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비밀 회동 (2)
어제 디자인 본부에서 7명의 디자이너와 맞닥뜨린 후.
지혁은 영업본부장에게 전화했었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어~ 오 팀장. 오랜만이야. 잘 지내고 있나?]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지혁은 영업본부장처럼 안부는 묻지 않았다. 그 목적으로 전화한 게 아니니까.
[본부장님께서 제게 힘이 되어주신다고 했죠?]
[그랬지. 무슨 일 있나?]
그때 만남 이후로 처음 연락한 거였다.
영업본부장 또한 지혁의 스타일을 파악했기에, 분명 목적이 있어서 전화했을 거라 생각했다.
[조만간 상품본부장이 움직일 것 같거든요.]
[어?]
[제가 좀 건드렸어요.]
영업본부장은 지혁이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분명 영업본부장은 상품본부장과 경쟁 구도이긴 하지만······.
‘난 오 팀장에게 이와 관련해서 아무런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어쨌든, 과정은 나중에 확인하면 되고, 상품본부장 얘기가 나오니 촉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왜 건드렸지?]
[손을 잡기로 했으면, 공동의 적이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이 맘에 들지 않기도 하고요.]
지혁은 상품본부장을 ‘그 사람’이라고 서슴지 않고 표현했으나, 영업본부장은 그게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지혁이 말했다.
[주변에 사람 있습니까?]
[어, 좀.]
[그러면, 자리 이동하시면서 제가 하는 말만 들으세요.]
[그러지.]
지혁은 어떤 일을 벌였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얘기했다.
영업본부장은 자리를 이동하는 내내 지혁의 얘기를 들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우연을 가장한 전략.
트라우마와 욕구를 이용한 심리전.
지혁의 말 대로라면, 조만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지금껏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상품본부장의 위치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어느덧 혼자만의 자리로 이동한 영업본부장은 놀란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자네······ 지금 농담 아니지?]
[아니에요.]
그리고 지혁은 영업본부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 건데, 영업본부장님께서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
[이건, 반드시 들어주셔야 합니다.]
***
‘제가 얻는 건 뭡니까?’
내곡동의 청계산 자락. ‘사랑산성’ 레스토랑의 6번 방에 정적이 흘렀다.
유 실장의 대놓고 한 물음에 영업본부장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상품본부장 자리를 약속하겠네.”
“······!”
유 실장은 놀라움에 눈이 부릅떠졌다.
상품본부장.
선도물산 패션 영역에서 꿈의 자리로 불리며, 상품 기획과 디자인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수장.
요직 중의 요직이며, 대표이사로 이어지는 승진 코스다.
같은 본부장이라도, 상품본부장이 영업본부장보다도 상위 직급으로 불린다.
영업본부장 또한 욕심내고 있던 자리인데.
그 자리를 유 실장에게 약속한 것이다.
“정말······ 입니까?”
유 실장은 얼떨떨했다. 이걸 믿어도 될지. 그리고······.
‘상품본부장을 쳐내는 게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인가? 난 지금까지 그쪽 사람이었는데······ 그런 내게 상품본부장 자리를 약속할 정도로······.’
며칠 전 지혁과 상의하여 결정한 일이었기에, 영업본부장은 대답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 송 상무가 내려가면, 내가 반드시 자네를 그 자리에 앉히겠네. 믿어도 좋아.”
“······.”
유 실장은 지혁을 한번 바라보았고.
지혁은 유 실장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상품본부장은 또한 최소 직위가 상무 이상이다. 즉, 유 실장에게 상품본부장 자리를 약속한다는 건, 승진도 보장한다는 뜻이다.
“제가 못 미더워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서 여쭤보는 건데.”
“······.”
“이게 과연···...감당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까?”
“내 뒤에 실력자가 있다고 했지?”
“오 씨라고 하셨던······.”
“그래, 일만 성사시키면 감당하고도 남지.”
“······.”
이로써 유 실장은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성과와 명성에 눈이 먼 남자.
유 실장에게 이 정도의 가치라면, 어떠한 위험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이사만 몇 년째냐.’
이사까지는 빨리 승진했으나, 이사 이후 오랜 기간 그 자리였다.
유 실장은 영업본부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협조하겠습니다. 그리고 믿겠습니다.”
영업본부장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자코 지켜보던 지혁도 한마디 했다.
“지금 제가 옆에서 지켜봤고, 절대 배신은 없습니다. 두 분 다 염려 놓으셔도 돼요.”
“······.”
유 실장과 영업본부장 한 상무.
두 남자는 지혁의 위협적인 눈빛에 잡은 손을 어색하게 흔들었다.
***
“자, 이제 편하게 술 한잔하면서 얘기하지.”
“좋습니다.”
영업본부장과 유 실장.
두 남자는 서로 잔을 채워주었다.
영업본부장이 지혁의 잔도 채워주려했다.
“자네도.”
“전 물 마실게요.”
지혁은 술 대신 물로 잔을 채웠다.
“자, 다들 한잔하지.”
영업본부장이 잔을 들었고, 세 남자는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는 어색하면서도 냉랭했는데.
적당한 알콜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었고.
한껏 긴장했었던 유 실장은 대번에 얼굴이 벌게졌다.
“근데,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
“그 양반 보통 아니에요. 조금만 어설펐다간 역으로 당할 겁니다. 그래도 계획이 있으니까, 저에게 함께 하자고 하셨겠죠?”
유 실장의 물음에 영업본부장은 피식 웃고는 지혁을 바라봤다.
“그 얘기는 오 팀장이 해주는 게 나을 것 같군. 이 사람이 다 계획했으니까.”
“계획이요?”
유 실장의 반문에 영업본부장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어떻게 알고, 이런 위험한 일을 벌였더군. 근데 내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 어느샌가 날 이미 끌어들여 놓은 상태라서. 자네처럼 말이야.”
유 실장은 지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긴······ 내가 이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놨지. 하여간, 생각할수록 무서운 놈이야.’
영업본부장이 말했다.
“오 팀장은 폭풍우에 선 키맨이야. 이제 죽든 살든 오 팀장을 믿고 가는 수밖에 없어.”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잘 아시네요. 두 분은 죽을힘을 다해 맡은 역할에 충실히 해주시면 됩니다.”
지혁은 유 실장을 바라봤다.
“어제 상품전략실에서 저한테 소리 지르며 난리 치실 때, 제가 드린 말씀 있죠?”
“응? 어, 내가 그랬었나.”
유 실장은 머쓱해서 대답했지만, 그런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혁은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그때, 기본 전략을 말씀드렸었어요. 안에서부터 깨나간다. 상품본부장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성과를 내어, 그의 무능함을 만방에 알릴 겁니다.”
“······.”
“그에 대한 대안으로 유 실장님이 부각될 거고요. 그러니까, 유 실장님이 해야할 건.”
유 실장은 지혁의 말을 집중하여 들었다.
“첫째로 우리가 지금 진행하는 ‘홍썬라인’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도록 지켜주셔야 합니다.”
“그 건은 이미 상품본부장이 알고 있는데. 디자인실장도 알고 있고.”
“상품본부장을 기만하든, 혹은 개무시를 하든 상관없습니다. 이 일은 상품전략실 예하의 상품기획 1팀이 하는 일이에요.”
“······.”
“유 실장님의 확실한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거라고 봐요.”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네, 그겁니다.”
유 실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쉽지 않겠는데. 내가 윗사람 의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건 자신 없는데, 그래본 경험도 없고.’
유 실장은 임원이 되기까지 정말 열심히 회사생활 했다.
밤낮없이 일했고, 가정보다는 회사가 우선이었으며, 상사가 하는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모신 직속 상사의 의견에 반하는 행동을 하라니, 어색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벤치마킹하시면 됩니다.”
“벤치마킹?”
“유 실장님 부하직원 중에 그런 거 기가 막히게 하는 사람 있잖아요.”
유 실장은 멀뚱히 지혁을 바라봤는데.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딱 저처럼 하시면 돼요.”
유 실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아······ 더 자신 없어지는데.’
***
영업본부장과 유 실장.
두 사람 간의 중요한 협의는 끝났고, 이젠 지혁이 필요한 걸 말할 차례였다.
“유 실장님.”
“응? 어어.”
유 실장은 이제 지혁에게 약간 질려버려서, 그가 부르는 것만으로도 괜히 기가 빠졌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나 안 놀랐어!”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요청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뭘 또~”
듣기도 전에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난 영업부장님께 약속받은 거야. 자네까지 부담스러운 거 시키려고 하지 마.”
“부담스러운 거 아니에요. 그냥 정보를 좀 받고 싶은 건데.”
“정보?”
“네.”
지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상품본부장에 대해서 아는 건 뭐든지 다 말해주세요.”
움찔.
옆에서 가만히 듣기만 하던 영업본부장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고.
유 실장은 반문했다.
“아는 건 뭐든지?”
“네. 예를 들어. 보통 몇 시쯤 퇴근해서 집에 가는 코스가 어떻게 되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뭘 먼저 하는지,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애들은 몇 살이며 학교는 어디 다니는지······.”
지혁은 예시로 든 건, 신상정보를 탈탈 터는 수준이었다.
유 실장은 얼이 빠진 채 듣다가 물었다.
“그런 건 알아서 뭐 하게?”
“상대방을 정확히 알수록 공략하기가 쉬워져요.”
“근데, 결혼 스토리 같은 게 중요해?”
“중요해질지도 모르죠. 정보를 어떻게 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유 실장님은 제공만 해주세요.”
“······.”
영업본부장은 생각했다.
‘배신 못 하게 하려고 그러는 건가? 상품본부장의 정보를 스스로 불게해서, 먼저 확실히 배신하게 만들려고?’
유 실장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믿겠다더니······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쓰네.’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무슨 생각 하실지 아는데요. 정말 필요해서 묻는 거예요. 제가 일하는 방식입니다.”
유 실장은 잠시 고민하고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얘기해줄 수 있는데. 나도 자세히는 잘 몰라. 그 사람은 사생활 관리를 철저히 해서, 최측근도 알기가 어려워.”
“······.”
“몇 시에 퇴근하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만, 오 팀장이 원하는 것처럼 자세한 정보까지는···....”
그리고 유 실장은 지혁의 눈빛을 살폈는데.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죠.”
“······.”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세요. 상품본부장님과.”
유 실장은 눈을 끔뻑거렸다.
‘이 자식이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건가?’
하지만, 지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제가 예시로 든 수준은 될 만큼. 많이 알아 가시는 겁니다.”
“······.”
“아시겠죠?”
상품본부장의 최측근이며. 전도유망한 젊은 임원이자, 선도물산에서 잘나가는 인물중 한 명인 유 실장.
그의 진짜 소속은 오늘 비밀회동을 통해 바뀌었다.
그리고······.
유 실장과 지혁의 위치도 바뀌었다.
회사 직급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진짜로 지시를 내리고 받는 역할은 달라진 것이다.
“알았어.”
유 실장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 정도의 상황 판단은 충분히 하는 사람이었다.
“자! 술 한잔하자고.”
두 남자의 대화 혹은 기 싸움을 지켜보던 영업본부장은 잔을 들었다.
비밀만 지켜진다면, 이 일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막후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28세 팀장이라는 건, 아무도 예상 못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