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58화 (58/301)

58. 성공을 위해 (1)

지혁은 윤 차장이 가리킨 책상 옆을 보았다.

“오······.”

‘홍썬라인’은 40 스타일 25만 장 을 기획하고 있다.

헹어 5개가 놓여있었는데.

대략 봐도 100 스타일은 넘어 보였다.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윤 차장이 샘플 준비를 많이 한 것이다.

물론 지혁은 이 정도까지 꼼꼼하게 지시하지 않았었다.

윤 차장이 알아서 한 것이다.

“정진아, 봤냐?”

“네?”

지혁은 손정진을 불러서 헹어를 보여줬다.

“일은 이렇게 하는 거야.”

“뭘 말씀이신지······.”

손정진은 지혁이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킨 것만 하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일을 하잖아. 최초 샘플단계에서 스타일이 채택될 가능성이 100%겠냐?”

“아······.”

손정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팀원들을 모두 불렀다.

“모두 이쪽으로 모이세요.”

문 대리, 정 과장도 헹어로 왔다.

“홍썬라인 샘플 나온 건데, 다들 어떤지 봐보세요. 반응 괜찮을 것 같아요?”

찬찬히 살펴보던 문 대리가 먼저 말했다.

"좋은데요? 근데, 전 아직 상품을 보는 눈은 없어서······.”

회사생활을 오래 일했기에 부서 이동을 해도 업무 프로세스는 금방 익힐 수 있었지만, 상품 보는 눈을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정 과장을 보았다.

“정 과장님 보시기엔 어때요?”

“괜찮은데? 소재도 좋고, 디자인도 귀엽고.”

‘강아지 소녀, 홍썬’ 답게 대부분 강아지 관련 그래픽이었다.

“근데, 내가 뭐라고 감히 흥행을 점치겠냐. 그냥 기본은 했다는 정도만 말할 수 있겠는데.”

상품기획자로서 오랜 짬이 있는 만큼,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흥행 여부는 소수가 점칠 수 없다는 것.

딱 보고 흥행할지 여부를 알 수 있다면, 사업을 해야지 회사생활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네요. 그럼 바로 고객조사를 해봐야 하나······ 근데 이 많은 스타일 수를······.”

지난번 팍스버거 콜라보 때처럼 고객조사를 하기엔 지금 모수가 너무 많았다.

그때, 화장실에서 돌아온 윤 차장이 말했다.

“1차 셀렉은 내부적으로 하는 거야. 보통 이럴 때는 제품 쫙 깔아놓고, 디자인실과 다른 상품기획팀 사람들 불러서 품평회를 하는데······.”

윤 차장이 말을 하다 만 이유를 지혁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그런 품평회를 할 수가 없으니까.’

상품본부 내부적으로는 비밀리에 일을 진행 중이라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도 사무실 잠궈놓고, 창문은 검은색 천으로 가려놓은 상태였다.

지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잠시, 통화 좀.”

지혁은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고.

“네, 접니다. 품평 봐줄 사람이 필요한데요.”

팀원들은 그가 누구에게 전화하는지 궁금했다.

“영업부 힘을 좀 빌렸습니다. 비밀 엄수할 수 있도록 해주시고요.”

윤 차장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생각했다.

‘영업부? 그들이 협조해준다고? 근데, 비밀유지가 될까?’

하지만 지금 비밀엄수에 누구보다도 예민한 지혁이 이렇게 얘기할 정도면.

‘도대체 누구와 통화를 하길래······.’

지혁은 곧 전화를 끊고, 손정진에게 말했다.

“정진아, 헹어 검은색 천으로 가려. 10분 뒤에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이동합니까?”

“9층 다목적 회의실로.”

***

9층 다목적 회의실.

정 과장이 가장 앞서서 들어갔는데.

“헉······ 뭐, 뭐야.”

2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다들 체격이 건장한 게, 운동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낯 익은 사람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 제대로 온 거 맞나?”

정 과장은 회의실 명판을 다시 확인했는데. 9층 다목적 회의실이 맞았다.

속알머리가 듬성듬성한 건장한 체격의 중년남성이 빠르게 정 과장을 지나쳤다.

“어이구, 오셨습니까.”

스타덕 영업팀장 김종식.

지혁에게 인사하러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지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여있던 영업 팀원들은 일제히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우렁찬 소리에 상품기획 팀원들은 깜짝 놀랐고.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네, 모두 안녕하세요.”

영업팀장이 지혁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분께 지시는 전달 받았습니다. 비밀유지는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럼 지금부터 제가 통제해도 될까요?”

“네, 편하신대로 하십시오.”

윤 차장은 지혁이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궁금하여, 계속 주의 깊게 들었으나.

영업팀장과 지혁은 대화 중에도 ‘그분’이라고만 할 뿐 정확한 지칭을 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이상하단 말이야. 오지혁이 연줄 있는 거 아니야? 도대체 누구랑 통화했길래, 이 드센 영업부가 순한 양처럼······.’

윤 차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지혁의 출신에 대해 의심을 하는 순간이었다.

“모두 집중하세요!”

지혁은 마이크 없이 큰 소리로 말했고.

시끌벅적한 영업부를 한번에 집중시켰다.

-어머······ 박력 봐.

-오 팀장님은 볼수록 진짜······.

-왜 유부남인거야.

활발한 영업부 여직원들은 입이 헤벌쭉 헤져서 수군거렸다.

“시간 오래 안 뺐을게요. 라운드 티, 점퍼, 롱팬츠, 숏팬츠 등 제품군별로 헹어를 나눠놨어요. 지금 손정진 씨가 스티커를 나눠드릴 텐데, 제품군별로 마음에 드는 스타일에 도팅 해주시면 됩니다. 정진, 스티커 나눠드려.”

지혁은 사람들을 둘러본 후, 말했다.

“이해 안 되는 분 없죠?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제한 시간은 5분입니다. 시~작.”

-제한 시간?

-제한 시간이 왜 있어?!

-어이 씨, 몰라. 서둘러!

설렁설렁 서 있던 직원들은 '제한 시간'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몸을 빨리 움직였고.

순식간에 도팅이 끝났다.

‘이정도 인원이 오래 모여 있으면 의심을 살 수 있어. 그리고 직관적으로 끌리는 게 매력이잖아.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돼.’

이건, 지혁이 계산해서 한 행동이었다.

“정진아, 그리고 문 대리님. 지금 빨리 카운팅 하세요. 50 스타일까지만 추립니다.”

100여 개의 스타일 중 도팅을 많이 받은 스타일 50개를 추렸다.

최종 진행하게 될 스타일은 40개. 즉, 10 스타일을 더 선정한 것이다.

“영업팀장님.”

“네, 오 팀장님.”

“전국 직영점 중에서 매출이 가장 좋은 상위 5곳이 어딥니까?”

“강남점, 홍대점, 대구 수성로점, 부산 해운대점, 광주 충장로점입니다.”

“그곳 매니저와 지금 영상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가능하긴 합니다만······.”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지금, 해당 다섯 매장 매니저에게 영상 통화로 제품 보여주시고요. 도팅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분들이 고객 니즈를 잘 알지 않습니까?”

“그렇죠. 아무래도 항상 고객을 응대하다 보니.”

팍스버거 콜라보 시, 강남점에서 현장 반응을 보면서 매니저의 행동을 관찰했었다.

“영상통화니까, 제한 시간은 통화 연결된 시점부터 10분으로 할게요. 지금 바로 시작해주세요.”

잠시 후, 영업부 직원들의 영상통화가 끝났고. 그와 동시에 도팅도 끝났다.

지혁은 50개 스타일 중 도팅을 제일 적게 받은 워스트 20개를 빼서 걸었다.

“해당 상품에 대해 아쉬운 점 한마디씩만 해주세요. 딱 한 마디입니다. 길게 하지 마시고요. 정진아, 속기해.”

“알겠습니다.”

영업부 직원들은 한마디씩 했다.

-그래픽이 너무 커요.

-강아지 눈이 너무 슬퍼 보입니다.

-노란색 색깔이 너무 과합니다. 조금 더 어두워도 될 것 같아요.

-소재가 너무 두꺼워요. 봄 상품이라 해서 두꺼운 거 찾지 않습니다. 점퍼를 입으니까요.

영업부 직원들은 워스트 제품들에 대해 돌아가면서 얘기했다.

할 말 없는 사람도 쥐어짜서 한마디는 해야 했다.

그렇게 코멘트까지 하고 나니.

모였던 시각으로부터, 정확히 30분 지났다.

“정진, 문 대리님. 상품들 다시 헹어링 해주시고, 천으로 덮어주세요.”

“네.”

지혁은 영업부 직원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 마칩니다.”

짝짝짝.

끝인사와 동시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꽤 많은 일을 한 거 같은데, 겨우 30분 지났다.

군더더기 없는 진행. 마치 한편의 뮤지컬을 본 것 같았다.

-예전에 품평회 참여해 달라고 해서 간 적 있는데, 최소 2시간이었어.

-오 팀장님은 진짜······.

-어쩜 이리 일 처리가 깔끔해.

-괜히 특진자가 아니라니까.

“쉿-”

지혁은 조용히 시킨 후 말했다.

“저희부터 먼저 나갈게요. 영업 팀장님 감사합니다.”

영업 팀장은 탄복에 겨운 눈길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언제든 도움 필요하면 연락해주세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한 번쯤 더 요청할 수 있어요. 보답은 꼭 할게요. 매출로.”

영업 팀장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계시네.’

***

회의실.

지혁은 워스트로 꼽힌 20 스타일을 펼쳐놓고, 윤 차장을 불렀다.

“차장님.”

“어 얘기해.”

“재 샘플 내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샘플 다시 만들라고?”

윤 차장은 속기록에 있는 영업부 코멘트를 보며 말했다.

“글쎄. 생산팀에 확인해봐야겠지만,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

“그리고 이 정도 코멘트면, 그냥 반영해서 메인 진행 해도 될 거 같은데.”

“그러다 옷이 잘 안 나오면요.”

이 말에 윤 차장은 딱히 할 말은 없었으나.

‘제기랄, 무슨 명품 만들어? 적당히 가는 거지.’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혁은 윤 차장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홍썬라인은 꼭 거대한 성공을 거둬야 한다고 말씀드렸었죠.”

“······.”

“29,000원짜리 티셔츠라도 109,000원의 정성으로 만듭니다.”

“아주 오너처럼 말하네.”

윤 차장은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는데.

'엇!'

지혁은 윤 차장을 놀래서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온 ‘오너’라는 단어.

최근 신경을 안 쓰고 있었기에, 더 생소하고 놀랍게 들렸다.

“윤 차장님도 알아요?”

“뭘?”

“······.”

지혁은 자신이 오너 일가로 오해받는 것. 오 회장과 본관이 같은 성씨라는 걸 윤 차장이 알고 있는지 물어본 거였다.

윤 차장은 금시초문의 얼굴로 되물었다.

“뭘 알아?”

“아니에요.”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생각한 게 아닌 것 같군. 괜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나보다.’

지혁은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재 샘플 이틀 안에 완성합니다. 샘플실은 몇 개를 빌리든, 돈을 두 배로 줘도 상관없으니. 기한 맞추는 거로 해주세요.”

“하아······ 쉽지 않을 텐데.”

“황 대리님이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하면, 저한테 오라고 하세요.”

“싫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이틀 안에 맞춰볼게.”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 차장은 먼저 앓는 소리를 하지만, 항상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온다.

이틀 뒤.

20 스타일의 재 샘플은 늦지 않게 완성되었고.

지혁은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도록, 여러 방식으로 테스트를 진행하고 검증한다.’

절대로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지혁은 최종 셀렉된 스타일들을 살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