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68화 (68/301)

68. 오 씨를 만나다 (1)

지혁은 전화기를 들고,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드디어 만나는 건가.'

기다려 왔던 전화였기에 조금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 오늘 저녁.]

“오늘 할 일이 많은데······.”

속마음과 달리 튕기듯 말해보았다.

어떤 상황이든 주도권은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분을 뵙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네. 자네도 누군지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영업본부장은 정확한 호칭을 피했다.

통화 중이더라도 신분 노출을 극도로 조심히 했다.

[이번엔 다른 말 말고 그냥 따라줬으면 좋겠네.]

지혁이 다른 말 못 하게, 본부장은 못 박듯이 말했다.

이번에 함께 일을 하면서 지혁의 스타일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지혁은 의심도 많으며, 요구하는 것도 항상 많았다.

그와 대화할 때는 가벼운 주제라도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알겠습니다. 본부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고맙네.]

영업본부장은 말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고마워해야 할 일인가. 이건 내가 들어야 할 말 같은데.’

지혁이 물었다.

“유 실장님은요?”

[······.]

“유 실장님도 같이 가나요?”

영업본부장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니. 유 실장은 거기 갈 이유가 없지.]

“······.”

[약속했던 건 지킬 건데, 더 할 얘기가 있겠나?]

지혁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은근히 반전 있다니까.’

영업본부장은 겉보기에는 사람 좋고 정 많아 보이지만, 맺고 끊는 게 분명했다.

그가 생각하는 유 실장과의 관계는 여기까지였던 것이다.

[왜? 자네는 유 실장과 더 해야 할 일이 있나?]

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저야 당연히 있죠. 제 직속 상사인데.”

[하하. 이 사람. 농담을 하네?]

영업본부장은 웃다가, 그다음 지혁의 말에 웃음을 거두었다.

“영업본부장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 것 같고요. 저도 동의하는데.”

지혁은 계속 말했다.

“절대로 막 대하시면 안 됩니다. 어찌 됐든, 우리 계획에 위험을 무릅쓰고 협조한 사람이에요.”

영업본부장은 이 말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상품본부장은 선도 물산의 요직이며, 그 자리에 대해서 ‘그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직 확실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 대답을 안 하시네요. 전 이 일만큼은 결코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지혁은 절대로 의미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좌시하지 않겠다는 중의적인 표현이었고, 영업본부장 또한 이를 모르지 않았다.

[아, 알았으니깐.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자고. 그럼 저녁에 보세.]

영업본부장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

[인사발령]

1) 유남혁 이사

이동 전 : 상품전략실장

이동 후 : 상품본부 본부장(겸 상품전략실장)

오늘 정오에 인사발령 메일이 날아왔고.

유 실장은 이제 유 본부장이 되었다.

이사급이 본부장이 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이건 머지않아 유 본부장이 곧 상무가 될 거라는 신호였다.

임원급에서는 들러리였던 유 본부장.

순식간에 실력자로 급부상했다.

-대박······.

-유 실장, 아니지. 유 본부장님 진짜 대단하다.

-나중에 사장까지 가시는 거 아니야? 이렇게 젊은 본부장이라니.

-그분이 일을 잘하긴 하셔.

하지만, 송 상무가 경질된 후 곧바로 유 본부장의 인사발령이 난 것이다.

결과는 과정을 짐작하게 만들기에.

이런 유 본부장의 영전을 곱지 않게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왜 송 상무님이 나가고, 곧바로 유 이사님이 본부장이 되었을까.

-외부인사도 많을 텐데.

-이번 인사명령 자체가 너무 급해 보이지 않아?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유 이사님 욕심 많아. 내가 같이 일해봤잖아.

여러 잡음이 있었으나.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선도물산의 최강 빌런 중의 한 명인 송 상무가 아웃되었다는 것이다.

더 큰 사건은 작은 사건을 덮는 법이다.

과정이 석연치 않아 보여도.

직원 대부분이 환영하는 결과였기에, 유 본부장의 영전에 대한 의심스러운 여론은 빠르게 잦아들고 있었다.

‘똑똑.’

유 본부장은 사무실 이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덜컹.

지혁이 들어왔다.

“어~ 오 팀장 어서 오게.”

유 실장은 표정이 밝았다.

“식사는 했나?”

“네, 했어요.”

“그래, 커피 한 잔 할 텐가?”

“좋죠.”

두 사람은 서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주 보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하하.”

유 본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믹스 마시지?”

“네, 물은 반 컵만 넣어주세요.”

“······그래.”

“혹시 냉커피는 안 되나요? 시원한 거 마시고 싶은데.”

유 본부장은 오늘 인사발령을 받았다.

자존감으로 어깨에 힘이 바싹 들어가 있었기에, 지혁의 이런 태도가 영 달갑지 않았다.

더군다나 평소에 지혁은 냉커피를 마시지 않았었다.

‘이 자식이 왜 이러지.’

유 본부장은 불쾌했지만, 꾹 참고 웃으며 말했다.

“어쩌나~ 얼음이 없는데.”

“그럼, 뜨거운 거로 주세요.”

잠시 후, 본부장이 커피를 가져와 오 팀장의 자리에 놓아주었다.

“각설탕은 없나요?”

“······.”

유 실장은 불쾌함에 얼굴색이 울긋불긋했으나, 그래도 참았다.

“각설탕은 없는데······ 설탕 가져다줄까?”

지혁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네.”

후루룩-

지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변하면 안 돼요.”

“어?”

“자리 달라졌다고, 변하면 안 된다고요.”

이 말을 할 때 지혁은 유 본부장을 쏘아보았고.

꿀꺽.

유 본부장은 마른 침을 삼켰다.

지혁이 어떤 사람인지, 바로 옆에서 봤기에 너무 잘 알고 있다.

절대로 적으로 두어서는 안 되는 사람.

마음만 먹으면 이 남자는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 물론이지. 초심을 잃지 말아야지.”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난 다른 번거로운 일 안 하고, 일만 하고 싶어요.”

‘번거로운 일······.’

며칠 전 상품본부장을 보내버린 일을 말하는 거였으며.

새로운 상품본부장인 유 본부장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대놓고 하는 협박이었다.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유 본부장은 황당해서 지혁을 바라봤다.

“뭐야? 뭐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네. 메시지는 잘 전달됐잖아요.”

“······.”

“그럼 됐죠.”

유 본부장은 생각했다.

‘그냥 주의를 주러 온 거구나.’

덕분에 들떴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유 본부장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자네 차례 아닌가?”

“네?”

“상품전략실장 해야지.”

유 본부장은 지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내가 힘써줄 테니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거지. 안 그래?”

피식.

지혁은 웃으며 어깨에 올려진 유 본부장의 손을 떼어냈다.

“저는 약속은 지킨다고 말했었고.”

“······.”

“그 말을 지켰어요. 그렇죠?”

유 본부장은 지혁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저는 토사구팽이란 말 아주 싫어합니다.”

“······.”

“그리고······.”

지혁은 유 실장을 바라보았다.

“배신자도 싫어해요.”

.

.

.

.

흡!

순간, 유 실장은 날카로운 칼이 배 속에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 세 번도 쉽게 하더라고요.”

“······.”

“수고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전 약속은 분명히 지켰어요.”

유 본부장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충격에 말을 잃어버렸다.

“앞으로도 상품기획 팀장으로 있는 동안 제가 맡은 일은 충실히 할 거예요.”

“······.”

“이제 사적인 연락은 그만해주세요.”

유 본부장은 지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는 했으나······.

‘얘는 감정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어떻게 하루아침에.’

“승승장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지혁은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

서초구 내곡동.

‘사랑산성.’

영업본부장, 유 본부장과 비밀 회동을 했던 곳에 다시 왔다.

‘밤 8시 20분.’

지혁은 약속 시각에 늦지 않게 도착했으나, 좀 이상했다.

‘8시도 아니고, 왜 약속 시각을 8시 20분으로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 분’의 취향일 거라고 생각했다.

직원은 지혁을 VIP룸으로 안내해줬고, 안으로 들어가니.

“왔나?”

영업본부장이 먼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자네는 항상 5분 전 도착이군. 혹시 밖에서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건 아니지?”

“어떻게 아셨어요?”

영업본부장은 놀라서 눈이 커졌다.

“진짜? 왜 그런 짓을 하나?”

“농담이죠.”

“······.”

농담이라고 했지만, 너무 진담같이 말해서 영업본부장은 뭐가 진짜인지 헷갈렸다.

“근데 왜 20분이에요?”

“별 다른 이유 없네. 그냥 정각이 싫다고 하시더군.”

“특이하시네······.”

정확히 8시 20분.

노크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벌떡!

영업본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혁이 멀뚱히 바라보자.

“뭐하나? 어서 일어나지 않고.”

지혁은 엉겁결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문이 열리고.

이 밤 중에 얼굴의 반을 가린 선글라스를 쓰고, 커다란 원형 모자로 머리를 가린 여성이 나타났다.

빨간 하이힐에 검은색 미디스커트.

옷이 타이트해서 몸매가 드러나는데, 관리를 아주 잘한 듯 날씬하고 탄탄했다.

선글라스 때문에 시선이 어디로 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으나.

얼굴 방향은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혁을 향해 있었다.

지혁은 정말 오랜만에 압도당하는 카리스마를 느꼈다.

‘이런 느낌 진짜 오랜만인데.’

‘그 세계’에서 최강 그룹인 ‘A-6’ 캠프의 리더에게서 느껴본 기운이었다.

여성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 TV에서 본 것보다 더 훈훈하시네요.”

지혁은 살짝 고개를 숙여서 답례했다.

두 사람 간의 탐색전에 영업본부장은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일단, 앉으시죠.”

여성이 먼저 앉은 뒤.

지혁과 영업본부장도 따라서 앉았다.

영업본부장은 여성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괜찮으시면, 제가 간단히 소개해도······.”

여성은 그러라는 듯 손짓을 하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영업본부장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오 팀장.”

“네.”

“이 분은 선도생명 대표이사. 오혜진 사장님일세.”

지혁은 잠자코 영업본부장의 소개를 들었다. 아직 할 말이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선도그룹 오종건 회장님의 둘째 자제분이시네.”

“그렇군요.”

지혁은 오 회장의 자제일 거라는 건 예상했던 터라, 놀라진 않았으나.

‘둘째면, 오 부회장 바로 아래 동생이라는 거잖아?’

경영권 승계 이인자라는 사실에는 좀 놀랐다.

“반가워요. 명함 드릴게요.”

오 사장은 핸드백을 찾다가.

“어머, 핸드백을 차에 두고 왔나 보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업본부장이 재빨리 말했다.

“제가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아, 네. 비서가 식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네.”

아무렇지도 않게 나이 오십 넘은 영업본부장을 시켜 먹는 걸, 지혁은 유심히 바라봤다.

‘두 사람 상하 관계가 확실하구나.’

방 안에는 지혁과 오 사장 둘만 남았고.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그녀가 물었다.

“오 팀장님도 정식으로 소개 좀 해 보세요.”

지혁은 뻔히 다 알 것 같은 얘기지만, 인사치레로 소개했다.

“선도물산 상품기획 1팀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는 오지혁 대리라고 합니다.”

“······ 오지혁.”

자신의 이름을 곱씹는 그녀를 보며, 지혁은 생각했다.

'정말 만나고 싶었다. 이제야 확인해 볼 수 있겠네.'

지혁은 상대가 누구든, 불필요하게 기다리지 않는다.

“왜요. 이름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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