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과도한 충성심 (1)
“얘기했잖아요. 최고의 베테랑이 필요한 일이라고.”
“하아······.”
“이번 일 잘 마무리 지으면 윤 차장님은 완전 뜰 거예요.”
“난 그걸 원치 않아······.”
오래오래. 가늘고 길게.
윤 차장의 회사생활의 모토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런 중요한 업무의 담당이 되었고.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홍썬라인’의 일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단순히 성과만 내는 일이 아니야.’
윤 차장은 10년을 넘게 회사에 다닌 사람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회사생활에 대해서만큼은 동물적 감각이 있다.
지금 자신이 담당으로 맡고 있는 이 일이 단순히 성과뿐만이 아니라, 조직과 권력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상처 없는 승리란 없는 법.’
약간의 적도 만들기 싫고, 항상 나이스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윤 차장으로선 정말 고역이었다.
권력이란, 한쪽이 이득을 보면 다른 한쪽을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에.
“오 팀장~ 지금이라도 담당 바꾸면 안 돼? 나 요즘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머리숱도 적어지고 있어.”
“제가 심어드릴게요.”
윤 차장은 다급하게 말했다.
“주말에도 일 생각 하느라, 가족과의 관계도 요즘 소원해졌단 말이야.”
“일 끝나고, 비행기 한 번 태워드려요?”
“······.”
윤 차장은 황당한 눈길로 오 팀장을 바라봤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오 팀장은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대답에서 느낄 수 있었다.
‘홍썬라인은 반드시 윤 차장, 당신이 해야 한다.’
이 미묘한 신경전에 다른 팀원들은 눈치만 볼 뿐이었다.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 외에 또 문제 있어요? 담당하는데 걸리는 부분 있으면 얘기하세요. 해결해드릴 테니까.”
“하아······ 됐다. 제기랄.”
윤 차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일관성은 있다. 독재 스타일이라고 하더니, 아주 개 독재네.’
윤 차장은 입을 삐죽이며 다물었고.
지혁은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윤 차장님과 대화하느라 회의가 좀 길어졌는데.”
윤 차장은 눈치가 보여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자면.”
“······.”
지혁은 말을 끊고, 팀원 한 사람씩 돌아보다가 힘을 주어 말했다.
“이번엔 좀 이기적으로 가야 해요.”
“······.”
“우리 1팀만 압도적인 성과를 내야 합니다.”
‘그래야, 상품본부장에게 타격을 줄 수 있으니까.’
상품본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압도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그리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모르게 진행한다.
이게 전략의 핵심이었다.
상품본부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그의 무능함과 상품본부 조직의 문제를 만천하에 알리는 것.
하지만, 이런 속사정까지 팀원들에게 다 말해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단도리를 해도, 들은 귀가 많으면 비밀은 어디로든 새게 되니까.
“······.”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볼 만도 한데, 팀원 중 누구도 묻지 않았다.
지혁이 팀장이 된 후 근 한 달간, 팀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책임 있는 모습을 팀원들에게 보여줬었다.
28세의 젊은 팀장이지만, 팀원들은 이제 지혁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뭔가 생각이 있겠지.’
‘정진이한테 하는 거 보면, 아랫사람 엿 먹일 스타일은 아니야.’
‘얼마 전에 윤 차장님도 구해왔었잖아. 그 살벌하다는 디자인 본부에서.’
‘믿고 가자.’
지혁은 팀원들 눈빛을 읽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요. 잘 따라줄 것 같아서.”
“······.”
“이상 회의 마칠게요. 정진이만 빼고 모두 나가시면 됩니다.”
손정진은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팀원들이 모두 나간 뒤,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진아, 네가 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네, 팀장님. 말씀만 주십시오.”
지혁은 무심한 말투로 물었고.
“내가 너 믿어도 되겠냐?”
“물론입니다!”
손정진은 충성심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지혁의 물음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팀장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지혁은 손정진의 눈을 바라보았고.
손정진 또한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믿어볼게.”
“네!”
지혁은 천천히 말했다.
“상품본부장의 뒷담화를 해줬으면 해. 뭐······ 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하는 거니까, 익명의 내부고발이라고 할 수 있지.”
“사, 상품본부장님을요?”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냐?”
“······.”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
손정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니면······ 그 사람의 뒷담화는 할 수 없는, 어떤 사정이라도 있나?”
손정진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팀장님이 시키신 일인데,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동기들과 함께 하면 더 효과가 있을 거야.”
“네.”
손정진은 눈을 부릅뜬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지혁은 그런 그를 묘한 눈길로 살폈다.
***
윤 차장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어휴, 제기랄. 심 팀장 있을 때가 일하기는 편했는데.”
지혁이 팀장이 된 이후, 윤 차장은 예전보다 두 배는 바빠졌다.
월급 루팡으로 살다가 일복이 터지니, 일 욕심 없는 사람으로서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성과 내고 싶대? 어휴, 짜증 나.”
지혁은 손정진과 함께 아직 회의실에 있었고.
윤 차장의 툴툴거리는 소리를 정 과장이 옆에서 듣고 웃으며 말했다.
“차장님, 그러지 말고, 지혁이 있을 때 얘기하세요. 항상 꼭 없을 때 그러더라.”
윤 차장은 발끈하여 소리쳤다.
“야, 너 같으면 얘기할 수 있어?”
“······.”
“찍소리도 못 하면서.”
정 과장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과장이지, 차장이 아닌데······.”
띠링!
그때, 윤 차장 컴퓨터의 사내메신저가 떴다.
[윤 차장, 좋은 아침이야.]
‘상품본부장 송재호.’
메시지에 뜬 이름을 보고, 윤 차장은 인상을 썼다.
‘이 양반은 왜 또 연락한 거야.’
상품본부장은 윤 차장의 신입 시절, 팀원 대 팀장으로 잠깐 같이 일했었다.
심 팀장이 이동했던 시점부터 그는 자꾸 연락을 해왔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허허. 그래. 잠깐 시간 좀 괜찮나?]
인사치레는 짧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답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윤 차장은 짜증이 났지만, 한숨을 쉬고 타이핑했다.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냥, 차 한잔했으면 해서.]
상품본부장은 참 뻔뻔했다. 몇 년간 차는커녕, 지나가다 만나도 인사도 잘 안 한 사이였다.
근데, 필요해지니 아무렇지도 않게 연락을 참 잘한다.
‘보나 마나 홍썬라인 물어보려는 거겠지.’
만나기 싫었지만, 감히 상품본부장이 차 한잔하자는 걸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똑똑.
윤 차장은 상품본부실 문을 두드렸다.
덜컹.
“안녕하십니까.”
“그래~ 어서 와. 여기 앉게.”
상품본부장은 사람 좋은 미소로 윤 차장을 맞았다.
“커피 마실 텐가?”
“좀 전에 마셨어요. 괜찮습니다.”
윤 차장은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에 커피를 안 마시겠다고 했다.
“그럼, 유자차라도 한잔하게.”
윤 차장은 이 제안까지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젠장, 커피 마시겠다고 할걸. 신 거 안 좋아하는데.’
상품본부장은 직접 차를 타와서, 윤 차장 앞에 올려놓은 후 물었다.
“홍썬라인 정말 안 하는 건가?”
“네?”
“진짜로 안 하는 거냐고 물었네.”
밑도 끝도 없었다.
본론부터 들어갔다.
‘차 한 잔 줬으니, 마신 값 하라는 건가?’
윤 차장은 순간 짜증이 올라왔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그래, 빨리 얘기 끝내고 나가자. 부담스럽고 싫다.’
“안 합니다.”
윤 차장은 지혁의 타이밍도 참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좀 전에 팀 미팅을 했기에 망정이지, 그거 아니었으면 하고 있다고 말할 뻔했네.’
하지만, 상품본부장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래? 진짜?”
“······.”
윤 차장은 확인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윤 차장.”
“네.”
“자네 생각 잘해야 하네.”
“······.”
“나 상품본부장이야.”
윤 차장은 고개를 들어 상품본부장을 보았는데.
그의 눈에 광이 번쩍였다.
“날 기만할 생각 하면 안 돼.”
“······.”
윤 차장은 이런 상품본부장의 태도를 보며 불안했다.
‘혹시 다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알쏭달쏭하게 말을 하니, 윤 차장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미치겠네. 다들 왜 나 갖고 지랄이야. 난 그냥 최대한 오래 다니면서 월급만 제때 받고 싶을 뿐인데.’
윤 차장에게는 그저 ‘안위’가 중요했다.
오로지 회사생활 오래 할 수 있는 안위.
앞에 앉은 상품본부장.
그리고 무시무시한 오지혁.
두 사람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이를 어쩐다.’
상품본부장은 윤 차장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지.”
“······.”
“홍썬라인은 정말 관둔 건가?”
***
며칠이 지났다.
인사팀장은 아침부터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하아~ 진짜. 이걸, 진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어플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는데.
옆에서 배 대리가 말했다.
“팀장님,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익명이지 않습니까.”
‘블러인드’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어플.
예전엔 무시할만한 수준이었으나, 회사 명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커져서 인사팀에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제지. 익명이라 내용이 가감 없고, 뉴스거리로 만들어지기도 쉽고.”
“······.”
“이걸 도대체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회사 내부 얘기를 이렇게 다 까발려서 본인한테 좋을 게 뭐야? 답답한 사람들······.”
배 대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오죽하면 그러겠습니까. 얼굴 내놓고 말은 못 하겠고, 담고 있자니 속 터지니까.”
“······.”
인사팀장은 배 대리를 빤히 바라봤다.
“자네도 블러인드 하나?”
“네? 아, 아니요. 요즘 연애하기도 바쁩니다.”
“가만 보면······ 자긴 눈치가 좀 없는 거 같긴 해.”
“······.”
얼마 전 ‘브라운아이즈’ 발언 이후, 인사팀장은 배 대리를 탐탁지 않게 대했었다.
‘은근히 소심하다니까.’
배 대리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은근히 불만이 있었다.
인사팀장은 배 대리를 못마땅한 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특이사항 있으면 보고해 봐.”
배 대리는 본인이 확인한 블러인드 내용을 보고했다.
“최근에 이슈가 되는 글이 있는데요.”
“······.”
“상품본부장님에 관한 얘기입니다.”
“상품본부장님?”
인사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누구의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얘기? 설마······ 비리는 아니지?”
“그런 건 아닙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아닌데, 올라온 글을 읽어보면 직원들에게 인심을 잃은 것 같다는 인상입니다.”
“뭔데 그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라, 설명해 드리기가 어렵네요.”
배 대리는 인사팀장의 표정을 살피다가, 핸드폰을 켜며 물었다.
“지금 보여드릴 테니,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아니야. 보고 끝나고 한 번에 볼게. 다른 특이사항은 없고?”
손정진은 지혁의 준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동기 중에 키보드 워리어들이 많았고.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상품본부장님 외에 인상 깊게 거론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긴 합니다.”
"그게 누군데?"
하지만······.
과도한 충성심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오 팀장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