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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48화 (48/301)

48. 예상했던 풍파 (2)

덜컹!

갑작스러운 문소리에 디자인 본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지혁을 바라봤다.

‘헉!’

디자인 팀장은 지혁의 얼굴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놀랐다.

그만큼 그의 인상은 디자인 팀장에게 강렬했었다.

“누구시죠?”

디자인 실장이 물었다.

“상품기획 1팀장 오지혁이라고 해요.”

“아······.”

디자인 실장은 이 말에 지혁을 유심히 살폈다.

‘이 남자가 그 사람이구나.’

지혁을 모르지 않았다.

최근 선도물산에서 가장 화제의 인물이었으니.

“궁금했었는데, 첫 만남이 썩 유쾌하진 않군요. 근데 허락도 없이 이렇게 막 들어와요?”

상급자로서 고압적으로 말했다.

사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일개 팀장이 임원실을 막 들어오는 건 보통 실례가 아니다.

“협조부서 팀원을 불러다가, 이렇게 여러 명이서 몰아세우는 건 되고요?”

“뭐?”

디자인 실장이 쌍심지를 켰지만, 지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할 말 있으면 팀장을 부를 것이지. 임원이나 되시는 분이 팀원 불러서,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지혁은 약간 언성을 높여서 말했고. 디자인 본부의 실내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만큼 지혁의 말은 묵직하고 차가웠다.

‘듣던 대로 또라이네.’

디자인 실장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나, 막상 부딪혀 보니 많이 황당했다.

하지만, 지혁이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디자인 실장은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지금 오 팀장이 그런 말 할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

“외주 디자인을 써? 그것도 한, 두 스타일도 아니고 40 스타일 25만 장이나?”

“······.”

“이 회사에 디자인팀이 없어요?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냐고요? 디자인팀 없애고 싶은 건가요!”

말을 하다 보니 열이 올랐고, 디자인 실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녀의 샤우팅에 오금이 저렸으나.

지혁은 표정 변화없이 그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거 유 실장님이랑, 상품 본부장님도 아는 건가요?”

“그건 실장님께서 신경 쓰실 일 아니고요.”

지혁은 딱 잘라 말했고.

순간, 디자인 실장은 움찔했으나. 공격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각 부서에 따른 영역이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상도덕도 몰라요?”

“상도덕······.”

지혁은 고개를 갸웃한 후 물었다.

“말을 빙빙 돌려서 하시더니, 이제야 좀 명확하게 말씀하시네요.”

“······.”

“그러니까, 제가 밥그릇을 뺏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이 말에 디자인 실장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단어 선택이 거북했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그러면 오해하셨네.”

“뭐요?”

“밥그릇 안 뺏어요. 예산을 늘려서 할 거거든요.”

“······.”

“그러니까, 디자인팀은 전년도와 유사한 규모의 업무를 하신다고 보면 돼요. ‘홍썬 라인’이 디자인실 업무 규모를 줄여 인력 감축을 야기시킨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디자인 실장은 황당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내가 말하려는 요지는 이게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딴 데로 흘러가네.’

디자인 실장은 방금 지혁이 얘기한 것을 잠시 생각했다.

다른 얘기는 다 제쳐두고, 유독 머릿속에 ‘홍썬 라인’이라는 단어만 남았다.

다른 디자이너의 이름을 듣는 것 자체가 너무 불쾌했다.

“오해가 풀렸으니, 이만 우리는 가볼게요.”

지혁은 몸을 돌렸고.

뒤에서 고개 숙이고 서있던 윤 차장에게도 가자고 말했다.

“오 팀장.”

디자인 실장이 지혁을 불러세웠다.

“날 갖고 놀려고 하네?”

지혁은 다시 돌아섰고.

디자인 실장 눈에서 새파란 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역시, 쉽지 않네.’

지혁은 디자인 실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보통 이 정도 했으면, 지쳐서 더 안 하려고 하는데······.’

복직하고 나서 몇 명의 임원을 겪어봤다.

'확실히 임원은 다르다.'

일반 직원 중에도 윤 차장과 같은 고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혁의 예상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임원들은 모두 특징이 있었으며, 자신만의 집념 혹은 신념이 강했다.

‘작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의 직원들 위에 서는 관리자니까······.’

어찌 보면 다른 게 당연하다.

“오 팀장. 우리 차분히 얘기 좀 해봅시다.”

디자인 실장은 한 쪽을 가리켰는데, 7 명의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자리였다.

지혁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분위기 잡을 줄 아는군.’

자리 배치는 심리적 압박감을 줄 수 있다.

디자인 실장은 이 또한 노린 거였다.

“그러시죠. 근데, 일이 있어서 오래는 못 합니다.”

“······.”

지혁은 개의치 않고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윤 차장님도 서 계시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죠?”

지혁의 말에 윤 차장은 세차게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아유, 아니야. 난 서 있는 게 편해.”

지혁은 피식 웃고는 더 권하지 않았다.

디자인 실장이 불렀다.

“오 팀장.”

“네.”

“이렇게 하는 저의가 뭔가요?”

“······.”

“솔직히 말해 봐요. 왜 굳이 이렇게 하는 건가요?”

지혁은 잠자코 있었고.

디자인 실장이 기다리다가 물었다.

“왜요. 여기 사람 많아서 말하기가 좀 그런가요?”

“아니요.”

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의라는 게 도대체 뭘 말하는 건지. 그냥 성과 내려고 하는 일이지, 무슨 저의가 있을까요. 실장님 질문이 선뜻 이해가 안되서 생각 좀 했어요.”

“그냥 성과 내려고 한 일이다?”

“네.”

“우리와 하면 성과를 못 낼 것 같아서요?”

지혁은 묘한 눈길로 디자인 실장을 바라봤다.

“이걸······ 제 입으로 말해야 해요? 디자인 실장님도 아실 것 같은데.”

“······.”

“데이터를 봐도 그렇고. 일하는 태도를 봐도 그렇고.”

지혁은 아주 건조하게 말했다. 불편한 얘기였으나, 감정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배가 침몰하고 있는 게 보이는데, 탈출하지 않고 가만있는 건······ 바보 아니에요?”

디자인 실장의 눈두덩이 떨렸고.

뒤에서 선 채로 지켜보던 윤 차장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세다. 너무 세. 하여간 쟤는 참 일관성 있어.’

***

디자인 실장과 팀장들.

지혁의 말에 모두 충격에 빠졌다.

욕만 안 섞었을 뿐이지, 쌍욕을 뱉은 거나 다름없었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물어보시길래 대답했어요. 전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디자인 실장은 정신이 혼미했지만, 팀장님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이렇게 멈출 수는 없었다.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자 모두를 부른 거였으나, 결론은 자충수가 돼버렸다.

“우리가 왜 침몰하는 배야? 어디 그런 건방진 말을!”

“성과 못 내면 망하는 거 아닌가요? 직원들은 불행해지고, 연봉도 안 오르고, 승진 안 되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겠죠.”

“······.”

“나와 내 동료들이 살려면 성과를 내야 하는데, 아무런 변화 없이 재작년에 하던 거 작년에 하고, 작년에 하던 거 올해 하는 그런 디자인은······.”

꿀꺽.

디자인 실장은 가슴이 아팠다.

심장을 파고드는 말이었다.

“브랜드 네임만 믿고, 변화가 없잖아요. 색깔 좀 바꾸고, 로고 크기 좀 바꾸는 게 디자인인가요?”

“······.”

“이번에 팍스버거 콜라보 하면서 메인제품들이 덩달아 잘 팔리지 않았나요? 그 덕에 디자인실도 성과 좀 났을 텐데?”

지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물었다.

“설마······ 그 성과가 제품 디자인 영향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얼마 전에 디자인 실장은 상품본부에 성과 보고를 했었다.

팍스버거 콜라보가 나온 시점에 메인 제품의 매출까지 덩달아 올라갔었고.

결과에 맞춰, 과정은 포장했다.

그 성과의 진짜 원인이 뭔지 디자인실도 잘 알고 있다. 아니, 전 직원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할 수는 없었다.

“······.”

디자인 실장의 입을 얼려버렸고.

디자인 팀장들도 고개를 숙였다.

팩트로 말해버리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홍썬 라인’이 잘 되면 이번처럼 메인 제품들도 덕 좀 볼 텐데.”

지혁은 중얼거렸지만, 조용한 회의실 안이라 다 들렸다.

디자인 실장은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힘들었다.

신입사원 시절에 선임한테 꾸중을 들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럼······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할 건가요?”

디자인 실장은 정신줄을 부여잡고 물었고.

지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디자인실이 지금과 같다면요.”

“······.”

“저 역시도 굳이 밖으로 부터 이런 짓 벌이는 거 귀찮아요. 회사 안에서 다 해결하는 게 좋지.”

디자인 본부에 정적이 흘렀다.

감정적으로 난리 칠 타이밍은 지났다.

지혁의 말은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차갑게 했다.

디자인 실장도 이제 전의를 상실했다.

상대방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에.

스스로 잘 아는 얘기들을 지혁이 꼬집어 준 것뿐이었다.

“그래······ 일단 알겠어요.”

디자인 실장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줄래요. 우리끼리 회의 좀 하게.”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원하시면 기획라인 진행 상황에 대해선 공유해 드릴 수 있어요. 어차피 다 아시게 된 거.”

“네······ 그건 우리끼리 논의 좀 해보고, 필요하면 얘기할게요.”

“네, 그럼 가볼게요.”

지혁은 곧바로 일어나 뒤돌아 나갔다.

“윤 차장님.”

“응? 어어.”

윤 차장은 황급히 지혁을 뒤따라 나갔고.

지혁은 나가면서 윤 차장에게 한 마디 했다.

“발 장구 좀 적당히 쳐요.”

***

사무실을 향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두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자코 뒤따라 걷다가, 윤 차장이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그건 알 필요 없어요.”

“어쨌든······ 와줘서 고마워.”

심 팀장 같았으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윤 차장이 불려갔어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이런 불편한 자리는 팀원에게 등 떠민 후에, 나중에 보고 받거나.

결과가 안 좋고 불리하다 싶을 때는 협조부서와 편짜고 팀원을 공격하기도 했다.

꽤 긴 시간 심 팀장을 모셨던 윤 차장으로서는 이런 지혁의 모습이 너무나도 신선했다.

“내 팀원 아닙니까.”

지혁은 앞만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고.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윤 차장은 이 말이 감동이 되었다.

“팀원의 전투력이 상실되는 건, 곧 내 전투력이 상실되는 거예요. 그뿐이니까.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시고.”

지혁은 약간 머쓱해서 한 말인데.

그의 속내까지도 윤 차장은 이해했다.

이제 좀 함께 지낸 시간이 있으니.

윤 차장은 웃은 뒤 말했다.

“오 팀장. 근데, 너무 세더라. 뒤탈은 걱정 안 돼?”

“아무 대비 없이 이렇게 달렸겠어요.”

지혁은 영업본부장을 떠올렸다.

‘이제 연락 좀 해봐야겠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홍썬이랑은 일 잘 되어 가고 있는 거죠?”

“이 상황에 그게 궁금하냐?”

“이 상황이 뭐 어때서요.”

뭔 일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지혁의 얼굴을 보며, 윤 차장은 생각했다.

‘같은 편이라 참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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