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60화 (60/301)

60. 사고 (1)

잿빛 얼굴에 다 죽어가는 표정.

황 대리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아······ 진짜 울고 싶네요.”

지혁은 ‘홍썬라인’ 막바지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대수롭지 않은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얘기를 해봐요. 뭔데요?”

“메일 못 봤어요?”

“메일?”

지혁은 곧바로 이메일을 열어 보았다.

‘제목 : 다운점퍼 입고 사고에 대한 피드백 요망’

수신 : 황성준 대리

발신 : 윤현성 차장

참조 : 오지혁 팀장, 상품기획 1팀, 상품전략실장, 백 과장, 스타덕 영업팀, 상품전략실, 디자인실, 상품본부, 상품본부장······.

메일 참조자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지혁은 인상을 썼다.

‘사고가 크게 터졌나 보네. 이렇게까지 방어적으로 나온 거 보면.’

살짝 고개를 올려서 윤 차장을 보았는데.

그는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일하고 있었다.

“흠······.”

지혁은 메일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1) 사고 요약 : 다운점퍼 입고사고 건입니다. 입고요구일 10월5일이 한 달 이상 지났으나, 11월 6일 현재 다운점퍼 입고가 되지 않아, 매출 손실이 우려됩니다.

2) 내용 : 황성준 대리님께서는 현재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맞지 않는 정보를 주셨습니다. 피드백 주신 날짜에 따라 제품 출고 및 영업 계획까지 세웠으나 번번이 미뤄졌으며, 현재 판매 실기를 놓쳐 매출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3) 요청사항 : 입고지연 클레임 1억 원 요청하오며, 생산된 제품의 50% 물량만 받겠습니다.

4) 자료 첨부 : 아래는 황성준 대리님께서 제게 메일로 입고요구일 피드백 주신 날짜와 약속하셨던 내용입니다. 사실과 다르다면, 회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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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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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는 날짜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있었다.

윤 차장의 완벽한 공격. 황 대리가 빠져나갈 틈은 없어 보였다.

상품기획과 생산 담당 간에 흔히 있는 일.

하지만, 품목이 다운점퍼면 크다. 제품 하나당 20만 원이 넘게 나가며, 1년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제품군이니까.

지혁은 잠시 생각하고는 곧바로 윤 차장을 불렀다.

“윤 차장님. 잠깐 오시죠.”

“왜.”

여느 때와 달리, 윤 차장의 반응이 싸늘했다.

“일단 와보세요.”

저벅. 저벅.

평소의 비굴한 표정은 싹 사라진 윤 차장이 다가왔다.

***

“참조 뭡니까?”

“뭐가?”

“왜 별별 사람 다 참조 걸어서 메일을 보냈어요?”

“그럼, 내가 죽게 생겼는데. 물불 가리게 생겼어? 황 대리는 오 팀장과 친하고.”

“······.”

“메일 내용 봤지? 지금 상황이 아주 심각해. 나도 홍썬인지 뭔지 그거 챙기느라고, 제대로 신경 못 썼다고.”

윤 차장은 힘주어 말했다.

“물론, 다운점퍼를 11월이 지나도록 입고 못 시킬 줄은 상상도 못 하긴 했지만.”

윤 차장은 황 대리를 보지 않고 말했고.

황 대리는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황 대리님과 친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죠.”

“······.”

“잘못 짚으셨네. 그리고 일을 키우셨고.”

“뭘 잘못 짚어! 지금도 참조 걸은 얘기만 하고 있잖아. 문제의 본질은 보지도 않고!”

윤 차장은 언성을 높였고.

지혁은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말했다.

“목소리 낮추세요.”

지혁은 윤 차장을 노려보며 말했는데, 평소와 달리 윤 차장은 눈을 깔지 않았다.

지혁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황 대리를 보았다.

“제품 언제 들어와요?”

“그게······ 생산공장이 오바 캐파가 되어서 생산 투입이 늦은 데다가, 태풍으로 입항이 지연되어서······.”

지혁은 짜증을 냈다.

“지난 얘기는 듣고 싶지 않고요. 제가 물은 질문에만 답하세요.”

황 대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일주일 걸려요.”

윤 차장이 소리를 질렀다.

“그걸 어떻게 믿어? 당신 지금 나한테 세 번이나 약속 어겼어!”

“저도 받은 스케줄이 틀어진 거라······ 배가 지연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도 담당이······.”

윤 차장이 한 마디 더하려는 걸, 지혁이 막았다.

“그만.”

“······.”

“윤 차장님. 선 넘지 마세요. 마지막 경고입니다. 나 지금 황 대리님한테 물었어요.”

지혁의 몸에서 살기가 느껴졌고.

아무리 흥분한 윤 차장이라도 본능적으로 입이 다물어졌다.

지혁은 황 대리를 바라봤다.

“황 대리님, 상황 급하다고 희망적으로 말하면 안 돼요. 나중에 말 바꾸는 게 더 안 좋아요.”

“······.”

“다시 한번 물을게요. 있는 그대로 얘기해주세요. 정말 일주일이면 다운점퍼 들어오나요?”

황 대리는 기운 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전 한 번도 희망적으로 답한 적 없어요. 룸을 갖고 말한 적도 없고요. 있는 그대로 얘기합니다. 배 떠서 오고 있고요. 정확히 4일 뒤에 부산항에 도착해요. 통관하는데 3일 정도 잡으면 일주일 뒤 입고입니다.”

지혁은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말했다.

“윤 차장님은 9일 뒤 입고 예정 기준으로 출고 계획 잡으시고, 영업부에도 그렇게 알려주세요.”

윤 차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황 대리님.”

“네.”

“그쪽 공장이 잘못한 부분이 있죠?”

“있죠······.”

“입고지연 클레임 요청해 주세요.”

황 대리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자연재해 영향도 있어서, 그쪽이 클레임을 안 받으려 할 텐데, 그리고 공장 사정이······.”

“이 와중에 남 걱정을 합니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화를 억누르는 게 느껴졌고.

황 대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클레임 치세요. 못 하겠으면 내가 대신 칠까요?”

“······.”

지혁이 클레임 쳤다가는 공장이 사라질 것 같았다.

아무리 이번에 실수가 있었지만, 오랜 거래처인 곳이기에 지켜주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규정대로 클레임 요청하겠습니다.”

지혁은 돌아앉으며 말했다.

“얘기는 다 된 거 같은데. 각자 자리로 돌아가시고. 황 대리님은 생산팀장님 올라오라고 해주세요.”

“네? 팀장님은 왜······.”

지혁은 황 대리를 싸늘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럼, 상품본부장까지 다 알게 된 마당에. 황 대리님이 생산 대표로 다 감당하시게요?”

“······.”

“시간 없습니다. 서둘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생산팀장은 상품기획 1팀에 오자마자, 지혁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고개 드세요. 사과받으려고 부른 거 아니에요.”

상품기획팀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고.

생산팀장은 석고대죄하는 분위기였다.

지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품본부장이 아마 관련자들 다 부를 거예요.”

“네? 사, 상품본부장님께서요?”

생산팀장은 사색이 되었다.

제품 입고 사고는 흔히 있는 일이다.

물론 다운점퍼는 발주액이 커서, 입고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잘 없었으나.

어쨌든 이보다 더 큰 문제라 해도, 상품본부장이 현업에 나서지는 않았다.

“저희가 잘못하긴 했지만······ 이게 그렇게까지 큰일입니까?”

“좀 사정이 있습니다.”

“무슨 사정이요?”

지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고요. 어쨌든 상품본부장이 강하게 나올 거에요.”

“큰일 났네. 그분 장난 아니시라던데.”

상품본부장은 지랄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방법 있나요. 두들겨 맞을 거 각오하시라고 부른 겁니다. 모르고 맞는 것보단, 알고 맞는 게 덜 아프잖아요.”

“아······.”

“아마, 주 공격 방향은 제가 될 것 같긴 하지만.”

“네?!”

‘생산이 잘못했는데, 왜 상품기획 팀장을 공격해?’

생산팀장은 이때만 해도 지혁의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까짓 일로 상품본부장님이 부르겠어. 상품전략실장도 아니고.’

***

상품본부장 실.

띠링!

‘발신 : 윤현성 차장’

커피 한 잔에 여유로운 오후를 즐기던 중, 알람 소리가 들렸다.

본부장급 되면 보고용 자동 메일이 아니면, 웬만해선 메일이 잘 오지 않는다.

그것도 현업 담당자로부터 메일이 오니, 이상해서 열어봤다.

‘제목 : 다운점퍼 입고 사고에 대한 피드백 요망’

“갑자기, 뭐야 이게?”

상품본부장은 찬찬히 메일을 읽었고.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회사에 안 좋은 일.

그리고 분명 ‘사고’인데, 그에게는 ‘행운’처럼 느껴졌다.

“윤현성이······ 안 돕는다고 하더니, 이런 식으로 돕는 건가?”

생뚱맞게 본인을 참조로 메일 보낸 게 의아했지만, 어쨌든 반가웠다.

“가만있어 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명백했다.

이건 빠져나갈 틈이 없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고였다.

이 일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궁리했다.

‘일단······ 일을 좀 키워야겠지.’

이미 한 달이나 지연되었으니, 곧 해결될 일. 지금 타이밍에서는 나서기만 해도 해결사처럼 보일 수 있고.

현업을 챙기는 본부장의 열정을 보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거슬렸던 사람들을 순하게 만들 절호의 찬스였다.

상품본부장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추 차장!”

“네, 본부장님.”

“다운점퍼 사고 메일 봤나?”

“네, 봤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곧 해결될 일로 보이던데요. 클레임은 쳐야 할 것 같고요. 윤 차장이 원래 좀 방어적인 사람이라······.”

“아니~”

상품본부장은 도리질하고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아니잖아.”

“아······.”

추 차장은 상품본부장을 항상 옆에서는 모시기에, 대번에 알아차렸다.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좀 세게 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 명백한 일이니까요.”

“그렇지? 반격할 거리가 없지?”

“네, 폭언만 조심하신다면 뭐······.”

“좋아. 다 불러.”

“알겠습니다.”

추 차장이 나가려는데, 상품본부장은 다시 말했다.

“아, 아니다. 내가 메일 쓸게. 그게 더 임팩트 있겠다.”

“알겠습니다.”

***

‘Re : 다운점퍼 입고 사고에 대한 피드백 요망’

수신 : 상품기획 1팀, 상품전략실장, 생산팀장, 황성준 대리, 디자인실장, 스타덕 영업팀장

발신 : 상품본부장

내용 : 수신자 전원 14시까지 상품본부실로 오세요.

황 대리는 상품본부장의 메일을 받고 무너져 내렸다.

‘씨발······ㅈ됐다.’

지혁도 메일을 확인했는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 많이도 불렀다.”

그러더니 황 대리를 불렀다.

“황 대리님~”

“네.”

“이참에 맷집 좀 세지겠는데요?”

황 대리는 농담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반차 내고 사무실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상품본부장님이 부를 줄이야······. 상품본부장님이 부를 줄이야······.’

임원 앞에서는 아무 말 않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든데.

이 일에 대해 해명을 하고, 대안까지 보고할 생각을 하니······.

황 대리는 오늘이 일생 최악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지혁이 말했다.

“14시까지면 이제 일어나야겠네. 상품기획 1팀. 모두 가시죠.”

상품기획 1팀 팀원들은 무거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사자가 아니어도, 지금 얼마나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아마 선도물산 웬만한 직원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윤 차장이 그만큼 참조를 많이 걸었고.

메일은 돌고 도는 거니까.

특히, 누군가 저격당하는 메일은.

턱.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황 대리의 어깨 위에, 지혁이 손을 올렸다.

“오 팀장님······.”

황 대리는 앉은 자세에서 올려다보았고.

이 심각한 분위기에, 지혁은 재밌어하는 얼굴이었다.

“황 대리님, 겁먹지 말아요.”

“······.”

“안 죽어. 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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