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과도한 충성심 (2)
『우선 나는 술을 잘 못 해. 우리 본부장은 회식을 하면 직원들 기어나가기 직전까지 먹이고, 본인도 어느 정도 취해야 술자리가 끝나. 아, 내 정체가 들통날까 봐 본부장이 누군지 정확히 말은 못 하겠음. 어쨌든, 그런 회식이 최소 일주일에 두 번 이상임. 빠질 수도 없음. 가정이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임.』
인사팀장은 배 대리가 보여준 블러인드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송 상무님이 이런 분이었어? 요즘 누가 회식을 이런 식으로 하지?”
“그러게요. 진짜 의왼데요.”
“그리고 여기 어디에도 송 상무라는 말은 없는데? 상품본부장이라고 명확히 표현된 것도 아니고.”
“끝까지 보시면 압니다.”
계속 읽어나갔다.
『내가 아직 회사 다닌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말할 정도면 말 다 했지. 근데, 술 마실 때마다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나중에 부하 직원들이 술 사달라고 할 때, 상급자가 되어서 못 마시면 안 된다고. 그래서 주량을 늘려주려 한다나. 마치 우리를 위해 그러는 것처럼 되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하아······ 이 무슨······.”
주량을 늘리기 위해서 술을 먹인다니. 어이가 없었다.
『근데, 중요한 건, 우리 중 그 누구도 본부장에게 술 사달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이 사람 왜 이런 거니? 아는 형, 누나들. 댓 좀 달아줘. 이러다가 나 위장 다 나가겠어.』
피식.
인사팀장은 글쓴이가 어떤 표정으로 썼을지 짐작이 되어, 헛웃음이 나왔다.
해당 글에는 꽤 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마라ㅋㅋ
└그걸 왜 이해하려 하는 거니?
└그냥 ㅈㄴ 술 마실 사람 없어서 그런거임.
└불쌍하다. 에휴······ ㅉㅉ
인사팀장은 댓글을 따라 계속 쭉 내려갔고.
└그 사람 누군지 알 것 같음.
└나도 이동 전까지 엄청 힘들었음.
└송 씨 아니야?
└ㅇㅇ
└아는 사람은 알지.
└고생 혀라······.
송씨 성을 가진 본부장은 상품본부장 송재호 상무밖에 없다.
인사팀장은 왜 배 대리가 끝까지 읽어보라 한 건지 이해가 되었다.
“문제가 심각하네.”
“근데, 제재를 하기도 애매합니다.”
“······.”
고심하는 인사팀장을 보다가, 배 대리가 말했다.
“그 바로 아래 글도 보시죠. 오 팀장님 얘기입니다.”
“그래?”
상품본부장 저격 글 바로 아래.
‘상남자 팀장님에 대한 이야기.’
“제목부터 마음에 드네.”
인사팀장은 바로 클릭했다.
『우리 팀장님은 사람 자체가 혁신임. 할 일만 제대로 하면 그 어떤 것도 터치하지 않음. 쏘는 것도 좋아함.』
“쏘는 걸 좋아해?”
인사팀장님이 의아해하자, 배 대리도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돈이 많아서 그런 거겠죠?”
“음······. 하긴.”
인사팀장은 계속 읽었다.
『또라이 팀장으로 유명한 팀에 배치된다고 해서, 잔뜩 긴장하고 왔는데. 내게는 이런 천사표가 없음. 남들한테 차가운데, 나한테만 시크하게 잘해주니까, 더 매력적임. 같은 남자인데도 심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님. 복도에서 동기들이랑 노가리 까다가 걸렸는데, 혼내지 않고 카드 주면서 카페 가서 놀다 오라는 팀장이 솔직히 어딨음?』
“신입사원인가 보네?”
“일부러 지칭은 안 한 거 같은데, 티가 확 나죠?”
“요즘 신입들은 블러인드를 잘하나?”
위의 상품본부장 저격 글도 신입사원이 쓴 것처럼 보였었다.
『우리 팀장님 같은 상사만 있다면, 앞으로 회사생활 할 맛 날 듯. 그래서 난 요즘 회사 좋아하고, 일도 좋아해! 우리 팀장님 화이팅!』
“와우~ 오 팀장님. 멋지다!”
인사팀장은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고.
배 대리가 말했다.
“댓글이 재밌습니다. 보시죠.”
└숨겨왔던 나아아아아의~~
└그렇게 빠지는 거야······.
└그 팀장 누군지 좀 알려줘.
└또라이 팀장이면 한 명밖에 없지.
└얘기만 들어도 심쿵한다.
└나 남잔데 왜 가슴이 두근두근.
인사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러게, 재밌기는 한데······.”
인사팀장은 핸드폰 건네며 말했다.
“배 대리.”
“네.”
“뭐······ 오 팀장님은 됐고. 송 상무님 관찰 좀 해봐. 지금보다 더 말이 더 나오면 뭐라도 해야 해.”
“송 상무님을요?”
“그럼 어떡하냐. 이거 다른 회사 사람들도 다 보는 글이잖아. 선도 물산의 본부장에 관한 얘기인데.”
“······.”
“회사 평판은 사소한 계기로 개판 돼. 평판 좋게 하기는 어려워도, 나락으로 가는 건 순간이야. 땅콩 사건 기억하지?”
배 대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호호 속이 다 시원하네.
-누가 썼는지. 용기 있네.
-이왕 쓰는 거, 성과 가로채는 것도 쓰지.
-에이~ 그럼 너무 특정되잖아.
덜컹.
문소리가 들리자, 모여있던 직원들은 일제히 흩어졌다.
상품본부장이었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
“뭔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었어?”
“······.”
상품본부실의 직원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품본부장은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다.
“묻잖아?”
연차 높은 남직원 한 명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냥 인터넷에 재밌는 글이 있어서 함께 보고 있었습니다.”
“그 글이 뭔데? 어디 봐봐.”
상품본부장은 최근 사람들이 웃다가 자신만 다가가면 조용해지는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남직원은 일부러 스마트폰을 몇 번 눌러보는 시늉을 한 뒤, 과장된 액션으로 말했다.
“아~ 방금 인터넷에서 본 거였는데. 다시 찾으려니 모르겠네요.”
“······.”
상품본부장은 남직원을 유심히 보며 물었다.
“근데, 자네 왜 이렇게 땀을 흘리지?”
“네?”
남직원의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많이 덥나?”
“······.”
“아니면 갑자기 더워졌어?”
남직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잘못 걸렸다. 블러인드에서 본부장님 흉 올라온 거 보고 웃었다는 말을 어떻게 해.’
주위를 돌아보았는데.
함께 보고 웃었던 직원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아······ 내가 왜 나섰을까. 왜! 왜!’
회사에서는 총대 메는 거 아니라며 자책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
“후우~ 덥지는 않은데.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한약을 먹고 있습니다.”
“······.”
“아이고 덥다. 저 잠깐 화장실 좀······ 죄송합니다~”
남직원은 눈을 질끈 감고,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제발 내버려 둬~!’
상품본부장은 그를 다시 부르려 했는데.
“본부장님.”
옆에 서류 파일을 들고, 은테안경을 쓴 남자가 말했다.
“그냥, 두시죠. 괜히 평판 안 좋아지십니다.”
“추 차장은 뭐 짐작 가는 거 없나?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추기영 차장. 상품본부의 최고 실무자이며, 상품본부장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다.
“글쎄요. 아래 직원들이 본부장님을 좀 피하는 느낌을 받기는 합니다.”
“흠······.”
상품본부장은 탐탁지 않은 듯 인상을 썼고, 추 차장은 그의 표정을 살핀 후 말했다.
“제가 좀 알아보겠습니다.”
“······.”
상품본부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껄끄러운 내용도 상관없으니까, 확인해보고 가감 없이 알려줘.”
“알겠습니다.”
상품본부장은 자애로운 미소로 표정을 싹 바꾼 후, 상품본부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요즘 회식한 지 오래됐지? 우리 직원들 맛있는 것 좀 먹여야겠군~ 하하.”
“······.”
“추 차장. 오늘 저녁 회식 잡게. 음식점은 항상 가던 곳으로.”
사무실 어디선가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추 차장은 별다른 감정 없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
아지트에 지혁은 황 대리와 함께 있었다.
여느 때처럼 황 대리는 담배 피우고, 지혁은 캔커피 마시며 이런저런 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손정진 씨 아닌 거 같은데요?”
지혁은 황 대리와 모든 내용을 공유했었고.
손정진이 이상한 거 같다며 함께 예의주시하자는 말도 했었다.
“블러인드에 저격글 잘 올렸던데. 상품본부장 사람이라면 그런 글을 어떻게 올리겠어요.”
“글쎄요. 그냥 마음을 돌린 것 같은데.”
황 대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 친구가 오 팀장님 좋아하는 건 진심이잖아요. 보면 딱 티가 나니까.”
황 대리는 말을 뱉고 나서, 약간 질린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거 때문에 잘해준 거였어요?”
“······.”
지혁은 이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조금도 관여하지 않은 손정진의 인사발령. 처음에 의심을 갖고 지켜봤었고.
손정진이 상품본부장에게 일일 보고 하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냥 발령 받기 전에 지시를 받은 것 같았고.
신입사원으로서, 윗사람이 시키니까 기계적으로 하는 거였다.
“복합적이죠. 그냥 잘해주고 싶기도 했고,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기도 했고.”
“······.”
“이 테스트로 결론을 내려 했는데······ 다행이네요. 저도 그 녀석이 마음에 들던 터라.”
황 대리는 뭔가 떠오른 듯 환한 미소를 지었고.
지혁은 의아하며 쳐다봤다.
“왜 웃어요?”
지혁은 뭔가 싶어서 황 대리를 바라봤고.
황 대리는 그런 지혁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이 손정진 씨를 아주 홀리셨나 봐요. 블러인드에 그런 글까지 올린 거 보면.”
“네?”
생각지 못한 말에 지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반문했고.
“그런 글이 뭐죠?”
“에이~ 알면서. 익명으로 쓴 글이지만 누굴 향해 썼는지 다 알겠던데.”
황 대리는 웃으며 말했지만, 지혁은 웃지 않았다.
“뭔데 그래요?”
지혁의 표정이 확 바뀌니, 황 대리는 약간 당황했다.
“그 글도 핫한데. 진짜 모르세요?”
흠칫!
지혁은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상품본부장님 못지않게 오 팀장님 글 조회수도······.”
지혁은 눈을 부릅떴고.
재빨리 핸드폰을 켰다.
상품본부장 저격글이 올라온 걸 확인한 이후, 블러인드에 들어가지 않았었다.
클릭. 클릭.
상품본부장 저격글 바로 아래.
‘상남자 팀장님에 대한 이야기.’
순식간에 내용을 읽은 후.
지혁은 험악한 얼굴이 되어, 바로 손정진에게 전화했다.
“야, 너 어디야.”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황 대리는 지금까지 어디서도 느껴본 적 없는 살벌한 기운을 느꼈다.
‘이런 걸 살기라고 하나? 도대체 누구와 통화 하길래.’
핸드폰을 든 지혁의 모습은 너무나도 서늘했다.
“누가 이따위 짓 하래? 어?”
지혁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내 글 내려. 당장!”
갑작스러운 사자후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다 쳐다봤고.
황 대리는 오금이 저렸다.
뚝.
지혁은 핸드폰을 끊은 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먼저 갑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뭐가요?”
“그냥······.”
***
지혁은 사무실로 올라가지 않고, 옥상으로 향했다.
흥분된 가슴을 먼저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하필 내 칭찬글을 상품본부장 저격글 바로 아래다가······ 그 눈치 빠른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 안 할 리가 없잖아.’
띠링!
[메시지 : 유 실장]
‘상품본부장도 오늘 블러인드를 확인한 것 같네. 자네 글은 못 본 모양이야.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네.’
회사로 걸어오는 동안 유 실장에게 급하게 연락하여, 상품본부장 동정을 살펴달라고 했었다.
“하아······다행이다.”
운 좋게도 상품본부장이 확인하기 전에, 손정진이 ‘상남자 팀장 이야기’ 글을 삭제한 것이다.
계획이 한순간에 날아갈 뻔했다
지혁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한숨 돌리고 있는데.
“참 피곤하다. 피곤해.”
옥상 반대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고. 놀란 지혁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옥상 비상구 계단 뒤에서 윤 차장이 입에 담배를 물고 나왔다.
‘내가 사람 기척을 못 느낄 리 없는데, 아주 혼을 빼놓고 있었구나.’
“담배도 안 피우는 사람이 옥상에는 왜 올라와서 그렇게 한숨을 쉬냐?”
“제 걱정 말고, 윤 차장님이나 담배 적당히 피워요. 그러다 일찍 갑니다.”
“어차피 뒤질 거, 하고 싶은 대로 살다 갈란다.”
‘어차피 뒤진다.’ 평소, 지혁이 종종 쓰는 말이었다.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으니, 생소하게 느껴졌다.
“오 팀장 자기 얼굴 좀 봐봐. 거울 안 보고 살지?”
“······.”
“완전 저승사자가 따로 없어. 꼭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해?”
윤 차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나처럼 살면 잘못된 거야? 회사생활에 꼭 목적이 있어야만 하는 거냐고.”
“······.”
지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윤 차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