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2)
“네······ 그럼, 일 얘기를 좀 해볼까요.”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지혁은 오로지 홍썬의 태도만 살폈다.
‘의도했던 대로 움직여 주고 있어.’
“뭔데요~ 어서 얘기해보세요. 적극적으로 협조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요.”
너무 적극적이라 약간 부담감마저도 느껴졌다.
“이번엔 저와 콜라보 하려는 건가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홍썬이 먼저 말했고, 지혁은 피식 웃고는 설명했다.
“방향은 비슷한데, 좀 다릅니다.”
“달라요?”
“콜라보라기보다는 디자인 의뢰를 맡기고 싶어요.”
“아······.”
그 또한 넓은 의미로 콜라보(협업)라고 할 수는 있지만, 홍썬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저보고 스타덕의 디자이너가 되라는 건가요. 디자인 외주라고 봐야 하나?”
“네, 그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요.”
홍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건너 쪽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카메라맨은 속으로 생각했다.
‘홍썬은 묻히는 거 아주 싫어하는데.’
“팍스버거는 콜라보고, 저는 외주? 그럼 제가 참여했다는 걸 대중들이 알기나 할까요?”
홍썬이 약간 뾰족하게 말했는데,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홍썬 씨에게는 디자인을 다 맡기잖아요. 팍스버거한테는 그렇게 못 했어요.”
“······.”
“스타덕 2022 Spring에 ‘홍썬 라인’을 만들 거예요. 그리고 해당 파트의 구성과 디자인을 완전히 맡길 생각이에요.”
이 말에 홍썬은 놀랐다.
그녀는 화가지, 디자이너가 아니다.
간혹 그림에서 액세서리 디자인을 하긴 했지만, 의류 라인 구성 전체를 하라는 건······.
스타덕은 크게 4개 라인이 있다.
헤리티지, 퍼포먼스, 라이프스타일, 시즌 기획.
그러니까, ‘홍썬 라인’이라는 건 ‘시즌 기획’ 라인 전체를 맡긴다는 의미였다.
옆에서 잠자코 얘기를 듣던 황 대리가 가장 놀랐다.
‘미친 거 아니야?’
규모면에서 팍스버거 콜라보와는 비교도 안 된다.
팍스버거는 겨우 시즌당 5개 스타일. F/W였으니 총 10개 스타일을 기획한 것이며, ‘시즌 기획’의 일부분만 차지했다.
“저······ 오 팀장님. 혹시 용어 선택을 잘 못 하신 건 아니신지······.”
지혁이 팀장이긴 하지만, 경험이 적어서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끼어들었지만.
“지금 황 대리님 끼어들 타이밍 아니에요.”
“······.”
지혁은 방해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의 눈빛은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 같았다. 홍썬의 얼굴만 주시하고 있었다.
당혹. 고민. 긴장. 걱정.
홍썬은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했으나.
지혁은 그녀의 미세한 얼굴 근육의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생각보다 부담을 많이 느끼네. 거절하겠군.’
“전 가벼운 마음으로 할 생각이었는데. 이건······ 뭐 입사하라는 거잖아요······ 호호.”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논다는 생각으로 일하시면 돼요.”
“······.”
“그래픽과 디자인만 신경 쓰면 되는 거예요. 제품의 핏이나 기능성은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그래도 홍썬은 고민했고.
지혁은 살짝 미소지으며 약간 긁는 말을 했다.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은데. 그런 거 추구하는 분 아니었나요? 열혈구독자로서 아쉬운데요.”
홍썬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혁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망설이는 거 맞네요. 내키지 않으면 안 하는 게 맞아요. 일이라는 게 죽을힘을 다해도 될까 말까인데.”
“······.”
“오늘 반가웠어요. 황 대리님 일어나시죠.”
“네?!”
황 대리는 황당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도대체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어. 방금 전까지 간, 쓸개 다 줄 것처럼 얘기하더니.’
“뭐 하세요? 일어나라니까.”
“아, 네네.”
황 대리도 얼떨결에 일어났는데.
홍썬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돈은 얼마 줄 건데요?”
지혁은 뒤돌아선 채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내렸다.
그리고 다시 앉으며 말했다.
“두가지가 있는데, 택일하시면 돼요.”
***
홍썬은 혼이 빠져나간 듯 보였다.
띄어주다가, 달랬다가, 밀어붙이고, 매몰차게 돌아서려다가 그녀의 앞에 다시 앉은 남자.
지혁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어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망각한 채, 그의 말을 쫓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옆의 카메라맨 또한 줏대 없이 흔들리는 홍썬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얘가 평소답지 않게 왜 이러지.’
“첫 번째는 디자인 의뢰비에 판매 수량 커미션을 드리는 건데요. 의뢰비는 스타일당 200만 원 드릴 거고, 판매 수량 커미션은 판매가의 1% 예요.”
“두 번째 조건은요?”
“디자인 의뢰비는 없고, 판매 수량 커미션만 2%에요.”
홍썬은 잠시 생각하고는 물었다.
“디자인 의뢰비라는 건······.”
“판매 수량과 상관없이 말 그대로 디자인 의뢰한 것에 대한 수수료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홍썬 라인’은 20개 스타일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 디자인 의뢰 비용만 4,000만 원이다.
홍썬은 적지 않은 금액에 속으로 생각했다.
‘괜찮은데?’
“판매 수량 커미션은 말 그대로 판매가 잘 안 되면 적게 받을 수도 있는 거죠?”
“맞아요. 하나도 안 팔려버리면 0원이 될 수도 있겠죠.”
홍썬은 금전에서는 안정적인 걸 추구한다. 이것저것 묻고는 있으나, 이미 마음은 첫 번째 조건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황 대리는 걱정이 되었다.
‘저렇게 얘기해도 되나? 디자인 외주 자체가 회사에서 지향하는 바도 아니고······ 성과도 보이기 전에 저런 큰 비용을 지불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하지만 지혁은 생각이 있었다.
“근데······ 전 팍스버거 콜라보 기획자예요.”
“······.”
“팍스버거 콜라보가 얼마나 팔렸는지 아세요?”
홍썬은 홀린 듯 지혁의 눈을 바라봤다.
“최초 기획 수량 3만 장. 리오더 3만 장 더해서 총 6만 장 생산했어요. 그리고, 다 팔았어요. 한 장도 남김없이.”
“와······.”
“아이템마다 가격이 다르긴 하지만, 팍스버거 콜라보 평균 가격이 67,500원이에요. 만약 이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1% 커미션일 때는 4,050만 원. 2% 커미션일 때는 8,100만 원의 수익이죠.”
어쨌든 약 4,000만 원 차이.
이 기준대로라면 안정적인 첫 번째 조건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런데.”
지혁이 말했다.
“’홍썬 라인’은 최소 20만 장을 생각하고 있어요. 아마 판매가도 조금 더 높을 거고요.”
홍썬의 동공이 흔들렸다.
‘20만 장······.’
“계산이 되나요? 팍스버거 콜라보 성공의 반만 달성해도······ 아마 두번째 조건이 훨씬 낫겠죠.”
대략 20만 장 중 18만 장만 판매한다고 해도, 두 커미션의 차이 금액은 1억 2천만 원.
디자인 의뢰비 4,000만 원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진짜······ 20만 장 기획하실 거예요?”
“전 최소라고 말씀드렸어요.”
“아······.”
홍썬은 카메라맨을 바라봤다.
“어떡하지?”
“너하고 싶은대로 해.”
홍썬은 망설였다.
어느새 이제 이 프로젝트를 ‘하냐’, ‘안 하냐’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으로 하느냐’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나마 냉정한 시각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는 황 대리로서는······.
‘와······ 진짜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말이네.’
묘하게 일을 성사시키는 지혁만의 방식이 있었다.
예전에 팍스버거 콜라보로 김진아 과장을 만났을 때도 그랬었다.
분명 처음 봤을 텐데도 그 사람을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심리학 전공했나?’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 세계’에서 5년을 구르며, 목숨 걸고 수많은 사람을 대적하여 쌓은 경험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겠는가.
홍썬은 쫓기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두 번째 조건으로 할게요.”
“네. 잘 선택하셨어요. 돈 많이 벌게 해드릴게요.”
“······.”
“제가 입 밖으로 낸 말은 지키는 사람입니다.”
내내 황당한 표정이던 황 대리도, 이때는 고개를 끄덕였다.
***
“오 팀장님!”
“······.”
“어쩌려고 그런 무리수를 두셨어요. 팀장이 팀의 ‘장’이지, 사업부의 ‘장’은 아니잖아요.”
회사로 돌아가는 전철 안.
황 대리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지혁에게 한 소리 했다.
“자신감과 무모함은 달라요. 이건 프로젝트가 아니라, 거의 신규 사업 수준인데······ 유 실장님에게도 말도 없이 이 정도 규모의 일을 진행해요?”
“······.”
“그리고 만약 홍썬이 첫 번째 조건을 택했으면 어쩌려고······ 회사에서 외부 인사한테 일 시작하기도 전에 4,000만 원을 주겠어요?”
이 말에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황 대리님은 이상한 버릇이 있더라.”
“네?!”
“꼭 불 필요한 가정을 하시더라고요. 두 번째 조건을 택했잖아요. 왜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하냐고요.”
“아니, 그거야······.”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그리고 좀 본질을 봤으면 좋겠어요.”
“······.”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뭡니까?”
지혁은 황 대리를 바라봤고.
황 대리는 눈을 끔뻑였다.
‘뭐야, 대답하라는 거야?’
지혁은 잠깐 기다렸다가, 이어서 말했다.
“어쨌건 회사 잘 되자고 하는 거잖아요. 돈 벌려고 하는 일이니까.”
“······.”
“사람을 믿고, 팀장으로 세웠으면. 이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혁은 황 대리의 어깨를 잡고, 씩 웃으며 말했다.
“성준이 형. 한번 사는 인생, 그냥 시원하게 갑시다. 네? 어차피 다 뒤질 건데.”
“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요.”
[강남역. 강남역에 도착했습니다.]
지혁은 싱긋 웃으며 전철에서 먼저 내렸고.
‘성준이 형······.’
황 대리는 이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고,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서 멍하니 서 있다가.
“어이쿠!”
전철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재빨리 내렸다.
***
“아, 진짜 라니까요.”
-말이 돼? 28세 먹은 팀장님이 어딨어.
-이 회사 엄청 보수적이던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손정진은 복도에서 동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뻥을 뭐하러 쳐요. 우리 팀장님이 진짜 나보다 한 살 많아요.”
27세인 손정진은 동기들 사이에서도 어린 축에 속했다.
올해 선도물산 남자 신입사원 평균나이는 30.3세다.
-야, 그럼 너희 팀장님이 나보다 어리다고?
손정진은 복도에서 우연히 동기들을 만나서,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다가.
오 팀장 자랑을 실컷 했다.
그러다가 나이 얘기를 하니, 다들 거짓으로 생각하며 안 믿으려 했다.
-그렇게 신입사원 잘 챙겨주는 팀장이 어딨냐? 난 팀장님이랑은 말 한번 붙이기도 힘들던데.
-난 아직 얼굴도 못 봤어. 출장이니, 미팅이니. 자리에 잘 안 계시니까.
손정진은 이 상황이 답답했다.
‘우리 팀장님 직접 보여주고 싶다.’
덥석!
그때 어깨에 묵직한 손길이 느껴졌다.
“정진아, 뭐하냐? 한가해?”
손정진의 어깨를 잡은 건 지혁이었고, 그 옆에 황 대리가 있었다.
회사에 막 도착해서 사무실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엇!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아닙니다! 화장실 갔다가 우연히 동기들 마주쳐서······.”
지혁은 손정진 앞에 선 동기 두 명을 보았다.
“동기들?”
손정진은 동기들을 황급히 인사시켰다.
“어서 인사하세요. 우리 팀장님이세요. 상품기획 1팀.”
손정진의 동기들은 멀뚱멀뚱 지혁을 보았다.
‘진짜 젊잖아?’
‘뻥이 아니었네?’
젊기는 하지만, 묘한 위엄이 있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90도 각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 후, 손정진에게 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뭔 얘기를 복도에서 하냐. 1층 가서 동기들이랑 차 한잔하고 와. 케이크도 먹고.”
“네?!”
“뭐해, 어서 받아.”
손정진의 어깨가 올라갔고.
지혁을 바라보는 동기들의 눈망울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