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1)
“아~ 속 좀 풀리네~”
윤 차장을 선두로 상품기획 1팀 전원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만, 지혁만 없었는데, 황 대리와 볼일이 있다며 식사 후에 사라졌다.
“그렇죠~ 숙취 때문에 늦게 일어나서 아침도 못 먹고 출근했는데. 지혁이 덕 좀 봤네요.”
정 과장은 이빨을 쑤시며 말했고.
윤 차장은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정 과장. 밥 사주니까 좋냐? 걔 칭찬을 다 해주고.”
지혁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진 문 대리와 손정진은 팀장의 이름이 이렇게 불리는 게 불편했다.
하지만, 최근 얼마 전까지 그들의 후배 팀원이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러려니 했다.
“에이~ 하하. 설마요. 근데, 지혁이가 은근히 센스있기는 해요.”
“뭐가?”
“팀원 다 데리고 아침 해장 먹으러 갈 생각을 다 하고요. 심 팀장이랑 5년간 있으면서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냥 혼자서 싹 사라졌다가 냄새 풍기면서 들어왔었지.”
“그 양반이야 원래 그런 사람이고. 지혁이는 어제 승진 턱이었잖아. 오늘 아침까지 쏘고 싶었나 보지. 너무 의미 두지 마.”
“······.”
“걔한테 마음주면 나중에 뒤통수 씨게 아프다. 눈에 보인대로만 봐. 행동에 의미 두지 말고.”
정 과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윤 차장님이 왜 그러시는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거리 두는 거 아니에요? 좋은 건 그냥 좋게 받아들이시지.”
윤 차장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오지혁이를 몰라. 뭐~ 알아서 해라~ 말 길게 해봐야 나만 나쁜 놈 되지 뭐~”
윤 차장이 자리로 돌아간 뒤.
똑똑.
사무실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오지혁 팀장님 계십니까?”
마침, 사무실 중앙에 서 있던 정 과장이 대답했다.
“지혁이요? 지금 잠시 자리 비웠어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혁? 여긴 팀장을 그렇게 부르나.’
정 과장은 남자를 향해 물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지혁이 오면 왔었다고 전해드릴게요.”
“영업부에서 왔습니다. 매장에서 선물 받은 게 있는데, 영업팀장님이 전해드리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두고 갈게요.”
“아······ 네.”
남자가 가지고 온 건 과일 상자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남자가 나간 뒤, 정 과장은 과일 상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영업부는 선물을 잘 받나 봐. 좋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저기요. 과장님.”
문 대리가 그를 불렀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정 과장은 주위를 둘러본 뒤, 문 대리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걸 확인하고 되물었다.
“저요?”
“협조부서 직원 앞에서 팀장님 이름을 불러요?”
“······.”
“우리끼리 있을 때도 그렇게 부르는 거 불편했는데. 이건 좀 선 넘는 거 아닙니까?”
정 과장은 얼굴이 붉어졌다.
본인이 옳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직급이 낮은 사람이 만인 앞에서 지적을 하니······.
“실수 좀 한 거 가지고. 정색하고 그래. 문대리. 적당히 좀 하지?”
“뭐요?”
정 과장은 평소와 달리 반말로 말했다.
“왜? 과장이 대리한테 말도 편하게 못 하나?”
“아니, 이 사람이.”
문 대리의 얼굴도 새빨개졌고.
사무실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손정진은 앉은 자리에서 당황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윤 차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혼자서만 딴 세상.
“1라운드 땡.”
그때 지혁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어제 마신 술기운 때문에 그런가? 아침부터 혈기가 넘치시네. 부탁인데, 다음 라운드는 두 분만 있는 곳에서 하시죠.”
두 남자는 이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안 하실거면 자리로 가시고요.”
문 대리가 먼저 지혁을 향해 고개를 숙인 후, 자리로 돌아갔고.
정 과장도 눈치를 살피다가 지혁을 지나쳐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지혁이 정 과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흠칫!
정 과장이 놀라서 쳐다보자.
“정 과장님.”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크기로 지혁이 말했다.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어······ 어? 뭘?!”
“지난 3개월을 기억하세요.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여기까지만 얘기할게요.”
“······.”
지혁은 팀장 석으로 돌아갔고, 정 과장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
점심식사 후.
1층 로비에서 황 대리는 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게이트를 나오는 날렵한 체격. 그에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지혁을 보며.
황 대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 팀장님~”
“오래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많이 안 기다렸어요.”
“홍썬 스튜디오가 어딥니까?”
“합정동입니다.”
“음. 전철로 가시죠.”
“네!”
두 남자는 현관을 나와, 회사 바로 앞에 강남역에서 2호선을 탔다.
“역에서 가깝데요?”
“네, 합정역 5번 출구 바로 앞이랍니다.”
“5번 출구?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트롯곡 제목이잖아요. 2019년이었나? 그때 좀 핫했었죠. 하하.”
지혁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이 노래가 나왔던 2019년 말.
선도물산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며, 췌장암이 발견되기 전이었다. 신입사원으로 정신없이 회사생활 하던 시기.
따지고 보면 몇 년 안 됐는데, 지혁은 그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그때 황 대리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그때? 아~ 2019년이요.”
황 대리는 눈을 치켜뜨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글쎄······ 뭐 했더라. 그냥, 회사 다니고 있었던 거 같은데요?”
“그게 다예요?”
“회사원이 그렇죠. 뭐. 그거 말고 딱히 기억이 없네요. 아~ 그땐 여자친구가 있었구나. 쓰읍~”
황 대리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지혁은 재밌어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김진아 과장님이랑은 잘 돼가요?”
“아~ 아직은 연락만 하고 지내요.”
“왜요? 만나지는 않고?”
“자꾸 바쁘다고 하네요.”
“그럼, 황 대리님이 회사 앞으로 찾아가면 되잖아요.”
“에이~ 어떻게 그래요. 민폐를.”
지혁은 황당하다는 듯 황 대리를 바라봤다.
“김진아 과장님 안 좋아해요?”
“네? 아 하하. 하여간······ 참 직설적이셔.”
황 대리는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좋아하죠. 제 스타일이에요.”
“아, 난 또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네. 그럼 뭘 망설여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지. 무슨 체면 따위를 따져요.”
“······.”
“가서 얼굴 보고, 계속 구애하세요. 짐승들도 하는 걸 왜 못 하는 거예요?”
황 대리는 대답은 못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난 짐승이 아니니까······.’
지혁은 황 대리를 잠자코 보다가 물었다.
“제가 또 한 번 도와줘요?”
“네?! 아, 아니요!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하하!”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역에 다다랐다.
[이번에 정차할 역은 합정. 합정입니다.]
***
‘홍썬 스튜디오.’
상가 2층 붙어있는 간판.
두 남자는 1층에서 위를 바라보았다.
“몇 시 약속이죠?”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15분 일찍 왔네요.”
“네. 팀장님, 들어가시죠.”
황 대리가 먼저 들어가려는데.
“잠깐만요. 황 대리님.”
“네?”
“정각에 들어가죠.”
“왜요? 조금 일찍 도착하는 게······.”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좀 알아봤어요. 그러면 싫어할 것 같더라고.”
“네?”
“내 말대로 합시다.”
“아, 네 알겠습니다.”
두 남자는 15분을 1층에서 기다린 뒤, 정확히 오후 2시에 문을 두드렸다.
“스타덕에서 왔습니다!”
황 대리가 인기척을 내자, 안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문이 활짝 열리고.
노란색 바가지 머리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홍썬입니다.”
“안녕하세요. 연락드렸던 선도물산 스타덕 생산팀 황성준 대리입니다. 반갑습니다. 유명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황 대리는 정중히 인사했고. 홍썬은 웃으며 말하는데 기분이 좋아 보였다.
“혹시 빨리 오실까 봐, 작업 마무리 빠르게 하고 있었는데. 딱 시간 맞춰서 와주셨네요~”
“네?”
“전 늦게 오시는 분들 보다도, 빨리 오는 게 더 싫더라고요. 호호.”
황 대리는 놀라서 지혁을 바라봤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호호. 저 너무 솔직하죠? 예술 하는 사람이라 그래요~ 어서 들어오세요.”
“아, 네네.”
안으로 들어오자, 홍썬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지혁과 황 대리는 홍썬의 맞은 편에 앉았다.
홍썬은 지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분은 누구세요?”
황 대리가 소개하려는데, 지혁이 먼저 나섰다.
“홍썬 너튜브 열혈 구독자입니다.”
“어머.”
“그리고 회사 직함은 상품기획 팀장 오지혁입니다. 반가워요.”
“팀장님이시구나~”
홍썬은 얼굴이 상기되었다.
“황 대리님한테 말씀 들었어요. 팍스버거 콜라보 담당이셨다고.”
“네, 맞아요. 그 덕에 승진하고 팀장 됐죠.”
“어휴~ 그 정도도 부족하죠~ 완전 마켓을 뒤집어 놓으셨는데~”
홍썬은 팍스버거 콜라보 제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유명인사라도 만난 듯 지혁을 대했다.
“진짜 반가워요. 이렇게 훈남이실 줄은. 호호! 근데, 진짜 제 열혈 구독자세요?!”
“’잠든 강아지’. ‘별을 세는 강아지’······ 특히 전 ‘산골 강아지의 슬픈 사랑 얘기’가 진짜 마음에 들었어요.”
“어머! 그거 제 초기작인데.”
“어쩐지 붓 터치가 거칠더군요. 근데 전 거친 거 좋아해서.”
“꺅- 좋아!”
홍썬은 구독자 수 100만 명을 보유한 화가 너튜버다. 그녀는 강아지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다.
강아지의 포근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드는 작품을 만드는데,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힐링 되는 기분이 느껴져 많은 이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제 그림 알아봐 주시니 너무 좋아요~ 더군다나 제가 좋아하는 스타덕 팀장님께서. 호호.”
“그리고 요즘 그림 속에 강아지 액세서리로 구현하는 게 있으시던데······.”
지혁은 끝도 없이 홍썬이 하는 일에 대해 늘어놓았고.
누가 봐도 홍썬의 덕후처럼 보였다.
황 대리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생각했다.
‘이런 취향이 있었어?'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황 대리가 본 지혁은 생물체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면······ 준비한 건가?’
좀 더 생각해보니, 뒤의 가정에 좀 더 무게가 실렸다.
‘언제 이렇게 까지······ 하여간 오 팀장님은 볼수록 대단해.’
대화를 나눌수록 홍썬의 목소리는 하이톤이 되어갔고, 말 한마디에 손뼉을 치며 난리였다.
지혁은 쉴 새 없이 말을 하면서도 계속 홍썬의 표정과 몸짓을 살폈다.
‘확실히 인정욕구가 강하군.’
너튜브 그녀의 영상에서 말투와 표정을 보며 분석했었다.
이마의 색을 보는 게 가장 확실하지만, 그건 직접 봐야 알 수 있기에 만나기 전에는 확인할 수 없다.
완벽한 자기 페이스로 만들어가기 위해, 충분히 준비했다. 전투에서의 선제공격처럼, 특히 첫인상이 중요하다. 그래서 홍썬의 너튜브를 수차례 돌려보며, 첫 만남에 공을 들였다.
수아의 따가운 눈총을 견뎌야 하는 어려움은 좀 있었지만.
“아우~ 덥네요. 너무 신나서 말했더니. 호호.”
지혁은 홍썬의 상기된 얼굴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끝났다.’
홍썬은 활짝 미소 지으며 물었다.
“우리 일 얘기 해야죠. 제가 뭘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그녀는 탁자에 손을 올리고, 지혁 쪽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엇이든 다 해줄 것 같은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