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사원이 능력을 숨김-69화 (69/301)

69. 오 씨를 만나다 (2)

“문제? 음······ 뭐 그런 거까진 아니고요.”

지혁은 줄곧 자신이 선도그룹 오너일가와 특수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인사팀장과의 대화였다. 그는 지혁에게 당연하다는 듯 ‘오 회장’의 안부를 물었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이었던 건······ 이 얘기를 꺼냈을 때의 어머니의 석연치 않은 태도.

지혁은 ‘그 세계’의 경험을 통해, 의미 없는 행동은 없다고 믿는다.

“제가 연일 오 씨인 거 아시죠?”

“······.”

오 사장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그래요. 저와 본관이 같더군요. 저도 얘기 듣고 신기했어요.”

인사팀이 아는 걸, 오너일가가 모를 리 없었다고 생각했다.

‘역시 알고 있었군.’

“저희 가족 말고는 연일 오씨를 본 적이 없어요. 궁금하긴 하더군요. 신기하기도 했고. 호호.”

“본관이 같아서 더 만나고 싶었다는 말씀인 거죠?”

오 사장은 지혁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지혁은 간 보듯 돌려가며 물어보고 싶지 않았고. 오 사장은 그의 의중을 파악했다.

“근데······ 말을 재밌게 하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혹시 나와 혈연관계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

“뭐 본관이 같으니 멀리 보면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건 좀 과한 추측이 아닐까요?”

오 사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왜 이름이 지혁일까요? 뭐, 요즘 꼭 돌림자를 쓰는 건 아니지만.”

연일 오씨에 대해 알아봤기에, 그녀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다.

국내에 몇 명 없는 성씨라, 지혁의 나이 정도면 몇 세대인지 뻔했다.

‘진’자 돌림을 써야 맞다. 오진양 부회장과 같은 돌림자 ‘진’을.

오 사장은 지혁을 물끄러미 보고 물었다.

“혹시 아버지께 여쭤봤어요?”

여쭤볼 수 없다. 어릴 적에 돌아가셨으니까.

자세를 고쳐 잡고, 본격적으로 얘기해보려는데.

‘똑똑.’

영업본부장이 들어왔다.

***

“오 사장님. 핸드백 가져왔습니다.”

“어머, 감사해요.”

검은색의 별다른 문양 없는 단조로운 디자인의 핸드백이었다.

오 사장은 금색의 명함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빼내어 지혁에게 건네었다.

“자, 제 명함이요.”

“감사합니다.”

‘선도생명 대표이사 오혜진’

지혁은 이런 높은 직급의 명함은 처음 받아봤다.

‘대표이사······ 좀 멋지긴 하네.’

오 사장은 지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받기만 할 거예요? 오 팀장님은 명함 안 줘요?”

“필요하세요? 드릴게요.”

그녀가 명함을 요청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여기 있습니다.”

오 사장은 지혁이 건넨 명함을 받으며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요. 명함을 주고받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죠?”

“네?”

“거래하겠다는 뜻이죠.”

당연한 말이긴 한데.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의아했다.

“서로의 이름을 쓰겠다는 것.”

“······.”

“우리 약속한 거예요.”

지혁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원래 상대방을 먼저 파악하고 대응한다.

이마의 색을 보는 게 가장 확실하고.

이마가 가려져 있어서 색을 못 보는 경우에도 표정, 행동, 습관, 어조의 높낮이 등을 보며 상대방을 파악한다.

하지만 그녀는 선글라스와 모자로 얼굴과 이마를 가리고 있었고, 어조도 일정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자신을 철저히 숨기는 모습을 보며.

‘확실히 인물은 인물이구나.’

현실로 돌아온 후 최강자를 만난 것 같았다.

상품본부장, 영업본부장과는 비교도 안 됐다.

‘차라리······.’

이럴 때는 행동 의미를 파악하지 말고, 그녀가 의도한 대로 따라가 보자 싶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쓰시려고요?”

“어머.”

오 사장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고.

영업본부장도 살짝 미소지었다.

“통찰력 있다는 말이 진짜네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

지혁은 그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난 우리 오빠가 회장이 되길 원치 않아요.”

.

.

.

.

“네?”

지혁은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대놓고 속내를 밝힐 줄은 생각 못 했다.

“제 오빠. 누군지 몰라요?”

“오진양 부회장······.”

“맞아요.”

오 사장은 말을 하기 시작하니, 거침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오빠를 봐왔어요. 오빠는 스페셜리스트에 적합하지, 경영자로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

“성격이 너무 급진적인 데다가.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해서··· 절대로 남의 말을 듣지 않아요.”

지혁이 ‘그 세계’에서 만났던 캡틴이 딱 그랬다.

그렇게 쳐들어가지 말자고 말렸음에도, 그는 캠프의 운명을 걸고 전투를 벌였으며.

결국엔, 다 죽었다.

“위험한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잠자코 듣던 영업본부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은 아버지가 계셔서 마음대로 못 하지만. 만약 돌아가시거나 경영권 승계가 완벽히 끝나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

“쌓기는 어려워도,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거든요.”

지혁은 잠자코 듣다가.

“진짜 이유는 말씀 안 하시네요.”

날카롭게 한 마디 던졌다.

“오 사장님이 오너가 되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 아니에요?”

여전히 선글라스에 숨긴 그녀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으나.

갑작스러운 정적에서, 그녀의 감정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영업본부장은 난감한 얼굴로 지혁과 오 사장을 번갈아 보았고.

오 사장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호호. 그런 얘기는 입 밖으로 내면 안 되지.”

지혁은 간단하게 말했다.

“이유는 상관없습니다.”

“······.”

“어쨌든, 목적이 마음에 드네요. 협조하겠습니다.”

오 사장의 목표는 지혁의 목표와 일치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너무 시원한 거 아니에요? 좀 의심스러운데?”

오 사장이 농담 섞인 진담을 말했고.

똑똑.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우리 식사하면서 편하게 얘기할까요?”

***

음식은 지난번에 먹었던 것과 같았다.

여전히 맛이 기가 막혔고, 음식을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긴장이 좀 풀렸다.

오 사장은 음식을 먹을 때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부회장님이 제 말은 잘 들으시거든요. 송 상무까지 나갔으니, 앞으로 더 제 의견에 귀 기울이시겠죠. 아, 오 팀장. 선도물산이 선도그룹의 지주회사인 건 알고 있죠?”

지혁은 오 사장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계열사거든요. 그래서 장악해야 돼요.”

지혁은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앞으로의 계획을 자연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한 상무님은 곧 전무가 되실 거예요. 진작에 승진됐어야 했는데, 송 상무 쳐내는 거 때문에······ 그간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한 상무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오 사장이 말했다.

“선도물산에서 계속 영향력을 크게 만들어 가셔야 해요. 1년 안에 부사장 자리 이상은 간다는 생각으로.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 팀장은······.”

오 사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분간 현 직책을 유지할 거예요. 상품기획 1팀장이요.”

“네?!”

영업본부장이 당황했다.

이번 일의 일등공신.

지혁이 아니었다면, 상품본부장을 쳐낼 수 없었다.

“오 팀장, 솔직한 거 좋아하죠?”

“네. 돌리지 않고 말하는 게 좋습니다.”

오 사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 아직 오 팀장 못 믿어요.”

영업본부장은 당혹스러운 눈길로 지혁을 바라봤으나.

지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서운한가요?”

“아니요. 그러실 만하죠. 저도 대표님 못 믿는데.”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영업본부장은 생각했다.

‘비슷한 부류의 사람인 건가? 분위기도 그렇고······ 외모 느낌도.’

지혁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오 사장의 얼굴을 못 보고 있지만.

영업본부장은 두 사람의 얼굴을 안다.

“오 팀장은 저격수 역할을 해줬으면 해요. 보아하니, 그게 특기인 거 같은데.”

지혁은 생각했다.

‘무기가 되어달라는 거네. 상관없지. 어차피 목표가 같으니까.’

“목표를 향한 저격이 되겠죠?”

“당연하죠.”

“그래서, 제가 얻는 건 뭡니까?”

오 사장은 빙그레 웃고는 말했다.

“우선 직급부터 올려야지. 지금 직급은 팀장직에 어울리지도 않잖아요?”

오 사장은 빚지는 걸 아주 싫어한다.

본인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는데, 보상해주지 않는 건 빚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업본부장은 한시름 놓은 표정이었다.

‘승진시켜 주신다는 거잖아.’

하지만 지혁은 웃지 않았다.

“함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도 보상을 해주셔야 해요. 안 그러면 제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머지 분들은 오 팀장이 한 상무님과 상의해서 해요. 한 상무님이 건의하는 대로 난 받아들일 테니까.”

영업본부장은 고개를 숙이며 대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얘기는 모두 끝났다.

영업본부장은 눈치를 살피고는 바로 분위기를 바꿨다.

“자,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받으시죠.”

“네.”

오 사장은 잔을 받으며 말했다.

“오 팀장.”

“네.”

“이제,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이미 말 놓고 물은 거였지만, 지혁은 개의치 않았다.

그것보다는.

중요한 걸 확인해야 했다.

“그건 편하실 대로 하시고요. 전 오 사장님 계획에 협조하겠다고 했습니다. 근데, 전제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모자를 좀 벗어주세요.”

“네?!”

중요한 일을 하려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봐야 했다.

만약······ 그녀마저도 보라색이라면.

'이마의 색을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그녀는 실소를 하며 말했다.

“갑자기 내 헤어 스타일이 궁금해? 모자는 왜?”

지혁은 이 일에 대해서는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물음에 답하지 않고, 할 말만 했다.

“모자를 벗고 이마를 훤히 드러내 주세요.”

“이봐! 이분이 누군지 알고, 그런 건방진······.”

영업본부장이 말렸으나, 지혁은 한번 더 말했다.

“제 전제조건은 이것뿐입니다. 못 하신다면, 전 오늘 일 없었던 거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지혁 입장에서도 오 사장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용할 수는 없었다.

지혁의 폭탄 발언에 영업본부장은 표정이 굳었고.

오 사장도 미동도 없이 가만있다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그건 말씀 못 드립니다.”

“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래, 취향 참 특이하네. 근데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

그녀는 곧바로 모자를 벗었고.

찰랑-

웨이브 진 풍성한 갈색머리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이마를 드러내었다.

“됐지? 선글라스는 안돼. 화장을 가볍게 하고 와서.”

“······.”

지혁은 오 사장의 동그란 이마를 뚫어지게 보다가······ 미소지었다.

‘괜찮네. 보라색은 아니네.’

***

저녁 식사는 약 1시간가량 진행되었다.

서로의 생각과 계획이 있고.

그걸 확인하러 온 자리라, 일 얘기는 오래 나눌 게 없었다.

마지막 디저트까지 먹은 후에 오 사장이 말했다.

“인제 그만 일어날까요?”

오 사장은 영업본부장을 향해 말했고.

“네, 그러시죠.”

영업본부장은 바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이 자리에서만큼은 영업본부장은 그냥 오 사장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뚜벅. 뚜벅.

영업본부장이 앞장서 걸어갔고.

그 뒤에 약간 거리를 두고, 오 사장과 지혁이 따라 걸었다.

오 사장은 영업본부장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 팀장.”

“네.”

“아까 하던 얘기.”

“뭘 말씀이세요?”

“이름에 대해서 아버지께 여쭤봤어?”

오 사장은 영업본부장이 없을 때, 지혁과 나눈 얘기가 마음에 걸렸다.

지혁의 의구심이 오 사장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이름에 왜 돌림자를 안 썼는지.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요.”

“아······ 그럼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건가?”

“······.”

오 사장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더 얘기하진 않았다.

뚜벅. 뚜벅.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가며, 지혁은 생각했다.

‘어머니는 분명히 아실 거야.’

어머니는 오 회장 얘기를 꺼냈을 때,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였었고. 지혁 또한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자세히 묻지 않고 관뒀었다.

하지만, 이미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은 일. 끝을 보고 싶었다. 지혁은 그런 사람이니까.

‘다시 한번, 확실하게 여쭤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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