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지상낙원, 징후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 안.
여름이 막 지난 시기, 지혁은 좀 늦게 휴가를 냈다.
그리고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
“좀 찌릿하네.”
긴장한 지혁의 모습을 보며 수아가 웃었다.
“너 뭐야. 호호.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오지혁 씨 맞아?”
“놀리지 마. 처음이란 말이야.”
수아는 평소와 다른 지혁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혁은 죽을 맛이었다.
‘이러고 8시간을 가야 하다니. 하와이 전에 제주도라도 먼저 가볼걸.’
하지만, 수아는 마냥 신나 있었다.
“진짜 하와이를 가게 된다니. 너무 좋아. 호호.”
“나도 좋긴 한데,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어.”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 비행기 안이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안정이 찾아오고 있었다.
“우리 신혼여행 때 부곡 하와이에서 기념사진 찍었던 거 기억나? 여기도 하와이라면서.”
“왜 슬픈 얘기를 하고 그래.”
신혼여행 때 해외에 갈 상황과 형편이 안 되어서 국내 관광지 몇 곳만 돌았었다.
수아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슬프지 않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었지. 그리고 나름 좋은 추억이야. 재밌었어.”
지혁은 수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결혼하고, 일년 뒤에 지혁은 췌장암을 앓고, 그 후 1년간 실종됐었다.
수아가 참 많은 고생을 했다.
지혁은 그걸 가슴 속에 새기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니까.”
“······.”
지혁은 생색내는 건 싫었지만, 지금은 필요가 있었다.
“지금 나 봐봐. 팀장 되고~ 승진도 하고~ 월급도 많이 받고. 이번 달은 아직도 돈 많이 남았어.”
이 말에 수아는 가자미눈이 되었다.
“너 아직 내 카드빚 다 안 갚았거든?”
“에이~ 얼마 안 되잖아. 그리고 그건 그냥 준 거 아니었어?”
“어쭈?”
수아는 이 얘기를 벼르고 있었다. 말 나온 김에 한마디 하려 했는데.
쪽-
지혁이 입으로 막았다.
“······뭐야.”
수아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고.
지혁은 장난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여기가 캠핑카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렇지?”
신호를 보내는 듯, 지혁이 눈썹을 살짝살짝 올리자.
수아는 그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
“으휴. 하여간.”
***
호놀룰루 국제공항.
픽업 온 차를 타고 두 사람은 곧바로 리조트로 향했다.
“와 완전 좋다. 찾아오는 서비스네?”
수아가 웃으며 말하자, 지혁이 대답했다.
“값어치를 하네. 신혼여행 패키지니까.”
수아는 지혁이 첫 월급 받은 날 보여준 영수증이 떠올랐고. 지금 좋기는 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쓰라린 기분이 들었다.
‘3박5일에 320만 원······.’
수아는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이미 왔잖아. 더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재밌게 즐기는 게 본전 뽑는 거지.’
지혁은 그런 수아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맞아. 수아야. 지금은 노는 게 남는 거야. 이미 왔잖아.”
어느새 리조트에 도착.
번쩍-
“꺅-”
아직 대낮이었지만, 객실에 들어오자마자 지혁은 수아를 안고 침실로 돌진했다.
두 사람은 하와이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일어나면, 창 밖으로 아침 햇살과 함께 와이키키 해변을 맞았고.
그리고 레스토랑으로 내려가, 리조트에서 주는 뷔페 조식을 먹었다.
조식 후에는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낮엔 제트스키, 카약, 요트 트립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겼다.
야자수에 그늘이 지면, 썬배드 누워 책을 읽었다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칵테일 한 잔과 함께 석양을 감상했다.
해가 지면,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후.
일찌감치 침실로 들어가, 두 사람만의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꿈같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어느덧 마지막 오후.
따뜻한 햇볕.
해변을 드리운 야자수.
서핑하는 사람들과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들.
지혁과 수아는 썬배드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런 풍경을 눈에 담으려는 듯 멍하니 보고 있었다.
“지혁아.”
“응?”
“나 사실 하와이 못 오는 줄 알았어.”
“······.”
“너 요즘 너무 바빴잖아.”
지혁은 천천히 대답했다.
“왜 못 와. 이러려고 일하는 건데. 놀건 놀아야지.”
“근데 여름 다 지나서 오니?”
“하와이는 여전히 따뜻한데 뭐.”
9월이 되어 온 여름휴가였다.
“나 휴가 내는데 눈치 엄청 보였거든~”
“눈치 보지 마~ 내 연차 쓰겠다는데. 뭘 눈치를 봐.”
수아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다들 너 같지 않아. 쉽게 말하지 마.”
“······.”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간다.
하와이에 있는 동안 생각 안 하려 했지만, 막상 내일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자꾸 일 생각이 떠올랐다.
“회사 얘기 좀 해봐.”
“응?”
“스트레스받지 않는다면 말이야. 지금 너의 최고 관심사잖아. 맨날 집에 늦게 들어오고, 집에 와도 계속 뭔가 궁리하고······ 무슨 일을 하기에 그러나 궁금했었어. 집에선 일 얘기를 전혀 하질 않으니까.”
“재미없을 텐데?”
“괜찮아.”
“뭐, 그렇다면.”
지혁은 수아에게 심 팀장을 내보내고 팀장이 된 일. 그리고 최근 ‘홍썬라인’에 관한 일들을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상품본부장을 내려보내기 위한 계략도.
수아는 가볍게 생각하고 물어본 거였는데, 얘기를 들을수록 점점 빠져들었다.
‘뭐야? 영화 찍어? 뭔 회사생활이 이렇게 스펙터클 해?’
듣는 내내, 마치 은둔의 무술가가 거대 세력에 들어와서 도장 깨기 하는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수아는 다 듣고 난뒤.
“와······ 나도 회사생활을 하고 있지만······ 너 진짜 대단하다.”
“하하. 그래?”
“특진도 하고 최연소 팀장이 될만한 이유가 있었네. 근데, 그런식으로 가다간 한번 삐끗하면 잘리겠는데?”
“잘리면 잘리는 거지. 그리고 안 잘려~ 그럴 기미 보이면 내가 먼저 쳐낼 거니까.”
“······.”
수아는 새삼 자기 남편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 말을 곱씹으며 멍하니 해변을 바라보다가.
“아, 나 궁금한 거 있어.”
“뭔데?”
“그 ‘홍썬라인’이라는 거 말이야.”
“응.”
“만약 성공 못 하면 어쩌려고? 성공도 아주 큰 성공을 거둬야만 하는 거 아니야? 난 그렇게 이해했는데.”
지혁은 웃으며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마누라 똑똑하네~”
수아는 지혁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얘기해 봐. 궁금해.”
수아는 지혁의 회사 얘기가 너무 재밌었다.
“성공 못 할 리가 없어. 홍썬라인은 반드시 잘 될거야.”
“어떻게? 특출난 방법이 있는 거야?”
“아니. 방해꾼의 관심을 완전히 돌려놨으니. 이제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수아는 어이없어 하며 지혁을 바라봤다.
“뭐야. 그럼 계획도 없이 이런 큰일을 벌였다고?”
지혁은 피식 웃고 말했다.
“수아야 내가 성공 비법 하나 알려줄까?”
“뭔데? 얘기해 봐.”
지혁은 수아 귀 가까이 다가와서 작게 말했다.
“의지야. 의지.”
“······.”
“의지만 있으면, 방법은 어떻게든 나와. 난 이 일을 성공시킬 의지가 있으니까, 방법은 어떻게든 찾게 될 거야.”
‘그 세계’에서 경험했다. 의지가 강한 자는 한겨울에 찬 바람을 막을 쉘터가 없어도, 먹을 게 부족해도 살 방법을 찾아낸다.
사람들이 다 죽어가는 그런 절망적인 세계에서도 살아남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걸 비법이라고······.”
너무 뻔한 얘기에, 수아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아는 건 달라.”
“······.”
“그게 내가 일반적인 회사원들과 조금 다른 점이지.”
그래도 수아는 심드렁했다.
“혹시 회사에서도 그런 얘기 하니?”
“아니. 내가 팀장이라도 팀에서 두 번째로 어려. 이런 소리 했다가는 꼰대 소리 듣지. 아마 귀담아 듣지도 않을 거고.”
“하긴······ 방금 말 좀 그렇긴 했어. ‘노오력’이 중요하다는 말과 뭐가 달라.”
“하하.”
이 말에 지혁은 크게 웃었다.
***
호놀룰루 국제공항.
수아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아······ 집에 가야 해.”
처음 패키지 여행권을 보여줬을 때, 탐탁지 않아 하던 태도에서 완전히 바뀌었다.
지혁은 이런 수아의 모습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 또 오자.”
“그래, 다음엔 셋이 오면 되겠네.”
“······.”
수아가 간혹 이런 식으로 속내를 내비치는데. 이럴 때마다 지혁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거나 애써 화제를 돌린다.
“조만간 국내 여행도 한번 가자. 내가 알아볼게.”
“좋아~”
출국심사대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안녕하세요~”
뒤에 선 중년 여성이 말을 걸었다.
“한국 사람 맞죠?”
“안녕하세요.”
여행지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 간에도 쉽게 대화를 나누게 된다.
“신혼여행 오셨나보다~”
그녀는 지혁의 손에 든 파란색 항공권을 보고 있었다.
“아, 네.”
뭐라 설명하기도 뭐해서 그렇다고 했다.
“아휴~ 좋을 때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네요~ 옛 생각도 나고.”
수아는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혼자신가 봐요?”
“아~ 하와이에 가족이 살아서 종종 왔다 갔다 해요.”
“비행기 삯 많이 들겠네요.”
중년여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즘은 싼 것도 많은데~ 내가 방금 아저씨가 든 파란 항공권 보고 신혼여행이라고 짐작한 거거든요?”
“······.”
“요즘 저가 항공사가 얼마나 싼데. 날짜만 잘 맞추면 하와이도 30만 원 안에 올 수 있어요.”
쿵.
이 말에 지혁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 특정 날짜에만 프로모션 행사를 해서, 그 날짜 맞추는 게 번거롭기는 한데······ 머지않은 미래에는 항공권이 다 저렴해지지 않을까요? 원래 시작이 어려운 법이니까.”
“헉. 헉.”
갑자기 지혁은 과호흡이 와서, 얼굴이 벌게졌다.
“어머! 지혁아! 왜 그래!”
수아는 소리를 질렀고.
중년여성도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어머! 헬프 미! 헬프 미!”
보안 요원들이 달려와, 지혁을 바닥에 눕히고 팔다리를 주무르며 심호흡을 시켰다.
“지혁아! 왜 그래! 정신 좀 차려봐! 지혁아!”
수아는 놀라서 울면서 소리쳤고.
지혁은 정신없는 와중에 ‘그 세계’ 영감님이 했던 얘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비행기 삯이 너무 싸서, 해외여행 다니기 좋았다더라.’
그 세계가 오기 전에 있었던 현상이라며, 했던 말.
지혁은 눈 앞에 ‘그 세계’의 끔찍한 잔상들이 지나갔고.
몸이 계속 떨렸다.
“지혁아! 지혁아~!”
수아는 울부짖었고, 사람들은 더 모여들었다.
‘아니야. 수아 만난 지 이제 1년도 안 됐는데. 아니야. 아닐 거야.’
떨리는 몸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
서울에 오자마자 지혁은 항공권 가격에 대해 알아봤다.
저가 항공사 특정 날짜 프로모션은 몇 년 전부터 있던 거였다.
그 정도와 범위가 조금 더 심해지긴 했으나.
‘고속버스 가격으로 동남아 갈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니까. 더군다나 일부 저가 항공사만 그런거고.’
‘그 세계’ 영감님이 말했던 항공권 가격 수준과는 차이가 있었다.
면밀히 검토해봤을 때, 결정적인 징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미래는 모르는 일.
앞으로 항공권 가격을 예의주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
휴가 복귀 후 첫 출근.
아침 8시 55분.
지혁은 사무실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손정진이 밝은 목소리로 가장 먼저 인사했고.
다른 팀원들 또한 휴가 잘 갔다 왔냐며, 인사하는 가운데.
윤 차장은 오랜만에 지혁을 보자, 일 시킬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하려 했다.
“아이고, 배야. 아침부터 장 활동이 활발하네.”
사무실을 나가려는 윤 차장을 지혁이 붙잡았다.
“윤 차장님!”
“으응? 잘 갔다 왔어?”
“홍썬라인······ 샘플 준비 다 됐죠?”
이제 성공을 만들시간.
휴가 복귀 시까지 샘플 준비를 요청했었고, 윤 차장은 일 하나는 확실히 하는 사람이었다.
“책상 옆에 봐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