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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43화 (43/301)

43. 잊지 않았다

“정진 씨, 노트북 잘 돼?”

지혁은 업무 중간중간 계속 손정진을 관찰하면서 체크했다.

분명 챙겨주는 거였지만, 손정진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웠다.

“네! 아주 잘 됩니다!”

“그래, 그렇게 목소리 크게 안 내도 돼. 여기 군대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다나까도 안 써도 되고.”

“네, 팀장님.”

업무 자료도 챙겨주고, 손정진의 주변을 살피며 계속 뭔가 불편한 게 없는지 살폈다.

그런 지혁의 모습이 다른 팀원들은 이상했다.

“쟤 왜 저래?”

윤 차장은 정 과장 책상에 와서 커피 마시면서 작은 소리로 물었다.

“누구요?”

“오 팀장 말이야.”

“아······.”

분명 그들이 알던 서슬이 시퍼렇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오지혁이 아니었다.

“손정진이 혹시 사촌 동생 아니야?”

“네? 에이~ 설마요.”

“아니, 완전히 딴 사람 같잖아. 왜 저렇게 친절하냐고.”

수시로 챙겨주는 지혁과 난감해하는 손정진을 보며 윤 차장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정 과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지금까지는 지혁이가 막내였잖아요.”

지혁이 없는 앞에서는 그를 팀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걔가 나이 어린 사람 대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냥 연장자한테는 빡세고 동생들한테는 친절한 성향일 수도 있죠.”

“그런 사람이 있어?”

“있더라고요. 그게 형제 관계에 따라서 영향을 좀 받는 거 같던데.”

“쟤 혹시 장남인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정 과장은 지혁의 행동을 유심히 보며 말을 아꼈다.

참다못한 윤 차장이 물었다.

“그게 아니면 뭐?”

“우리를 까는 걸 수도 있죠. 신입사원은 이렇게 대해야 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

“솔직히 우리가 지혁이한테는 좀 못되게 굴었잖아요.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애를 따돌리고.”

“에이~ 난 안 그랬어~ 자네랑 심 부장이 그랬지. 나까지 괜히 끌어들이지 말라고?”

정 과장은 가자미눈을 뜨고 윤 차장을 바라봤다.

“방관했잖아요. 한 번이라도 말린 적 있어요?”

“······.”

“하여간······ 자기만 고귀한 척.”

윤 차장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정 과장! 방금 뭐라 그랬어?!”

“제가 뭘요. 혼잣말도 못 해요?”

“하아······ 하여간 오지혁이 때문에 선배 어려운 줄 모르고 기강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입사원을 챙기는 지혁을 보며, 윤 차장은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좀 쓰린 기분이 들었다.

‘젠장······.’

***

회의실.

지혁과 손정진. 단 두 사람만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보통 신입사원은 처음 출근하면 할 것도 없고, 멍하니 있기 마련인데.

지혁이 이것저것 과업을 줘서, 손정진은 나름 바쁘게 오후 시간을 보냈다.

“내가 숙제준 건 다 했어?”

“네, 정판율, 주판율, 영업이익율, SKU 등······ 팀장님 알려주신 대로 용어 숙지 대부분 완료했습니다.”

“윤 차장님이 잘 알려줘?”

“네, 친절하게 잘 알려주셨습니다.”

“그래. 업무에 특성화된 용어가 있어. 그걸 모르면 대화가 안 되거든. 이해 안 되면 그냥 외워버리라고. 용어 숙지가 된 다음부터는 네가 생각하기에 성과 날만한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제 생각대로요?”

"그래, 눈치 보지 말고, 스스로 제한 걸지 말고.”

“······.”

“이렇게 해도 될까? 싶은 것들은 그냥 해. 불법적인 것만 아니면. 사고도 신입사원일 때 쳐보는 거지, 연차 쌓인 후 사고 치면 쪽팔린 거거든.”

“알겠습니다.”

“절대로 새가슴 되면 안 돼. 줏대 있게 가.”

“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손정진은 지혁을 보며 눈빛을 빛내었다.

‘우리 팀장님 진짜 멋지다. 완전 상남자. 어린 나이에 팀장 하시는 이유가 있구나.’

“지금 내가 널 보자고 한 이유는.”

왜 지혁이 그를 회의실로 불러냈는지 의아했었다.

“좀 알아가려고.”

“네?”

“뭐, 대면식 같은 거랄까.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어쨌든 팀장 대 팀원으로 만났잖아. 좀 알아가야 하지 않겠냐?”

“하하. 네!”

지혁은 주머니에서 캔 커피를 두 개 꺼내어 하나 건넸다.

“자, 마셔.”

“감사합니다!”

깡-

커피를 마시며 지혁은 상품기획 1팀이 하는 일. 현재 상황. 앞으로의 계획 등에 관해 설명해주었고.

손정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들었다.

“와~ 그럼 팍스버거 콜라보가.”

“맞아, 내가 담당이었어.”

“진짜 대단하십니다!”

손정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매장에 그 제품 깔린 거 보고 전율이 왔었거든요. 와······ 무엇보다도 보통 그런 히트상품은 금방 다 완판 돼서 사기도 어렵거든요?”

“······.”

“근데 바로 재입고가 되더라고요. 도대체 누가 기획하신 건지 진짜 탁월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

“네!”

“그게 내가 복직하자마자 한 일이거든.”

“그러니까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혹시 천재 아니십니까? 하하.”

지혁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 천재 아니야.”

“······.”

“그냥 본대로 움직이고, 나아가야 할 때 망설이지 않았을 뿐이지.”

지혁은 손정진의 눈을 쏘아 보며 말했다.

“야, 너도 할 수 있어.”

“큭!”

멋진 말이었는데, 유명한 광고 카피가 떠올라서 손정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지혁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째 말하고 나니까, 좀 그렇다. 그치?”

“하하하.”

“하하.”

회의실 안에서 두 사람은 실컷 웃었고.

밖에서는 이 상황이 참 진기했다.

-항상 고성 소리만 들리던 회의실이······.

-어색하다.

-근데, 웃음소리 들리니까 더 무서운 거 같아.

***

퇴근 시간 30분 전.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팀원들에게 말했다.

“오늘 승진 턱 쏩니다. 좀 늦었네요. 신입사원 오면 하려고 기다렸었거든요.”

“······.”

갑작스러운 제안에 다들 의아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는데.

“상품기획 1팀 전원. 6시 정각에 1층 로비에 모일게요. 아.”

지혁은 황 대리를 바라봤다.

“황 대리님도 같이 가시죠.”

“네? 저도요? 팀 회식인데, 제가 끼면 안 되죠.”

“회식 아니고요. 승진 턱이라니까.”

“아······.”

황 대리는 끼기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 가실 분 있으세요? 한우 먹으러 갈 건데.”

정 과장은 손을 들려다가, ‘한우’라는 말에 다시 내렸다.

“그럼, 어서 업무 마무리하세요.”

잠시 후, 명품 한우집.

상품기획 1팀 5명과 황 대리.

총 6명이 모였다.

“승진 턱은 해야죠. 참고로 제가 쏘는 걸 상당히 좋아합니다.”

‘쏘는 걸 좋아하다니. 하여간 얘는 뭐 정상이 없어.’

윤 차장은 고개를 저었지만, 입 안 가득 육즙이 흐르는 고깃덩어리를 씹고 있었다.

“잔 채우세요. 한잔하시죠.”

모두 잔을 채운 후 위로 들었다.

“건배사는 없습니다. 옆 사람이랑 잔 부딪치고 그냥 드세요.”

-팀장님 승진 축하합니다~

-축하해요~

-잘 먹을게요.

다들 잔을 부딪치며 축하 인사를 건네었고,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한잔 마셨다.

“엇? 오 팀장 오늘은 술 마시네?”

윤 차장이 놀라서 물어보자,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주인공인데, 한잔해야죠. 잘 없는 일이니까, 저랑 술 한잔 하고 싶은 분들은 어서 따르세요.”

“하하! 좋지~ 좋아!”

윤 차장은 신나서 지혁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고, 지혁은 연거푸 여러 잔을 마셨다.

지혁 또한 철로 만들어진 인간은 아니기에.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좀 발그레해졌다.

지혁이 술을 마시니, 술자리는 더욱 무르익었고.

-우리 팀장님도 취하긴 하는구나.

-이제야 좀 사람 같아 보이네.

-평소에도 좀 웃어라. 웃어.

지혁은 이런 말들에는 빙긋 한번 웃을 뿐,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 가득 쌓인 술병.

각자 얘기하느라, 정신없는 가운데, 지혁의 옆에 앉은 황 대리는 걱정이 되었다.

“팀장님, 괜찮아요? 많이 드신 거 같은데.”

“그러게요. 좀 마셨네요.”

오늘 주인공인데다가 평소 술을 거부했던 지혁이기에 술잔이 계속 넘어왔고.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취한 상태로.

윤 차장, 정 과장, 문 대리, 손정진······.

즐겁게 웃고 있는 팀원들의 얼굴을 차례대로 보다가.

문득, ‘그 세계’에서 오늘도 살았다며 함께 웃던 동료들이 떠올랐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 세계에서 하루는 정말 귀했고.

언제 이별할지 모르는 동료들이기에 더 소중했었다.

하지만······.

“다 죽었어······.”

“······.”

“씨발, 다 죽었어······.”

“티, 팀장님.”

지혁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어렸고.

황 대리는 황당해서 그런 지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후우- 저 잠깐 화장실 좀.”

“아, 네.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아니에요.”

잠시 후. 세수를 했는지, 머리에 물기가 묻은 채 돌아왔다.

붉었던 얼굴색도 돌아와 있었다.

“진짜······ 괜찮으세요?”

황 대리는 지혁이 걱정되서 말하고 있는데, 손정진이 다가왔다.

“팀장님!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그래, 정진아.”

“앗.”

손정진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웃었다.

“그렇게 불러주시니까, 좋은데요?”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주세요.”

“글쎄다. 너 하는 거 봐서.”

지혁은 피식 웃고는 손정진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정진아, 잘하자.”

“네, 팀장님.”

손정진의 눈빛에 충성심이 이글거렸다.

***

다음날. 아침.

상품기획 1팀 전체에서 은은한 술 냄새가 났다.

“아오~ 속 쓰려. 어제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거야.”

윤 차장은 숙취로 인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고. 정 과장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요. 문 대리님은 속 괜찮아요?”

문규태 대리는 직급이 대리이긴 하지만, 나이가 적지 않다.

“아, 네. 저야 뭐······ 이천에 있을 때 술 먹는 낙 말고는 없던 사람이라.”

“아······ 술고래시구나.”

“하하.”

덜컹.

8시 55분.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며 지혁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팀원들은 내심 궁금했다. 지혁이 어떨지. 어젯밤에는 평소의 지혁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똑같았다. 숙취도 없어 보였고.

“오 팀장. 왔어?”

윤 차장이 먼저 아는 척했고, 지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했다.

“네, 윤 차장님. 안녕하세요.”

“속 괜찮아?”

“괜찮죠.”

“어제 많이 마시던데?”

“잠들기 전에 속을 비웠죠.”

“속을······ 비워?”

“구토요.”

“아······ 그걸 일부러.”

“다음날 지장 가면 짜증 나니까.”

윤 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지혁이 답다. 독한 놈.’

정 과장도 생각했다.

‘얘도 별수 없네. 하여간 회식 때 뿐이라니까.’

평소와 다름없이 찬바람이 쌩쌩 부는 지혁의 태도.

정 과장은 별로 실망하지도 않았다.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손정진이 밝게 웃으며 인사했고.

지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정진아.”

이 말을 들은 윤 차장과 정 과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똑같은 생각을 했다.

‘왜 이렇게 다정해?!’

손정진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불러주시는 거예요?”

“보다시피.”

“감사합니다.”

지혁은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아침 식사는 했나요?”

“······.”

“해장하러 갑시다. 내가 살 테니까.”

지혁은 자리에 가방만 올려놓고, 다시 사무실 밖을 향하여 걸었고.

다른 팀원들은 눈만 끔뻑이며 지혁을 보고 있었는데.

“정진아!”

“네.”

“빨리 먹고 오게, 회사 앞 순댓국집에 6개 주문 시켜 놔. 황 대리님한테도 연락 드리고.”

손정진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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