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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이 능력을 숨김-49화 (49/301)

49. 여파 (1)

서울 강남의 한 호텔.

펜트하우스의 회의실에 수트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고 있었다.

호텔리어들은 이 모임이 익숙한 듯 도착한 사람들을 안내해주었고.

밤 8시경. 회의실 10개의 좌석이 꽉 찼다.

정확히 5분 뒤.

사십 대 중반의 여성이 나타났고.

그녀의 등장에 회의실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났다.

“앉으세요. 오랜만에 뵙는 거 같네요?”

선도그룹에서 한자리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선도전자 상무, 선도생명 부사장, 선도화재 이사, 선도카드 상무······.

그리고 그중에는 선도물산의 영업본부장 한원철 상무도 있었다.

곧이어 호텔리어들이 커다란 트레이 위에 1인용 음식과 술을 가져왔고. 각자의 앞에 놓아주었다.

“다들 한잔하시죠.”

가운데 자리의 여성이 먼저 잔을 채웠고, 임원들도 그녀를 따라서 잔을 채웠다.

건배사나 잔을 부딪치는 건 없었다.

가운데 여성이 마시자, 모두 고개를 돌리고 잔을 비웠다.

이 중 가운데 여성이 가장 어려 보였으나, 모두 이 여성을 어려워했다.

군대 지휘관 스타일의 영업본부장도 지금 만큼은 순한 양 같았다.

그녀가 뿜어내는 카리스마가 굉장했다.

“회사 돌아가는 얘기 좀 들어볼까요? 각자 맡은 자리에서 잘하고 계시죠?”

그녀가 운을 띄우자, 그녀의 오른쪽에 앉은 선도생명 부사장부터 계열사의 상황, 계획 등에 얘기하기 시작했는데.

특이한 건, 주 내용이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계열사의 임원급 중에 누가 괜찮고, 누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그리고 젊은 사람 중에 누가 두각을 나타내는지 등에 대해서 사례와 함께 설명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겠데요?”

얘기를 듣다가 관심이 생기는 사람이 나오면, 가운데 여성은 꼭 이걸 물었다.

‘우리와 함께 갈 것인지.’

“아직 확답을 받진 못 했습니다.”

“부사장님이 선도생명에서 영향력을 많이 잃으셨나 보다. 아니면 평판이 안 좋거나.”

“······.”

“부사장씩이나 되는 분의 영입 제안을 받았는데, 고작 차장 직급이 망설이는 거라면······ 뻔하지 않아요?”

선도생명 부사장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저희가 누굴 모시고 있는지 말한다면, 아마 곧바로······.”

“쓸데없는 얘기는 하지 마시고요.”

“······.”

선도생명 부사장은 이 젊은 여성의 몇 마디 말에 꿈쩍도 하지 못했다.

“자리가 갖는 힘을 쓸 줄 모른다면,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죠.”

“······.”

“이해하셨죠? 전 분명히 말씀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부드럽게 말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였다.

가운데 여성은 절대로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를 잘 알고 있는 선도생명 부사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참석자들의 보고가 이어졌고.

선도 물산 영업본부장 한원철 상무의 차례가 되었다.

“한 상무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셨나요?”

“네, 요즘 선도물산은······.”

영업본부장은 보고를 시작했다.

그리고 끝부분에.

“오지혁 팀장이라고······ 눈에 띄는 직원이 있습니다.”

“오지혁?”

가운데 여성은 살짝 미소짓고는 말했다.

“저랑 성이 같네요?”

“아, 네.”

영업본부장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설명을 이어갔다.

“얼마 전 고려일보에 선도 물산 제품 기사 난 거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팍스버거 콜라보라고.”

“아~ 봤죠. 영업본부장님이 저 선물해주셨잖아요.”

가운데 여성이 영업본부장을 대하는 태도는 좀 달랐다. 다른 참석자들에 비해 신뢰 가득한 눈빛이었으며, 말투도 부드러웠다.

“그 옷 참 재밌더군요. 집에서 가끔 입어요. 호호.”

영업본부장은 빙그레 미소짓고는 계속 말했다.

“네, 그 팍스버거 콜라보 담당이었던 직원입니다. 나이는 28세로 젊은데, 이번에 대리 특진과 동시에 상품 기획1팀 팀장 자리를 꿰찼습니다.”

28세가 팀장 자리를 꿰찬 것 따위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전혀 영향력 있는 직급이 아니기에. 그것보다는······.

“상품기획? 거기는 송 상무님 관할 부서 아닌가요?”

송 상무는 상품본부장을 말하며, 상품본부장은 가운데 여성의 사람이 아니었다. 즉, 라인이 달랐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오지혁이라는 친구가 궁금하여 만나봤는데.”

“······.”

“추후에 분명 좋은 무기가 될 사람입니다.”

“그래요?”

“네, 아주 날카롭습니다.”

“날카롭다······.”

가운데 여성은 보일 듯 말듯 살짝 미소짓고는 말했다.

“마음에 드네요. 근데 상품본부 사람이면······.”

영업본부장은 그녀가 궁금해하는 걸, 묻기 전에 대답했다.

“저희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오······ 그래요? 그런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을······ 송 상무가 가만 둘리가 없을 텐데.”

“네, 근데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더군요.”

가운데 여성은 눈을 약간 찌푸리고 물었다.

“혹시 뒤통수치는 건 아니에요? 송 상무가 워낙 음흉한 사람이라, 전략적으로 심어 놨을 수도······.”

이 말에 영업본부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보면 압니다. 절대로 뒤통수 칠 사람은 아닙니다.”

가운데 여성은 영업본부장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한 상무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맞겠죠. 알겠습니다. 다음분?”

그렇게 계속 이어진 회의는 9시가 좀 넘어서 끝났다.

영업본부장은 회의를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메시지 : 오지혁 팀장]

‘영업본부장님 통화 가능하신가요?’

영업본부장은 갑작스러운 메시지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임원한테······ 참나.”

말은 이렇지만, 입가에는 반가움에 미소가 번졌다.

***

똑똑.

“들어와.”

유 실장이 굳은 얼굴로 상품본부실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유 실장은 들어와 인사했지만, 상품본부장은 마뜩잖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안녕하냐고?”

“······.”

유 실장은 고개를 숙였다.

상품본부실에 불려오기 바로 직전에 얘기를 들었다. 지혁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를.

“유남혁.”

상품본부장은 직급 대신 그의 이름을 불렀고. 유 실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일 똑바로 안 할래?”

“죄송합니다.”

“한번 맛보고 나니까, 성과에 욕심 생기나? 이렇게 네 멋대로 할 거면 독립해서 사업을 차려!”

상품본부장은 책상 위 보고서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고, 유 실장은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그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상품본부에 상품전략실만 있나?”

“······.”

“디자인실도 내 식구야.”

디자인 본부는 상품본부의 예하 부서다.

“야, 정도라는 게 있지. 이게 뭐 하는 거냐고. 진짜!”

“······.”

“설마 몰랐던 일이라고 할 건 아니지?”

상품본부장은 유 실장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어라? 몰랐어? 몰랐다는 표정인데?”

사실, 유 실장은 지혁이 꾸미는 일을 전혀 모르진 않았다.

출근하고 나면 사무실 밖으로 절대 벗어나지 않던 윤 차장이 최근 외근이 잦았으며.

생산팀의 황 대리가 상품기획팀에 파견 와서 근무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홍썬의 존재까지는 몰랐으나, 외부 인사를 업무에 끌어들이는 것 같다는 짐작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디자인실에 직격탄을 날리는 수준일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

유 실장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알았다고 하기도 뭐하고, 몰랐다고 하기도 뭐한 상황.

“제기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알았는데 가만히 있었다면, 더 문제고!”

유 실장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젠장, 대꾸 안 하길 잘했다.’

묵묵부답인 유 실장을 보다가, 상품본부장이 물었다.

“오지혁이랬나? 걔가 그렇게 꼴통이라며? 디자인실장이 하소연을 엄청 하던데? ”

짐작한 대로였다.

‘디자인실장이 오지혁이한테 당하고, 상품본부장에게 일렀나 보네.’

“어떻게 일개 팀장이 실장한테 그럴 수가 있냐?”

상품본부장은 유 실장을 노려보다가 빈정거렸다.

“대단하신 상품전략실 유 실장님. 그렇게 아래 직원 컨트롤이 안 돼? 내가 나서야 해?”

“······.”

말만 이럴 뿐, 상품본부장은 절대 이런 일에 나서지 않는다.

더럽고 껄끄러운 일은 어떻게든 피하며, 자기 손에는 절대 피 안 묻히는 스타일.

익히 또라이로 소문 난 오지혁 같은 인물과는 절대 마주하지 않을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단도리 잘하겠습니다.”

“하아-”

상품본부장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유 실장아. 자네 정도면 잘 알잖아. 회사에서 성과가 중요해? 어?”

“······.”

“윗사람 면이 안 서면, 조직의 힘이 빠지는 거고, 자네도 위축될 수밖에 없는 거야.”

“······.”

“가족끼리 허물은 감싸줘야 하지 않겠냐?”

현재 선도물산 디자인실에 문제가 많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수면 위로 떠 오르면, 몇 년간 방치한 상품본부장이 큰 타격을 받는다.

이건 오로지 상품본부장 자신만을 위한 얘기였다.

상품본부장이 돌려 말해도, 그의 본 의도를 유 실장도 모르지 않았다.

‘더러운 새끼.’

맘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 실장의 상급자며, 그에게 회사생활의 모든 걸 걸고 있기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오 팀장한테 잘 얘기해서, 지금 하는 일 중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유 실장. 자네 똑똑한 사람이잖아.”

상품본부장은 위협적으로 유 실장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잘하자. 응?”

“······ 알겠습니다.”

***

상품전략실로 돌아온 후, 유 실장은 머리가 아팠다.

‘심 팀장을 괜히 보냈나.’

인정하긴 싫지만······ 지혁이 컨트롤 안 되는 건 사실이었다.

심지어 지혁의 눈치가 보여서, 업무지시도 맘 편하게 못 할 정도였으니.

성과에 눈이 멀어 실수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백 과장! 오 팀장 왜 안 와? 호출한 거 맞아?!”

백 과장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각 잡고 대답했다.

“네! 지금 다시 연락해보겠습니다!”

유 실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혁은 현재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룰 죽여 놓든, 아니면 내치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똑. 똑.

[오지혁입니다.]

“들어와!”

지혁이 들어오자, 유 실장은 백 과장에게 말했다.

“백 과장은 나가 있어.”

“네?”

“나가!”

유 실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고.

백 과장은 식겁한 얼굴로 잰걸음으로 나갔다.

살벌한 분위기.

그래도 지혁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야 오 팀장.”

막상 지혁을 마주하자, 유 실장은 이성을 잃었다.

“너 뭐 하는 사람이야?”

“······.”

“상급자한테 보고도 안 하고 이따위 일을 꾸며?! 보자 보자 하니까. 날 물로 봤어?! 어!”

지혁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왜? 녹음이라도 해서 폭언으로 고발하게? 협의 되지 않은 녹취가 효용성이 있을 거 같아? 내가 심 팀장처럼 물렁물렁하게 당할 것 같냐고!”

유 실장은 말을 할수록 더 흥분이 고조되었다.

“아~ 이제야 알겠네. 다음 목표는 내 자리냐? 나 보내버리고 네가 상품전략실장 되려고?”

씩- 씩-

유 실장은 콧김을 뿜으며 지혁을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지혁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내가 너무 정확하게 말했나?”

“······.”

“좋게 말할 때, 지금 하는 홍썬 디자인인지 뭔지 관둬라. 너 하나 잘리게 하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래도 지혁은 묵묵부답이었고.

그 후로도 유 실장은 한참을 더 쏟아내었다.

그의 흥분된 숨소리가 좀 잦아들 때쯤.

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얘기 잘 들었고요.”

유 실장은 귀를 쫑긋 세웠다.

뭐라도 이상한 소리를 하면, 곧바로 퍼부을 생각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유 실장은 준비했다.

‘아주, 한마디만 해봐라. 찍소리 못하게 해줄 테니까.’

근데, 지혁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 나왔다.

“언제까지 상품본부장의 하수인으로 사실 생각이세요?”

“어?”

유 실장은 입을 벌린 채 할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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