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62화 (62/301)

62. 때가 되었다

‘자폭······.’

상품본부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지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완벽히 이해했기 때문에.

‘계략인가?’

무조건 이긴 게임이라 생각했다. 이 기회에 길을 들인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하지만, 시작부터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지혁의 말과 행동은 상식을 벗어났다.

또라이라는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뒤는 없는 듯한 태도와 말투. 마지막엔 ‘자폭’이라는 단어까지 꺼내 들었다.

놀라지도 않고 멀뚱거리는 황 대리의 표정을 보니 더 헷갈렸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기도 하고······.’

어찌 됐든, 이 상황을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맞설 자신도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판을 엎는 게 상책이었다.

‘빨리 마무리 짓자. 젠장, 판을 잘못 키웠어.’

상품본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혁의 몇 마디 말에 결국 황 대리에 대한 갈굼을 멈춘 것이다.

“중요한 얘기는 다 한 거 같은데. 이만 마치죠.”

갑작스러운 회의 종료. 정적만 흐르는 가운데.

“아, 생산팀장.”

“네!”

“징계위원회 열고, 생산담당자가 해당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도록 하세요.”

하지만, 상품본부장은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조금의 스크래치라도 내고 싶었다.

“······ 알겠습니다.”

상품본부장이 나간 뒤.

“후우-”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쉬는 시간 빼면, 회의는 30분도 안 했는데, 다들 진이 빠졌다.

디자인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당사자가 아니라 그런가. 옆에서 보는 재미가 있네.”

얼마 전 본인이 지혁에게 당했을 때와는 입장이 달랐다.

지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상품본부장 또한 그녀의 직속 상사이기에, 일하다 보면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는 게 통쾌했다.

또한, 그 대단한 상품본부장에게 밀리지 않는 지혁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다.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다음엔 좋은 일로 만났으면 좋겠네요.”

디자인실장이 회의실을 나간 뒤, 유 실장 또한 별다른 말 없이 지혁의 어깨를 툭 치고는 가버렸다.

순서를 기다리던 영업팀장이 다가왔다.

“오 팀장님! 와아~ 저 진짜 팬 될 거 같아요. 왜 이렇게 멋져요?”

“······.”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커피 한잔하시죠?”

지혁은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우선 좀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다음에 하시죠.”

영업팀장은 생산팀과 상품기획 1팀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 주십시오.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이제 회의실에 생산팀과 상품기획 1팀만 남았다.

회의 끝난 지 꽤 됐지만, 다들 아직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혁이 신호를 줄 때까지는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들 안 가고 뭐해요?”

하지만 지혁은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생산팀장부터 목례 후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상품기획 팀원들도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윤 차장님.”

“응······ 어? 어?!”

그는 불린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

“담배 피우러 가실 거죠?”

“그, 그렇지.”

“10분 뒤에 옥상에서 봐요. 저 금방 올라갈 테니까.”

“알았어······.”

윤 차장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회의실에 황 대리와 지혁만 남았다.

“괜찮아요?”

그로기 상태.

회의는 끝났지만, 황 대리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오 팀장님······ 고마워요.”

“······.”

“아까 진짜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는데. 오 팀장님이 안 나서줬으면······.”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회사생활 5년 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멘탈이 왜 이렇게 약해요?”

“5년 회사생활 동안 임원을 만나본 건 손에 꼽아요. 세 번도 안 될 걸요. 더군다나 임원과 미팅하는 건 처음이고, 게다가 사고 때문에······.”

툭. 툭.

지혁은 황 대리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말했다.

“내가 미팅 시작하기 전에 얘기했죠. 안 죽는다고.”

“······.”

“거봐요 안 죽었잖아요.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

“휴우-”

황 대리는 대답 대신 한숨을 쉬었다.

“황 대리님이 실수한 게 뭔지 알아요?”

“실수요?”

황 대리는 아리송했다.

‘지금 와서, 업무 실수 얘기를 할 리는 없고······.’

“나한테 얘기 안 한 거.”

“······.”

“문제의 조짐이 보이면, 저한테 먼저 얘기를 해줬어야죠. 그러면 일이 훨씬 쉽게 풀렸을 텐데.”

“바쁘신 거 같아서······.”

“앞으로는 문제 생길 거 같으면 얘기해주세요.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 대리님은 신경 쓰니까.”

따뜻한 말에 황 대리는 코끝이 찡해졌다.

“징계위원회 열리면, 아마 일정 기간 감봉 얘기가 나올지도 몰라요. 점퍼가 매출에 차지하는 영향이 크니까.”

황 대리의 얼굴이 다시 잿빛이 되었다.

“제가 경력자 오리엔테이션에서 황 대리님 처음 만났을 때 약속한 거 있죠?”

“······.”

“성공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은 지키니까. 이깟 일에 기죽지 마세요. 그냥 점일 뿐이에요.”

“······.”

“먼저 갑니다.”

덜컹.

지혁은 회의실 밖으로 나갔고.

황 대리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이번엔 정말 눈물이 찔끔 났다.

‘너무······ 고맙잖아.’

큰 감동을 받았고, 지혁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

옥상.

윤 차장은 담배를 두 개비 째 태우고 있었다.

덜컹.

문 여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윤 차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좋은 거라고 담배를 그렇게 피워요?”

지혁은 옥상에 자욱한 담배 연기를 보며 말했다.

“왜 보자고 했어.”

윤 차장은 평소와 달리 차분한 어조였다. 지혁이 한소리 할 것 같아서, 시작부터 방어 자세를 취한 것이다.

“뭐겠어요. 이 일에 관해서 얘기 좀 하려는 거죠. 단둘이.”

“명백한 일인데. 더 할 얘기가 있을까?”

지혁은 가만히 윤 차장을 바라보았고. 윤 차장도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일하는 방식은 좋아요. 동네방네 참조 다 걸은 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건 뭐 본인 스타일이니까.”

“······.”

“그게 취향이라면, 나도 앞으로 윤 차장님께는 똑같이 해드리려고요. 지시 메일 보낼 일 있으면, 상품본부장까지 다 참조 거는 거로.”

윤 차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원하면 영업본부장, 생산본부장까지 다 참조 걸어 드릴까요?”

통상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똑같이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잘 못한다.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어때요? 원하세요?”

“본질은 그게 아니잖아.”

“아침부터 자꾸 본질 타령하는데.”

지혁은 안광을 쏟아냈다.

“진짜 본질은 내가 팀장이고, 당신은 팀원이라는 거야. 알아들어?”

.

.

.

.

지혁의 강한 어투에 윤 차장은 얼어버렸다.

후-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지혁은 심호흡을 했다.

“선배라서 대우해주는데, 헷갈리지 마시라고요. 젠장, 어떤 팀원이 팀장 건너뛰고 윗선 다 알게 메일을 보내요?”

“너도 그렇게 했잖아.”

윤 차장은 반격했다.

분명 지혁 또한 팍스버거 콜라보 건 관련하여, 심 팀장 건너뛰고 유 실장에게 보고했었다.

하지만, 그건 좀 달랐다. 심 팀장이 팍스버거는 신경을 안 쓰려 했었고, 지혁에게 보고받는 걸 피했었으니까.

“왜? 아니야?”

이런 사연이 있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지혁 또한 팀장 건너뛰고 행동했던 건 사실이다.

지혁은 변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난 심 팀장이 아니에요. 그럼 윤 차장님도 나처럼 해보시던가. 자신 있어요?”

“······.”

“노선 명확히 해요. 지금부터 윤 차장님을 같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나요?”

이건 그 어떤 것보다도 무서운 협박이었다. 윤 차장은 지혁을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절대로 적으로 두면 안 될 사람.

이 말을 들으니 정신이 퍼뜩 들었고.

결국······ 눈을 깔았다.

그 모습을 보며 지혁은 흥분은 가라앉혔다.

잠시 시간을 둔 뒤, 천천히 말했다.

“그냥······ 이런 민감한 일 있을 때는 행동하기 전에, 저와 먼저 대화를 해주세요.”

“······.”

“편파 판정하는 사람 아니니까요.”

윤 차장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

지혁은 그의 등을 쓸며 말했다.

“윤 차장님 좋아지려 하는데. 왜 자꾸 도망가려 해요.”

“······.”

“내려가시죠.”

윤 차장은 계단으로 향했고.

지혁은 그를 따라 내려가며 생각했다.

‘좀 지켜봐야겠어······ 일단, 중요한 일은 잘 끝내고.’

***

황 대리가 사고 친 ‘다운점퍼’는 그의 말대로 정확히 일주일 뒤에 입고되었고.

판매 시기를 좀 놓치긴 했으나, 그런 말 안 나오게 하기 위해 상품기획 팀원들은 열심히 마케팅했다.

영업팀장 또한 해당 상품 판매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전국 매니저에게 지침을 주는 등 신경 써주었다.

그리고 지혁이 예고한 대로 황 대리는 2개월 감봉 처분을 받았다.

이 '다운점퍼' 사고는 여러 변화를 가져왔는데.

우선, 상품기획 1팀이 더 견고해졌다.

특히, 윤 차장이 더 열정적으로 일해주었고, 지혁의 지시에 잘 따르며, 보고도 충실히 했다.

또한 매운맛을 본 상품본부장은 상품기획 1팀을 견제하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홍썬라인’은 방해 없이 잘 진행되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이래서 있는 걸까?

‘다운점퍼’ 사고의 순간에는 힘들었지만, 잘 견뎌내고 나니 여러모로 좋은 영향을 가져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2월이 지나 1월이 되었고.

지혁도 1살 더 먹어서 이제 29세가 되었다.

연말이 되건 연초가 되건.

회사원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고.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하루하루 정신이 없었다.

상품기획 1팀이 치르는 전쟁터에서, 드디어 고지가 보이고 있었다.

1월의 어느 날.

윤 차장이 큰소리로 외쳤다.

“오 팀장님! 보고 드립니다!”

장난스럽게 ‘다나까’ 말투로 얘기했다.

“홍썬라인! 1차 입고 완료됐습니다! 하하!”

-우와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품기획 팀원들은 손을 들고 소리를 질렀다.

최초 기획단계부터 약 4개월의 대장정.

분명, 많은 변화를 가져올 ‘홍썬라인’이 드디어 입고됐다.

지혁도 후련한 기분에 미소를 지었다.

“윤 차장님. 수고하셨어요.”

“넵! 팀장님!”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장난 그만하고, 하던 대로 하세요. 하하. 매장 분배는 언제 되나요?”

“오늘 바로 할 거야~”

“영업팀과는 사전 조율 된 거죠? 보안도?”

“당연하지~ 거기가 더 조심하더라.”

후우-

지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준비는 완벽하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고객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며, 매출로 결과가 증명되어야 한다.

“잘 되겠죠?”

지혁의 말에 윤 차장은 그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에이~ 오 팀장답지 않게 왜 그런 말을 해?”

항상 자신만만한 지혁이었기에, 이런 말 자체가 윤 차장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지혁은 빙그레 웃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모든 업무 멈추고, 나갈 준비 하세요!”

“······.”

“강남점으로 최초 현장 반응 확인하러 갑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상품기획 1팀은 매장으로 이동했다.

‘홍썬라인’은 오후 2시경 매장에 입고됐으며, 오후 3시경 매장 진열이 끝났다.

상품기획 팀원들은 긴장한 눈빛으로 손님들 반응을 지켜봤다.

.

.

.

약 1시간 뒤.

“정진아.”

“네!”

손정진은 입이 헤벌쭉해져서, 흥분으로 잔뜩 고조된 얼굴로 지혁을 바라봤다.

“황 대리님 빨리 오시라고 연락드려야겠다.”

지혁의 입꼬리도 올라가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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