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50화 (50/301)

50. 여파 (2)

유 실장의 아랫입술이 떨렸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분명히 들었으나 믿기지가 않았다. 자존심도 너무 상했다.

‘분명······ 오지혁이가 지금 나한테 하수인이라고 했지?’

화는 나는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급소에 일격을 당한 기분.

유 실장 또한 방금 지혁이 한 말을 생각해왔었기 때문이다.

상품본부장이 하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론 그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들이 너무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묵묵히 따랐었다.

그게 지금의 유 실장에게 있어서 가장 견고한 동아줄이기에.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유 실장에게, 상품본부장의 존재는 가장 확실한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유 실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보다는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하지만 이런 유 실장의 기분과 달리 지혁은 너무도 태연했다.

유 실장의 물음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날카로운 말을 다시 해주었다.

“계속 상품본부장의 하수인으로 살 거냐고 물었어요.”

“······.”

유 실장은 황당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이 한마디 일격에······ 전의를 상실했다.

지혁은 초점 잃은 유 실장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무리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먹혀들었군.’

유 실장은 멍한 얼굴이었다.

지혁에게 나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시죠?”

유 실장은 심장이 아팠다.

‘상품본부장의 하수인인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냐고? 이걸 질문이라고 해?’

유 실장의 표정을 살피다가, 지혁이 이번엔 달래듯 말했다.

“단어 선택이 좀 과했다면 사과드리죠. 순간 적절한 단어가 안 떠올라서. 좀 더 교양있는 표현을 쓸걸 그랬나. 집사라든지.”

유 실장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 씨발새끼가······.’

속으로만 생각할 뿐,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괜히 자극했다가 지혁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저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관찰부터 해요.”

“······.”

“팀장이 되고 난 후 제 직속 상관인 유 실장님과 그 주변 관계를 좀 알아봤었죠. 그리고 어렵지 않게 알게된 게, 유 실장님이 상품본부장의······.”

지혁의 입 모양이 또 ‘하수인’ 소리를 내려는 듯 벌어지려는 찰나에.

유 실장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해······.”

“······.”

지혁은 말을 멈추었다.

***

‘좀 세긴 했지만, 유 실장 정도 되는 사람의 귀를 순하게 만들려면······.’

유 실장의 넋 놓은 얼굴.

이제 그가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심 팀장님이요.”

“어?”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오자, 유 실장은 고개를 들었다.

“유 실장님은 심 팀장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나요?”

“심 팀장? 갑자기 그 양반은 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세요.”

유 실장은 지금 순한 양이 되어 있었고. 지혁의 고압적인 태도에도 순순히 대답했다.

“일을 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다루기는 편한 사람이었지. 처세도 잘했던 거 같고.”

“상급자에겐 그렇게 보였나보죠. 부하직원들에게는 어떤 사람이었을 거 같아요?”

“평판이 안 좋은 것 정도는 알고 있네. 그 사람 아래 매년 팀원 구성이 바뀔 정도였으니까.”

“그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보시나요?”

“명백하게 아니지.”

지혁은 유 실장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상품본부장은······ 심 팀장 같은 사람이에요. 아니, 아니, 심 팀장보다 더하죠. 차가운 머리까지 갖춰졌으니.”

“······.”

“거기다가 이미지 포장도 너무 잘하죠. 그래서 그 자리까지 올라갔겠지만.”

유 실장은 말을 듣는 내내 얼떨떨했다.

“다각도로 봐야 해요. 원래 한 방향에서는 잘 안 보이기 마련이거든요. 제 말이 틀린 지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유 실장은 지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상품본부장이 심 팀장 같은 사람이라······.’

유 실장은 상품본부장을 항상 아래에서 위로만 봤다. 항상 직속 상사로만 대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통상 아래에서 위는 잘 안 보이는 법이다. 그에 반해 위에서 아래는 너무 잘 보인다.

유 실장 또한 보통 인물이 아니기에, 지혁이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맞아. 그 인간이 뭔가 해줄 것처럼 더러운 일은 잔뜩 시키면서, 결국에 돌아오는 건 없었어. 성과도 본인이 다 가져가고, 얼마 전 팍스버거 콜라보 건만 해도······.’

상품전략실에서 주도적으로 한 일이었지만, 유 실장이 받은 건 전 임원 앞에서 박수받은 것 말고는 없었다.

성과와 체면을 중시하는 유 실장의 성향을 알고, 상품본부장은 그걸로 때운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양아치이긴 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흠칫!

지혁을 봤다가 눈이 마주쳐서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근데 얘는 이런 걸 어떻게 다 파악했을까. 사설탐정이라도 쓰는 건가? 설마, 그건 아닐 테고······.’

문득, 얼마 전 팀장 미팅에서 상품기획 3팀장의 재혼 사실까지 알고 있던 지혁을 떠올렸다.

이런저런 정황을 봤을 때.

‘나에 대해서도 꽤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그 생각이 들자, 지금 지혁의 쎄한 눈빛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이 남자 앞에서 잔머리 굴려봐야 더 우스워질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혁은 이런 유 실장의 표정과 분위기를 살피며, 그의 심정 변화를 가늠했다.

‘상황 판단이 빠르군. 유 실장, 볼수록 꽤 괜찮은 사람이야.’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이 얘기를 나한테 왜 하는 거지?”

“제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요.”

이제 흥분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는 평소의 유 실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준비가 되신거 같네요.”

지혁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론부터 얘기하죠.”

“······.”

“상품본부장을 찍어 낼 겁니다.”

“······!”

“그 인간은 너무 견고해서 안에서부터 깨 나가야 하고, 그래서 상품본부장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죠.”

유 실장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지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그 도움을 줄 사람이, 나라는 건가?”

“네.”

유 실장은 생각했다.

홍썬라인, 디자인실 외주, 극비진행, 디자인실장 도발, 상품본부장의 격노, 그리고······ 지금의 유 실장까지.

일련의 상황이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었고,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혹시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처음부터······.’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 아닐 거야. 무슨 이유로. 얘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

지혁은 이런 유 실장을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확실히 실장님이 머리 회전이 빠르시네요.”

이 말에 유 실장은 인상을 구겼다.

‘아······ 힘들다.’

지금, 지혁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건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간단해요. 유리천장은 깨야 합니다. 전 지금 상품본부에 소속되어 있고, 그런 인간 밑에 있으면 한계가 있거든요.”

“······.”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으나, 유 실장 앞에서는 표면적인 이유만 들었다.

“관리되지 않는 위협은 부순다. 그게 제 철칙이에요. 상대가 누구든.”

꿀꺽.

유 실장은 침을 삼켰다.

“제가 메시지로 장소 보낼 테니까, 오늘 저녁같이 하시죠.”

“······.”

“제 사전에 배신은 없습니다. 저에게도 상대에게도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지혁은 살짝 목례하고 상품전략실을 나갔고.

유 실장은 지혁이 나간 뒤에도, 한참동안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

상품기획 1팀.

윤 차장은 사무실에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난 생산의뢰서를 책상 위에 올려 두지 않는데······.”

담당 디자이너가 ‘홍썬라인’을 알게 된 게, 책상 위에 올려진 생산의뢰서 때문이란 걸 들은 후 계속 고민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평소 정리정돈을 잘하는 성향이기도 했고, 홍썬라인은 특히 더 조심했었다.

하필, 외근 나간 사이에 생산의뢰서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는 게······.

“CCTV라도 돌려볼까.”

옆에서 이 말을 들은 정 과장이 말했다.

“에이~ 적당히 하세요. 뭔 CCTV까지. 어차피 다 벌어진 일인데.”

“이상하잖아~ 사무실에 도둑이라도 있는 거면 어쩌려고.”

“보안요원이 1층에만 수십 명. 각 층마다 배치되어 있는데, 그렇게 남 탓을 하고 싶으세요?”

윤 차장은 발끈했다.

“뭔 남 탓이야? 진짜 궁금해서 그렇다니깐.”

“그냥 차장님께서 실수로 책상 위에 흘리신 거지······.”

“아니라니까?!”

그때 지혁이 사무실로 들어왔고.

윤 차장은 지혁의 얼굴을 보고는 곧바로 입을 닫았다.

비밀 유지를 하랬는데 결국엔 자기로부터 벌어진 일이라,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지혁은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단 말이야. 비밀 발설하면 죽일 것처럼 말하더니.’

“윤 차장님.”

지혁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서 대답했다.

“응? 어, 어. 왜?!”

“뭐 할 말 있으세요?”

“아니~ 할 말 없어.”

“아님, 뭐 궁금한 거 있어요?”

“궁금한 거?”

윤 차장은 눈알을 굴렸다.

‘갑자기 이 질문을 왜 하지?’

“아니야~ 없어~”

“그래요. 불필요한 궁금증은 가질 필요 없어요.”

“뭐?”

“일 보세요.”

“아, 알았어······.”

잠시 후 퇴근 시간이 되었고,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갑니다.”

***

서초구 내곡동.

청계산 자락의 주택가가 모여 있는 곳.

강남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뭐야······ 식당도 많은데, 그냥 강남역 근처에서 먹지.”

유 실장은 지혁이 알려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어서 가고 있었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에 인가도 몇개 안 보이고 음침해졌다.

“참······ 식당 위치도 오 팀장답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랑산성’

식당 간판을 보고, 유 실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름이 뭐 이래?’

식당 주변에 차는 꽤 있는데, 아무도 없는 듯 너무 조용했다.

왜 이곳에서 보자고 했는지, 짐작되었다.

‘보안이 철저한 곳인가 보군.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알았대.’

식당 정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개량 한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이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일행 있으신가요?”

“아, 네. 오지혁 씨 만나러 왔습니다.”

“아, 네. 도착해 계십니다. 6번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여직원을 따라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생각했다.

‘6번 방? 구조는 꼭 단란한 곳 같은데, 노랫소리는 안 들리고······ 희한한 식당이네.’

“이쪽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유남혁입니다.”

똑. 똑.

여직원은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유남혁 님 오셨습니다. 들이셔도 될까요?”

[네.]

덜컹.

여직원은 문을 연 후,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아, 네 감사합니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니.

곧바로 지혁이 보였고.

“엇?!”

그리고 그 옆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인물.

“허허. 유 실장, 어서오게.”

영업본부장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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