은 상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시죠.”
***
회의의 주는 ‘팍스버거 콜라보’ 관련 건이었다.
스타덕 전체 매출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었기에 그 얘기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침 얼마 전까지 지혁은 팍스버거 콜라보 담당이었고. 영업부의 문의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도 막힘없이 답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팍스버거 8월 콜라보 건은 계획대로 들어온다는 거죠?”
“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일주일 정도 앞당겨서 입고계획을 잡았거든요. 아직 특이사항은 없어요.”
영업팀장은 반색하며 말했다.
“잘됐네요~ 팍스버거는 하루라도 빨리 들어오는 게 좋습니다.”
“근데, 자연재해를 고려해서 여유 있게 입고계획을 잡은 거라서요.”
영업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 부분까지 고려해서 저희는 분배계획을 세울게요. 오 팀장님께서 현안을 빠삭하게 다 알고 계시니까 너무 좋네요.”
“원래 제가 하던 일이었으니까요.”
덜컹.
그때 문 여는 소리가 들렸고.
“어이쿠~ 유명 인사 오신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는데~”
그의 얼굴을 가장 먼저 발견한 어느 영업 팀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본부장’이라는 소리에 김 팀장은 벌떡 일어났고, 지혁도 얼떨결에 따라 일어났다.
“이분 이신가?”
영업본부장은 지혁의 앞으로 다가왔다.
머리는 새하얗고, 피부는 검으며 반들반들하다.
두꺼운 눈썹에 짙은 쌍꺼풀.
자줏빛의 입술은 양 끝으로 한껏 올라가 있었다.
“오 팀장님 맞나요?”
“네, 맞아요.”
영업본부장은 찬찬히 지혁을 살폈고, 지혁 또한 그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호랑이를 닮은 사람이네.’
집중해서 이마를 보려 했는데, 영업본부장은 틈을 주지 않았다.
“소문대로구먼. 일 잘하게 생겼어.”
영업본부장은 웃으며 말했다.
“인사는 나눴으니,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네. 상관없어요.”
영업본부장은 피식 웃고는 대뜸 말했다.
“오 팀장, 우리 술 한잔 하자. 오늘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